三藩의 乱

개요

삼번의 난청나라시기 4대 황제 강희제때 중국에서 일어난 한인(漢人) 무장들의 반란이다. 윈난(운남)오삼계(吳三桂), 광둥(광동)상지신(尚之信), 푸젠(복건)경정충(耿精忠)을 주축으로 반란이 일어났다.


이걸 알려면 삼번이라는 제도를 알아야 하는데, 청나라가 중국중원과 중국남부를 다 정복하는데 한족입장에서는 한간(한족 매국노), 명나라를 배신하고 청나라에 붙은 명나라 장수들의 활약이 아주 절대적이었다. 오삼계부터 명나라가 망하고 산해관을 열어서 청나라가 중원에 들어가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오삼계 만큼은 아니더라도 상가희나 경정충도 명과 그 잔당이라고 할 수 있는 남명이 멸망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런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에 3명의 한족장수를 청황제는 번왕으로 작위를 내리고 삼번이라는 국경근처에 사실상 독립된 왕국 같은 것을 경영하게 특권을 준다. 이것이 삼번제도이다. 남명세력이 잔존했기에 남명잔존세력 국경 넘어 끝까지 쫓아가서 말살하라는 의미도 있다. 실제로 오삼계는 망명한 남명황제를 결국 죽이는데 성공한다.


근데 청이 이미 대륙을 제패하고 난 이후에는 이 삼번은 나라안에 또 다른 세력으로 공신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필요는 없고 세금은 내지도 않고 도리어 지들이 그 지역에서 왕처럼 세금을 걷으며 청황제 입장에서 부담과 위협만 되는 세력이 된다.


그래서 강희제 때 강희제는 반대를 무릅쓰고 이 삼번의 철폐할 생각을 가진다. 상가희는 삼번의 왕 작위에서 물러나서 원래 자신의 고향인 요동으로 돌아갈 것을 강희제에게 부탁하는데, 강희제는 이 요구를 윤허하면서 번왕을 아들에게 세습하는 것을 불허한다. 상가희는 이 요구를 받아 들였지만 다른 두번과 상가희의 아들은 어짜피 가만히 있으면 특권을 빼앗기고 토사구팽 당할테니 반란이라도 일으키자 하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삼번 중 오삼계의 세력이 가장 컸고, 오삼계는 주나라를 만들고 스스로 황제로 칭제건원까지 한다.

초반에는 오삼계 세력은 청나라와의 전투에서 거의 연전 연승을 한다. 오삼계는 역전의 용사였고, 이때 이미 중원에 들어온 팔기군을 나태해지고 약화된 상태였다. 하지만 그것도 소강상태가 되고 오삼계는 나이가 많아서 얼마 가지 않아 죽고, 주나라는 오삼계의 아들 때에 망하게 된다.

오삼계의 난이라고도 하는데 상가희는 도리어 가담하지 않았고 청은 경정충도 회유하는데 성공해서 오삼계와 연계를 끊는다.

강희제는 당연히 삼번의 난을 진압하고 삼번이라는 제도를 없애버리고 청의 직할통치로 바꾼다. 어떤 의미에서 삼번의 난을 진압하고 삼번제도를 폐지하면서 강희제 때 진정으로 청이 중국대륙을 다 통일하게 되었다 볼수도 있다.

오삼계는 뻔뻔하게도 본인이 남명황제를 죽여 놓고, 본인이 죽인 남명황제 무덤 앞에서 무릎끓고 눈물을 흘리고 청나라 때 관복을 버리고 명나라 때 갑옷을 입는다. 당연히 한족들 명나라의 유신이나 반청복명을 꾀하는 세력들 입장에서 명나라를 멸망시키는 게 결정적인 역할을 한 한간의 대명사인 오삼계가 명나라를 다시 일으키겠다는 소리에 콧방귀를 끼고 지지를 보내지 않았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