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섭
崔亨燮
Choe Hyung-seop
대한민국 제2대 과학기술처 장관
1971년 6월 15일 ~ 1978년 12월 22일


대통령
개인 정보
출생
출생지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진주
사망
2004년 5월 29일 (향년 83세)
사망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본관
해주(慶州)
정당
경력
서울대 공과대학 교수

한국해사대 교수
과학기술처 장관
포항산업과학연구원 고문

자유민주연합 과학기술행정특임고문
학력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학교 대학원 공학박사
배우자
이순란
종교
서훈
국민훈장 무궁화장(대한민국)

제1회 한국공학기술상 대상(대한민국)
국가공로훈장(프랑스)
닛케이 아시아상 (일본)
2003년 과학의 날 기념 국립서울과학관

2003년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명예 과학 위인
별명
호(號)는 송곡(松谷)
군사 정보
군복무
대한민국 공군
복무기간
계급
공군 소령
지휘
대한민국 공군분부 항공부대 정훈장교
근무
대한민국 공군본부
참전

최형섭(崔亨燮, 1920년 11월 2일 ~ 2004년 5월 29일)은 대한민국의 공학자 겸 과학자, 기업가 , 대학 교수이다.

박정희정부에서 한국과학기술원 초대 원장을 역임했으며 제2대 과학기술처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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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970년 1월 9일, 한국과학기술연구소 멤버 기념사진. 모두 미국 유수 연구소에서 근무하다가 최형섭(앞줄 왼쪽에서 세번째)의 설득으로 한국에 돌아온 박사들.

1966년 박정희 정부에서 최형섭은 한국 최초의 종합 연구기관인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의 초대 소장으로 임명되었다. 후에 제2대 과학기술처 장관으로 임명되다. 최형섭은 박정희대통령의 경제정책에 기여하며 개발도상국의 과학기술개발전략을 제시하고, 경제발전계획을 수립하는 데에도 크게기여 하였다.

최형섭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소장은 대한민국에 석학들을 유치하기위해서 해외에 나가있던 과학자들을 일일이 만나며 설득하였다. 이들을 유치하면서 다음과같은 조건을 제시했다고한다. “노벨상을 희망하는 사람은 응모하지 마라. 논문 쓸 생각도 마라. 연구 외에 돈 벌 생각도 마라. 나라를 먹여 살릴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기초과학 연구는 꿈도 꾸지 말고, 당장 기업에서 써먹을 기술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그 결과 모두 18명이 유치 과학자로 선정됐다. 냥시 월급은 6만~9만원이었다. 미국에서 받던 연봉의 4분의 1 수준이었는데 이는 대한민국 대통령보다는 많은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나보다 봉급이 많은 사람이 수두룩하다”고 농담처럼 말했지만 이들은 미국에서 받던 연봉의 4분의1밖에 안 되는 대우를 받으며 과학을 연구했고 기술을 개발했다. 이들의 유치로 한국의 경제발전의 초석이 되었다.

1967년 9월 KIST를 찾은 미국 부통령 험프리는 “이건 역두뇌유출(counter brain drain)”이라고 규정하며 며칠 붙어 있지 못할 것이라는 사람들 추측과 달리 이들은 국내에서 확고한 기반을 잡았다. 이들의 한국에서의 활약상을 보고 다른 재외 과학자들도 하나둘씩 국내로 들어오기 시작하여 대한민국의 KIST의 두뇌 유치는 성공이었다고 전한다. [1]

박근혜 정부 과학기술비서관이었던 현 한국기술경영교육연구원 원장 김주한은 “조선을 정체시켰던 사농공상 질서를 무너뜨리고 과학자와 기술자를 국가가 육성한 사건"이라고 평가했다.[2]


각주

  1. 조선일보, 최형섭, 최형섭 회고록: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 조선일보사 출판국
  2. 과학기술을 통해 부국강병의 발을 내딛다[박종인의 땅의 歷史] 346. 공화국 대한민국⑤ 한국과학기술연구소와 초대 소장 최형섭,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