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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조약의 체결 과정
최근 수정 : 2019년 8월 19일 (월) 10:25

일러두기

함께 보기: 이승만TV “‘을사오적’을 위한 변명” 강연.


작성 기초 자료들

(1) 이 문서는 김용삼, “‘을사오적’을 위한 변명”, 이영훈 외 공저, 《반일 종족주의》, 미래앤, 2019, 204~212쪽을 기반으로 작성하되, 상세한 설명을 덧붙여 전체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2) 또한 이 글에서 언급한 각종 자료를 수집하여, 위의 기본 자료를 보완하고자 하였다.


연관 검색어

다음의 표제어들과 내용상 일관성을 유지해야 하며, 상호 참조할 필요가 있다.

역사 바로세우기, 민족 정기 회복, 친일청산, 한일 청구권 협정, 역사왜곡


다음 표제어의 내용을 참고하고, 내용이 없는 표제어에는 이 문서와 내용상 일관성을 갖추어 설명이 더해지기를 바란다.

을사오적, 러일전쟁, 고종, 아관파천,

개념

1905년(고종 42) 11월 17일 대한제국의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과 주한 일본 공사이자 특명전권공사(特命全權公使)였던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국사편찬위원회의 번역에 따르면 ‘곤노스께’)에 의해 체결된 조약이다. ‘제2차 한일 협약’이라고도 한다. 을사조약(전문)을 참고할 것.

역사적 배경

이 협정의 역사적 맥락은 대한제국의 성립 과정 및 러일전쟁과 그 이후에 일본이 당시의 패권국들과 맺은 각종 조약에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해를 위하여 연대순으로 관련된 주요 사건을 열거한다.

대한제국의 정치적 성격

이 당시 대한제국갑오경장을 통하여 겨우 마련한 근대적 개혁의 발판을 뒤엎고,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고 있었다. 고종의 황제로서의 전제권이 강화되어 모든 정사가 그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중이었다.


러일전쟁부터 한일의정서 조인까지

러일전쟁 발발 2주 뒤에 대한제국과 일본 사이에 체결한 <한일의정서>가 실린, <고종실록>의 해당 부분. 번역은 한일의정서(전문)을 참고할 것.


특히 이 때에는 러일전쟁(Russo-Japanese War)이 한창이었는데, 일본과 러시아는 국운을 걸 정도로 크게 격돌하였다. 세계 (현대) 전쟁사에 남을 여러 건의 전투가 이 때 벌어졌다.

1904년 2월 8일에 발발하여 1905년 가을까지 계속된 전쟁을 통해, 러시아와 일본이 모두 한반도에서 주도권을 쟁취하고자 하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명이다. 그러나 단순히 한반도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이렇게까지 커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이런 설명은 잘 맞지 않는다. 당시 영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 질서를 이해해야 이 전쟁의 본질이 무엇이었고, 그 가운데 한반도에 대한 주도권 쟁탈전이 왜 중요한가에 대해 설명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러일전쟁에 정확한 내용이 기술되기를 바란다.

어쨌든 이 전쟁의 주요 무대는 만주 남부, 특히 요동 반도와 한반도 근해였다.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 연합함대의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제독


전쟁이 발발한 뒤 2주 뒤인 1904년 2월 23일, 일본은 대한제국과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체결, 조인(調印)한다.

이는 대한제국과 일본 간에 이루어진 일종의 군사동맹에 해당되는 것으로, 이로 인해 일본은 전쟁 수행을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곳에 대해서는 한국 정부의 동의 없이 한국 영토의 어느 곳이나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 (한일의정서(전문)의 ‘제4조’를 참고할 것.)

제1차 한일 협정 체결

<한일의정서>가 체결된 뒤 6개월이 지난 1904년 8월 22일, ‘제1차 한일 협정’이 체결된다. <제1차 한일 협정(전문)>을 참고해서 본다.

총 3개 항으로 이루어진 이 협약의 1항과 2항에 따르면, 일본 정부가 추천하는 이는 대한민국 정부의 재정고문과 외교 고문에 임명하여 이들이 각각 대한제국의 재정과 외교를 일본 정부와 협의,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당시의 외무대신서리가 바로 윤치호였다.

이로 인하여 독립국가인 대한제국은 이름만 남게 되었고, 사실상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한다.

러일전쟁의 종료 후

1905년 3월 10일, 일본은 봉천(奉天) 전투(또는 펑텐 전투)에서 승리했고, 이어 5월 29일에는 쓰시마(對馬)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특히 쓰시마 해전은 지금도 세계 전쟁사(해전사) 또는 국제 관계를 설명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할 정도로 중요한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제독이 이끄는 연합함대는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크게 무찔렀고, 이로써 사실상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종료되었다.

태프트-가쓰라 협약(Taft-Katsura 協約, 또는 가쓰라-태프트 협약) 및 제2차 영일동맹 체결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7월 27일 미국과 태프트-가쓰라 협약을, 8월 12일에는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을 맺었다.

미국과 체결한 협약이 대한제국과 가지는 관련성은 이러하다. 이 협약을 통해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통치상의 안전을 보장하고, 반대로 미국은 일본의 한국에 대한 보호권 확립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기는 하였으나 국력이 피폐해진 일본은 한국에 대한 보호권 확립을 위하여 당대 패권국가였던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기대하였다.

1902년 영국과 1차 동맹(6개 조항)을 체결한 뒤에 새롭게 체결한 2차 영일 동맹은 러시아를 공동의 적으로 삼는다는 내용을 강화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제1차 영일동맹의 전문에는 한국의 독립과 영토의 완전한 유지를 보장한다는 구절이 있었는데 새로운 동맹을 맺으면서 이 구절이 삭제되었다. 제2차 영일동맹에는 일본이 한국에서 정치, 군사, 경제상의 탁월한 이익을 가지고, 영국은 이 권리를 승인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포츠머스 강화조약(Treaty of Portsmouth)[1] 체결

1905년 9월 5일, 미국의 중재로 러시아와 일본 간에 조약이 체결되었다. 포츠머스 강화조약이 바로 그것인데, 여기서 전쟁 배상금과 사할린의 양여, 만주와 청나라에서의 러시아와 일본의 정치, 경제적 이해 관계, 그리고 한국에 대한 일본의 권한 문제 등이 논의되었다. 난항을 겪기는 했지만 미국의 중재로 체결된 조약이었다.

이 가운데 2조가 한국과 관련된 것으로, 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에서의 정치, 군사, 경제에서의 특수한 이익이 있다는 것을 승인하고, 일본 정부가 한국에서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도(指導)와 보호 및 감리의 저치에 대해서 방해하거나 간섭하지 않는다는 규정을 명시했다.

이 조약으로 인해 러시아는 한반도에서 손을 떼고 나가게 되었고, 일본은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한다는 것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파견부터 을사조약 체결까지

을사조약에 대한 터무니없는 오해와 왜곡, 그리고 ‘정신승리;

KBS 뉴스 2018년 8월 22일 보도 ““잊지 말자!” 日 하야시 동상 거꾸로…표석 설치”

1905년 11월 9일 ~ 15일

포츠머스 강화조약으로 러시아가 한반도에서 손을 떼고 나가자마자,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를 대한제국에 특사로 파견한다. 그는 일본 수상을 여러 차례 역임한 베테랑 정치가였다. 1905년 11월 9일, 이토가 서울에 도착하였다.

11월 10일, 이토가 덕수궁에서 고종을 알현하였다.

이 자리에서 이토는 고종에게 일본 천황의 친서를 전달하였다.

친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동양평화와 한국의 안전을 위해 한일 두 나라는 친선과 협조를 강화해야 하며, 한국이 일본의 보호를 받아도 한국 황실의 존엄은 조금도 훼손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


11월 15일 오후 3시 30분경, 이토가 고종을 다시 알현하였다.

이 자리에서 그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넘기는 조약을 체결할 것을 요구하였다. 《고종실록》의 해당 기사에서는 이 날 조약문의 초안이 마련되었다고 전한다. 그 이외의 내용은 없다.

그런데 조약 체결에는 엄격한 절차가 있다. 체결을 요청한 나라의 공사가 먼저 한국의 외교부서와 교섭한 뒤, 외교부가 협의한 뒤에 황제의 재가를 받는 것이 정상적인 순서이다. 그럼에도 이토와 일본은 이러한 정상적 절차(프로토콜)을 무시하고 체결을 강요하였다.

이토는 조약문의 초안을 내밀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동양 평화를 영구히 유지하기 위하여 한국의 대외 관계를 일본이 맡는 것이 불가피하다. 일본의 목적은 오직 동양 평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 유지에 있을 뿐 다른 뜻은 없다. 내정은 자치에 맡길 것이므로 황제께서는 계속 한국을 다스릴 수 있다. 더불어 이 조약은 절대로 변경할 수 없다. 동의할 것이냐 거절할 것이냐는 황제 폐하의 자유이다. 그러나 만약 거절한다면 한국은 크게 곤란에 빠질 거라는 사실을 각오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 고종은 외부대신(外部大臣) 박제순(朴齊純, 1858~1916)과 하야시 곤스케(林勸助, 국사편찬위원회의 번역은 ‘곤노스께’) 공사 간에 교섭이 끝난 뒤에 의정부 회의를 열어 결정하겠다고 하였다. 이는 고종이 자신의 책임을 내각에 떠넘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1월 16일, 이토의 조선 각료 소집

고종이 이런 식으로 책임을 떠넘기자 이토는 11월 16일 오후 4시에 자신의 숙소인 손탁 호텔로 한국 정부의 각료와 원로대신들을 소집한다.

이 자리에서 그는 조약안의 내용을 절대로 변경할 수 없음을 재차 천명하였다. 다만 자구나 표현 등의 사소한 문제만 협의 가능하다는 식의 유화책을 제시했다.


11월 17일, 한일협상조약(소위 을사조약) 체결

참정대신 한규설이 울며 겨자 먹기로 회의를 열다

11월 16일 손탁 호텔로 불려가 이토의 협박을 받은 한국의 각료들은, 11워 17일 오전에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1848~1930)의 주재로 일본공사관에 모여 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의견을 내놓지 못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결국 하야시 공사가 대신들과 입궐하여 고종의 알현을 요청하였다.


을사조약 협상에 참석하여, 조약을 반대한 당시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1848~1930). 하야시 곤스케(곤노스께)의 협박 때문인지 그는 조약이 성사되던 날 파직 당했다.

몸이 불편하다며 고종이 자리를 피하다

그러나 고종은 하야시 등의 알현 요청에 대하여 몸이 불편하다며 거절하였다. 대신 그는 각료들과 어전회의를 열었고, 이에 하야시 공사가 휴게실에서 기다리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이날 회의에서 고종은 이렇게 말한다.

“이토가 대사가 말하기를 이번 조약문에서 문구를 고치는 정도로는 협상을 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거절하면 앞으로 이웃나라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니 조약 문구를 변경하는 것이 가능할 것 같다.”[1]

어전회의가 끝나고 휴게실로 돌아온 대신들에게 하야시가 결과를 묻자, 한규설은 “황제께서는 잘 협상해서 처리하라고 했지만 우리 여덟 사람은 반대 의견을 말씀 드렸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하야시는 화를 내고 폭언을 하였다. “당신 나라는 전제군주국이니 황제 폐하의 지시가 있었다면 이 조약이 순조롭게 체결되어야 할 것 아닌가? 당신들 여덟 대신들이 폐하의 명을 거역하는가? 이런 대신들을 조정에 둘 수는 없다. 특히 당신 참정대신(한규설)과 외부대신을 갈아야겠다.”

실제로 《고종실록》의 11월 17일 기사에는 한규설을 파직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하야시 곤스케( 林権助, 1860~1939)1900~1906년에 주한 일본 공사를 역임했으며, 한일 협정의 일본 측 대표로 서명하였다.


11월 17일 저녁, 이토 입궐부터 조약 체결 결정까지

오후 8시가 되자 이토 특사가 조선주둔군의 사령관을 거느리고 입궐하여 알현을 요청했다. 그러나 고종은 “대신들에게 협상을 잘 처리하라고 했으니 대사가 타협 방도를 강구하기를 바란다.”는 전갈만 보낸다.

이에 이토는 한국의 대신들과 회의를 열었고, 각각에게 조약 체결에 대한 찬반을 물었다.

이 회의 자체가 외교상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으나, 고종이 이를 허락한 셈이었다.

회의 결과, 조약 체결에 찬성 또는 묵시적 찬성 6명, 반대 2명이었다.

조약 체결에 반대한 두 명의 대신은 이날 파직된(될) 한규설과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 민영기(閔泳綺, 1858~1927)였다.

바로 뒤에 고종이 어명을 내려, “조약문 중에 보태거나 깎을 것은 법부대신(法部大臣)이 일본 대사 및 공사와 교섭하라”고 지시하였다. 대한제국 황제가 조약 체결을 승인한 순간이었다.


속성으로 진행된 조약문 수정 타협

이 내용은 을사조약(전문)과 비교하며 보도록 한다.


  •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 1858~1919)은 제1조의 초안 중 “일본 정부가 모두 자기 뜻대로”라는 표현의 삭제를 요구하였다.

이토는 이를 수용하였다.

  • 학부대신(學部大臣) 이완용(李完用, 1858~1926)은 제3조의 ‘통감(統監) 권한’을 분명히 해야 함을 주장하며, “(이를) 외교 문제에만 국한 시키고 내정은 간섭하지 않는다”라는 내용을 명기할 것을 요구했다.

이토는 이 의견의 접수를 거부하였다.

대신 이토는 “1명의 통감(統監)을 두되 통감은 오로지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 경성(京城)에 주재하면서”라는 문구를 삽입하는 선에서 동의하였다.

이완용은 통감의 내정간섭 불가를 명문화하려고 애썼지만, 그 의견을 이토가 거부한 것이다.

  • 농상공부대신(農商工部大臣) 권중현(權重顯, 1854~1934)은 “황실의 안녕과 존엄 유지 보장” 조항을 삽입하자고 제의하였다.

이토는 이를 수용하였고, 이 내용이 제5조로 삽입되었다.

그 결과 일본이 미리 준비해 온 4개 항의 조약 내용이 5개 항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11월 18일 오전 1시, 조약이 체결되다

이 회의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자신이 직접 붓을 들어 문안 수정 작업을 했다.

그는 이 내용을 정서한 뒤에 고종의 재가를 받았다.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 공사 하야시 사이에 조약이 공식적으로 체결된 시간은 11월 18일 오전 1시였다. 《고종실록》에는 조약문이 11월 17일자로 정리되어 있다. 실록은 당일에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왕의 승하 뒤에 일정한 시간 동안 재정리하여 편찬한다.

조약 체결 직후 고종은 이토에게 협상 타결을 위해 애썼다는 위로의 칙어를 내린다.

모든 책임이 을사오적에게? 아니, 책임의 처음과 끝 모두 고종에게!

을사조약 체결 과정을 이와 같이 재구성해보면, 을사오적이라는 표현과 그 개념의 허구성과 허위성이 드러난다. 다음과 같은 이유다.


이완용은 좌천되었다가 돌아온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상태였다.

당시 이완용은 불과 며칠 전에 입각한 신참 학부대신에 불과했다.

게다가 이 즈음 하루가 멀다하고 내각 각료가 바뀌면서, 일본 공사뿐 아니라 당시 한국의 외교가에서는 “내각 변경 내용을 접수 받기도 곤란할 지경”이라고 불평을 쏟을 정도였다.

이완용은 1897년 9월 러시아 군사 교관의 초청을 반대하다가 학부대신(學部大臣)에서 평안남도 관찰사로 좌천되었다. 그 뒤 부친이 사망하여 2년간 상을 치르는 등 야인 생활을 하다가 1904년 11월이 되어서야 다시 벼슬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완용이 을사조약을 처음부터 끝까지 계획하고 치밀하게 준비할 수 있었는지는 참으로 합리적인 의심이 드는 부분이다.

게다가 앞서 설명한 바대로, 11월 16일에 고종의 관대한 지시(?) 아래 이토의 지시를 받아 손탁 호텔에 모인 각료들은 그 위협적인 분위기와 급박한 정세 때문에 제대로 자기 의견을 표명하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고종실록》의 이후 기사는 거의 모두 상소문

이토가 특사로 임명되어 서울에 온 뒤부터의 고종 실록 기사들을 열람해 보자.


을사조약(한일 협정)에 한국 대표로 이름을 올린 외부대신(外部大臣) 박제순(朴齊純, 1858~1916). 이 일로 '을사오적'의 한 명이 되고 말았다.


  • 이토 히로부미가 공사 하야시 곤노스께를 시켜 협약초안을 제출하다
  • 일본 대사 일행중 시종 무관 이노우에 요시토모 등에게 훈장을 수여하다
  • 강운섭을 공사관 3등 참서관에 임명하다
  • 권중석을 육군 헌병 사령관에 임명하다
  • 한일 협상 조약을 체결하다
  • 의정부 참정 대신 한규설을 파면하다
  • 민영철을 의정부 참정 대신에 임명하다
  • 법부대신 이하영이 벼슬을 내놓겠다는 상소를 올리다
  • 권중현이 한일 협상 조약을 막지 못한 것으로 사직을 청하다
  • 이근명이 한일 협상 조약을 맺은 대신들을 처벌하도록 청하다
  • 이우면이 한일 협상 조약을 맺은 대신들을 처벌하도록 상소하다
  • 박기양이 한일 협상 조약을 맺은 대신들을 처벌하도록 상소하다
  • 박봉주가 한일 협상 조약을 맺은 대신들을 처벌하도록 상소하다
  • 박제순에게 임시로 의정부 의정 대신의 사무를 대리시키다
  • 조병세가 한일 협상 조약을 맺은 대신들을 처벌하도록 청하다
  • 민종묵이 한일 협상 조약을 맺은 대신들을 처벌하라고 상소를 올리다
  • 윤두병이 한일 협상 조약을 맺은 대신들을 처벌하라는 상소를 올리다
  • 이근명이 한일 협상 조약을 맺은 대신들을 처벌하라고 아뢰다
  • 이상설이 한일 협상 조약을 맺은 대신들을 처벌하라고 상소하다
  • 탁지부에서 수입인지 규정을 시행하다
  • 권중현이 한일 협상 조약을 맺은 것과 관련하여 사직하는 상소를 올리다
  • 이유승이 한일 협상 조약을 맺은 신하들을 처벌하라고 상소하다
  • 박제빈이 한일 협상 조약을 맺은 신하들을 처벌하라고 상소하다
  • 이종태가 사직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다
  • 정홍석이 한일 협상 조약을 맺은 대신들을 처벌하라고 상소하다
  • 정명섭이 한일 협정서가 효력이 없음을 선포하도록 상소하다
  • 윤두병이 한일 협상 조약을 맺은 대신들을 처벌하라고 상소하다
  • 신성균이 한일 협상 조약을 맺은 대신들을 처벌하라고 상소하다
  • 강원형이 한일 협상 조약을 맺은 대신들을 처벌하라고 상소하다
  • 안병찬이 한일 협상 조약을 맺은 대신들을 처벌하라고 상소하다
  • 특진관 조병세 등이 박제순 등을 참형에 처하라고 상소하다
  • 조병식이 한일 협상 조약을 맺은 대신들을 처벌하라고 상소하다
  • 홍우석이 한일 협상 조약을 맺은 대신을 처벌하고 협정을 무효화하도록 청하다
  • 안종화가 한일 협상 조약을 맺은 대신들을 처벌하라고 상소하다
  • 이용태가 한일 협상 조약을 맺은 대신들을 처벌하라고 상소하다
  • 박제황이 한일 협상 조약을 맺은 대신들을 처벌하라고 상소하다
  • 윤병수가 한일 협상 조약을 맺은 대신들을 처벌하라고 상소하다
  • 민영규가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다
  • 서상교를 궁내부 특진관으로, 윤진우를 시종원 부경에 임명하다
  • 조병세와 이근명에게 물러가도록 명하다
  • 조병세와 이근명이 명령에 불응하고 대궐 뜰에서 호소하다
  • 조병세가 한일 협상 조약을 맺은 대신들을 처벌하라고 상소하다
  • 명령에 불응한 조병세와 이근명을 대궐 밖으로 내쫓다
  • 이근수가 한일 협상 조약을 맺은 대신들을 처벌하라고 상소하다
  • 홍순형이 한일 협상 조약을 맺은 대신들을 처벌하라고 상소하다
  • 박정양이 한일 협상 조약을 맺은 대신들을 처벌하라고 상소하다
  • 최재학이 한일 협상 조약을 맺은 신하들을 처벌하라고 상소하다
  • 이위래가 한일 협상 조약을 맺은 대신들을 처벌하라고 상소하다
  • 박제순을 의정부 참정 대신에 임명하다
  • 이우면이 조병세와 이근명을 문밖으로 내쫓는 법을 철회하도록 청하다
  • 민영환이 한일 협상 조약을 맺은 대신들을 처벌하라고 상소하다
  • 민영환이 한일 협상 조약을 맺은 대신들을 처벌하라고 다시 상소하다
  • 한일 협상 조약을 맺은 대신들을 처벌하라고 상소한 이들을 잡아들이라 하다
  • 이명상이 상소올린 자들을 잡아들이란 명령을 철회하라고 청하다
  • 조병식이 한일 협상 조약을 맺은 신하들을 처벌하라고 상소하다
  • 김종한이 한일 협상 조약을 맺은 신하들을 처벌하고 협약을 취소하라고 상소하다
  • 이상영이 한일 협상 조약을 맺은 대신들을 처벌하라고 상소하다
  • 노봉수가 한일 협상 조약을 맺은 대신들을 처벌하라고 상소하다
  • 조병세, 이근명을 용서하고 전직을 임명하다
  • 조병세, 이근명에게 집으로 돌아라도록 명하다
  • 상소를 올린 민영환 등을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철회하다
  • 최익현이 한일 협상 조약을 맺은 대신들을 처벌하라고 상소하다
  • 민영환이 한일조약에 분개하여 자살하다
  • 죽은 민영환과 이한응에게 벼슬을 추증하다
  • 민영환에게 충문공이라는 시호를 주다
  • 특진관 조병세가 집으로 돌아가도록 용서해준 것에 감사하다
  • 특진관 이근명이 집으로 돌아가도록 용서해준 것에 감사하다
  • 심순택이 한일 협상 조약을 맺은 대신들을 처벌하라고 상소하다
  • 이남규가 한일 협상 조약을 맺은 대신들을 처벌하라고 상소하다
  • 한규설에 대한 징계를 면제시켜 주다
(굵은 글씨 등 강조는 편집자)


정말 끝도 없이 상소가 올라왔는데, 주목할 것은 다음과 같다.

  • 을사오적’에 속하는 권중현, 또한 여기에는 속하지 않으나 당시 조약 체결에 참여한 주요 인물(이하영 등)들도 역시 자신들의 책임을 절감하며 사직을 요청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협정을 체결할 당시에도 조약문의 일부라도 고치기 위해 애쓴 사람들이다. 이완용 역시 마찬가지다.
  • 협정을 체결한 대신을 잡으라는 상소문을 올린 자들을 잡아 올리라는 명령도 내려졌다. 물론 제대로 시행되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런 명령이 묻힐 정도로 상소문이 이후에도 쏟아졌기 때문이다.

당시 여론이 호도(糊塗)된 면이 분명히 있었다.

당시의 언론 역시 사실 확인 없이 상소문 내용만을 ‘제보’ 받아서 보도한 측면이 크다.

특히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Ernest T. Bethell)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가 대표적인데, 당시 대부분 기사의 골자들은 “황제는 끝까지 조약 체결을 반대했지만 을사오적들이 일본에 굴복하여 체결했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지금까지도 고종과 대한제국 황실(더 나아가 구한말의 조선 왕실)에 대한 일종의 신화가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참고 자료

  • 김용삼, “‘을사오적’을 위한 변명”, 이영훈 외 공저, 《반일 종족주의》, 미래앤, 2019, 204~212쪽
  • 《고종실록》, 국사편찬위원회[2]
  • “러일전쟁 전후 100주년에 보는 독도문제”, 《월간조선》2005년 6월호 [3]
  • “을사늑약에 끝까지 반대한 ‘책임정치가’ 한규설”, 《중앙일보》2009년 11월 8일 [4]

각주

  1. 그러나 이 회의 내용은 실제로는 《고종실록》에 나와 있지 않다. 실록이 아닌 의정부 문서 등을 참고해야 할 듯하다. 여기서는 문서 작성의 기초 자료인 김용삼의 《반일 종족주의》208쪽을 재인용하였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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