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중양(朴重陽, 1872년 5월 3일 ~ 1959년 4월 23일)는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의 관료이자, 일제 강점기의 정치인이다. 일제 강점기에 충남, 충북도지사, 황해도지사 등을 역임했으며, 1945년에는 귀족원 의원으로도 선출됐다. 1945년 광복 이후, 자신의 친일을 긍정하여 논란이 되었다.

생애

경기도 양주군의 중인 가계 출신으로, 향리 가문이었다 한다. 정확한 가계는 알수 없으며, 이력서에 본관을 반남, 다른 이력서에는 본관을 밀양이라 기록하여 역시 불분명하다.

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양자라는 소문이 유포되었지만, 현암사 대표 조상원이 만든 건국공론지와의 1949년 인터뷰에 의하면 이등박문의 양자는 아니고 은사(恩師)라 하였다.

1900년 대한제국 관비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아오야마 학원 중학부를 졸업하고, 이어 도쿄 부기학교에서 수학했다. 도쿄부기학교 수료 전 경찰관련 견습을 받기도했다. 1903년 귀국, 그해 관리서 주사에 임명되었으나 그만두고 1904년 러일 전쟁에 일본군의 편에 서서 종군했다. 귀국 후 1904년 농상공부 주사, 1906년 대구판관, 군부기사 등을 거쳐 그해 4월 일본관병식 시찰에 다녀왔다.

1906년 다시 군부기사가 되고, 경위국 경무관, 1906년 의친왕의 통역으로 일본을 다녀왔다. 1907년 대구부사가 되고, 경상북도관찰사 서리를 겸했으며 이때 대구읍성을 철거하고, 사거리 도로를 놓았다. 이후 평안남도관찰사 겸 세무감, 1908년 경상북도관찰사를 거쳐 1910년 충청남도 관찰사로 부임했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 직후 유임되어 총독부 체제하에서 충청남도장관이 되고, 도지사로 직책이 변경되었다.

1915년 퇴직후 중추원찬의가 되고, 1919년 3.1운동에 반대하여 자제단 또는 자제회를 조직하고, 만세 시위 참여자들을 설득, 귀가시켰다. 1921년 황해도지사가 되었으며 황해도지사 재직 시 서양식 병원의 도내 유치를 추진했다. 1923년 충청북도지사가 되었으며, 그해 속리산 말티고개가 비포장도로인 점을 문제삼아, 바로 포장도로로 바꾸게 했다. 이 과정에서 보은군청이 농민들을 데려다가 노임을 주지 않고, 공사에 동원했다가, 농민들이 형사와 일본인 토목기사를 집단구타하여 물의를 빚었다.

1925년 속리산에서 여승을 성추행한 일로 여승이 자살하자, 이 일로 휴직계를 내고 대기발령되었다가 곧 면직되었다. 1927년 중추원 칙임대우 참의, 1936년 중추원 고문으로 물러났다가, 1941년 일본 귀족원 의원직에 제의가 들어왔으나 사양했다. 1943년 중추원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45년 4월 일본의 조선인 몫의 칙선 귀족원 의원이 되었다.

해방 후 자신은 무죄라 주장하며, 친일파라고 비판하는 시각에 맞섰다. 1949년 1월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에 검거, 서울로 압송되었으나 질병을 이유로 가석방되었다. 1957년 이승만 대통령을 조롱하는 유인물을 인쇄, 시중에 살포했다가 검찰에 기소되었고, 정신감정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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