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명신
蔡命新
기본 정보
성별
출생
1926년 11월 27일
사망일
2013년 11월 25일 (86세)
병역
대한민국 육군 육군 제2군사령부
경력
  지휘

제38보병사단
제5보병사단
수도기계화보병사단
주월한국군사령부
제2작전사령부

  주요 참전

송악산 전투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종교
개신교(순복음교회)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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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을지무공훈장
보국훈장 국선장
방위포장
미국 공로훈장
베트남 공화국 최고훈장

채명신(蔡命新, 1926년 11월 27일 ~ 2013년 11월 25일)은 한국의 군인으로 6.25 전쟁에도 참전하였고, 월남전 당시 주월(駐越) 한국군 사령관을 지냈다. 사후에 현충원 장군 묘역에 안장되는 것이 당연했으나, 월남전에서 전사한 부하들 곁에 묻히고싶다는 본인의 유언에 따라 사병 묘역에 안장되었다.

생애

채명신(蔡命新, 1926-2013) 위키백과

채명신은 1926년 11월 27일 황해도 곡산에서 출생한 뒤 평양 부근에서 성장했다. 해방 후 김일성을 만난 적도 있지만, 같이 일하자는 권유를 뿌리치고 1947년 1월 월남했다.[1]

장군이 월남(越南)을 결심한 것은 김일성이 소련군과 함께 북한을 점령한 직후였다. 사달은 교회에 느닷없이 들이닥친 공산당원들이 다짜고짜 “교회 문을 닫으라”고 요구하면서 시작됐다.

모태 신앙으로 목사가 꿈이었던 장군의 피가 순간 거꾸로 치솟았다고 회고했다. 장군은 격앙된 목소리로 그들에게 물었다. “김일성 장군의 정강정책에도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는 걸로 아는데 당신들은 지금 장군님의 지침을 위반하는 것인가?” 공산당원들은 얼굴이 벌게지더니 이렇게 반격하는 것이었다. “천당에 가본 사람이 있는가. 본 사람이 있는가?” 장군은 이에 지지 않았다.

“당신들은 눈에 안 보인다고 공기를 부정하는가?” 궁지에 몰린 공산주의자들의 상황 모면 단골 수법이 있다. “동무! 왜 그리 말이 많소. 말 많으면 반동(反動)이오. 두고 봅시다.” 그 말을 끝으로 그들은 씩씩대며 사라졌다. 하루에도 수십 명이 “동무 잠깐 봅시다”라는 말 한마디에 끌려나가 행방불명되던 시절이었다. 다음 날 가족들이 찾아가 울고불고해도 공산당원들은 아무것도 모른다며 잡아뗐다.

채 장군에게 비슷한 일이 생길 것을 염려한 어머니와 친구들이 월남을 권유했다. 채 장군 역시 떠날 순간이 왔음을 직감했다. 젊은이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내게 “(남으로) 갈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다”고 했다. 권사였던 채 장군의 어머니도 “빨리 가라”고 재촉했다. 1947년 1월 어느 새벽 채 장군은 마침내 남으로 향했다.

참고자료

(6ㆍ25 60주년) (나와 6·25) (42) 채명신 前 주월사령관 <下> 조선일보 2010.05.26 / 종합 A6 면
(정전협정 58주년 주간 연재) 영원한 사령관 채명신의 '내가 겪은 전쟁' (中) 조선일보 2011.07.26 / 특집 A20 면
(정전협정 58주년 주간 연재) 영원한 사령관 채명신의 '내가 겪은 전쟁' (下·끝) 조선일보 2011.08.02 / 특집 A21 면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