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히로부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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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841년 10월 16일 |
출생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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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일 |
1909년 10월 26일 |
사망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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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일본 제국 |
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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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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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이토 스미코 이토 우메코 |
자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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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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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
Signature of Ito Hirobumi.png |
서훈 |
대훈위 국화대수장 |
별명 |
이토 히로부미(일본어: 伊藤博文, 1841년 10월 16일 ~ 1909년 10월 26일)는 에도 시대 후기의 무사(조슈 번사)이자 일본의 헌법학자, 정치가이다. 아명은 리스케(利助)로, 후에는 슌스케(俊輔, 春輔, 舜輔)로 불렸다. ‘슌보’(春畝)나 ‘소로카쿠슈진’(일본어: 滄浪閣主人) 등이라고 불렸으므로, ‘슌보 공’(春畝公)이라고 쓴 것도 많다.
을사늑약 체결과 조선통감 취임
러일 강화 조약 체결 이후 1905년 10월 27일 한국과 보호조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손에 넣는다는 고무라 주타로 외상의 구상이 내각 회의에서 통과된 이후 이토는 한국 정부에 조약을 강요하는 일을 맡았다.
1906년 3월 이토가 초대 통감(총독)으로 취임해 조선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했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그는 대한제국의 황태자 이은의 스승을 자처한다. 유교적 학식이 있었던 그는 이은의 보호자이자 스승이라는 명목으로 그를 데리고 도일한다. 이토는 일본어와 군사 지식을 직접 가르쳤다 한다.
한국 고종 양위 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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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관계
이토 히로부미의 본래 성씨인 하야시 가문은 뿌리가 오토모(大友) 일족의 파생된 일족, 또는 지역 명에 따온 성이라고 한다. 히로부미 이후에는 이토 라는 성을 사용하였다. 히로부미의 장남 이토 분키치는 1909년 11월 10일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분키치의 이복형제인 이토 히로쿠니(伊藤博邦)는 공작에 올랐다.
- (증조부) 이토 야에몬(林弥右衛門)
- (조부) 이토 스구에몬(伊藤直右衛門)
- (조모) 모리타 미치타네(守田通種)의 딸
- (부) 이토 주조(伊藤十蔵, 1816년 ~ 1896년)
- (모) 이토 고토코(伊藤琴子) - 아키야마 조자에몬(秋山長左衞門)의 딸
- (부인) 이토 스미코(伊藤すみ子)
- (부인) 이토 우메코(伊藤梅子, 1848년 ~ 1924년)
- (양자) 이토 히로쿠니(伊藤博邦, 1870년 ~ 1931년) - 친부는 조슈번사 이노우에 미쓰토(井上光遠, 이노우에 가오루 후작의 형)
- (양자부) 이토 다마코(伊藤たま子) - 다카시마 가에몬(高島嘉右衛門, 역술가)의 장녀
- (서장남) 이토 분키치(伊藤文吉, 남작) - 본디 히로부미의 서자이나 기다 이쿠자부로(木田幾三郎)의 장남으로 길러졌고 후에 히로부미의 양자로서 호적에 올려졌다.
- (서장자부) 가쓰라 다로(桂太郎)의 다섯째 딸
- (서차남) 이토 신이치(伊藤眞一, 1890년 ~ 1980년) - 어머니는 신바시의 게이샤
- (장녀) 이토 사다코(伊藤貞子) - 요절, 어머니는 우메코
- (차녀) 스에마쓰 이쿠코(末松生子) - 어머니는 우메코, 스에마쓰 겐초(末松謙澄, 내무대신)의 부인
- (삼녀) 니시 아사코(西朝子) - 어머니는 히로부미의 하녀(女中, 다마 지역 출신), 니시 겐시로(西源四郎, 루마니아 공사)의 부인
- (외손녀) 후지이 세이코(藤井清子) - 니시 겐시로 부부의 딸, 후지이 게이노스케(藤井啓之助, 체코슬로바키아 공사)의 부인
- (사녀, 서녀) 오타케 사와코(大竹澤子) - 스에마쓰 겐초 부부의 양녀로 입적, 오다케 도라오(大竹虎雄, 오다케 다케(大竹多気, 기계공학자)의 아들)의 부인
인간 관계
학력
-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 예일 대학교 명예 법학 박사
각주
일본의 내각총리대신
일본 제국 1868 – 19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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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내각법 규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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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에 내각 제도가 창설됐으며, 시대 교체와 총리 유임을 반영하여 작성한다. (출처: 역대 내각 - 총리대신 관저 홈페이지), 위키피디아 일본의 내각총리대신 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