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히로부미 [1]
伊藤 博文 (いとう ひろぶみ)
이토히로부미.jpg
일본 제국의 제1대 내각총리대신


구로다 기요타카(제2대)
일본 제국의 제5대 내각총리대신

마쓰카타 마사요시(제4대)

마쓰카타 마사요시(제6대)
일본 제국의 제7대 내각총리대신

마쓰카타 마사요시(제6대)

오쿠마 시게노부(제8대)
일본 제국의 제10대 내각총리대신

야마가타 아리토모(제9대)

가쓰라 다로(제11대)
일본 제국의 제1대 한국통감

하세가와 요시미치(제-(임시)대)

소네 아라스케(제2대)
출생일
1841년 10월 16일
출생지
에도 막부 스오 국 구마게군 쓰가리 촌
사망일
1909년 10월 26일
사망지
국적
일본 제국
정당
학력
쇼카손주쿠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중퇴

예일 대학교 명예 법학 박사
배우자
이토 스미코
이토 우메코
자녀
분키치(서자),
히로쿠니(양자, 이노우에 가오루의 조카) 등
종교
서훈
대훈위 국화대수장
별명
리스케(利助), 슌스케(俊輔, 春輔, 舜輔), ‘슌보’(春畝), ‘소로카쿠슈진’(滄浪閣主人), ‘슌보 공’(春畝公), 충정군(忠貞君), 대한제국 시호 문충(文忠)

이토 히로부미(일본어: 伊藤博文, 1841년 10월 16일 ~ 1909년 10월 26일)는 에도 시대 후기의 무사(조슈 번사)이자 일본의 헌법학자, 정치인이다.

아명은 리스케(利助)로, 후에는 슌스케(俊輔, 春輔, 舜輔)로 불렸다. ‘슌보’(春畝)나 ‘소로카쿠슈진’(일본어: 滄浪閣主人) 등이라고 불렸으므로, ‘슌보 공’(春畝公)이라고 쓴 것도 많다.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었으며,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였다. 이후에도 한일 병합을 추진하며 한국 민족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909년 하얼빈에서 안중근에 의해서 저격당해 사망하였다.[2]


최초의 내각총리 대신이다. 서양의 법을 참고해서 메이저 헌법을 만드는 게 기여했다.

구 천엔권 지폐도안에 들어갔을 정도로 일본에서는 위인급 인물이다.

특히 야마구치 현에서는 지역의 자랑으로 여긴다.


당시 조선과 일본을 이어주는 가교역활을 했고 또 조선통애 가까웠다. 한복을 입고 찍은 사진도 있고, 고종도 그를 좋아했다.

또 한일병합 자체는 반대했고,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하자 일본정계 정한론이 득세하여 한일병합이 빨라졌다.



을사늑약 체결과 조선통감 취임

러일 강화 조약 체결 이후 1905년 10월 27일 한국과 보호조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손에 넣는다는 고무라 주타로 외상의 구상이 내각 회의에서 통과된 이후 이토는 한국 정부에 조약을 강요하는 일을 맡았다.

1906년 3월 이토가 초대 통감(총독)으로 취임해 조선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했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그는 대한제국의 황태자 이은의 스승을 자처한다. 유교적 학식이 있었던 그는 이은의 보호자이자 스승이라는 명목으로 그를 데리고 도일한다. 이토는 일본어와 군사 지식을 직접 가르쳤다 한다.


한국 고종 양위 주도

편집중 아이콘.png 빈문단 입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가족 관계

이토 히로부미의 본래 성씨인 하야시 가문은 뿌리가 오토모(大友) 일족의 파생된 일족, 또는 지역 명에 따온 성이라고 한다. 히로부미 이후에는 이토 라는 성을 사용하였다. 히로부미의 장남 이토 분키치는 1909년 11월 10일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분키치의 이복형제인 이토 히로쿠니(伊藤博邦)는 공작에 올랐다.


인간 관계

  • 조선인 출신의 배정자(裵貞子)를 수양딸이자 제자로 삼았고 역시 조선인 출신의 박중양(朴重陽)을 제자로 삼았다.


학력


각주

  1. 자세한 사용법은 틀:총리 정보 참조.
  2. 이는 한국 독립운동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일본의 내각총리대신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