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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의 설명

1937.09.18 구망일보 이홍광 열사전. 『구망일보(救亡日報)』는 1937년8월 24일 중국 상해에서 창간된 신문임.

李紅光열사 약전 『구망일보(救亡日報)』 1937-09-18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동북항일연군 제1군 제1사단장 이홍광 열사는 동북 항일전선을 이끈 중요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러나 이 열사는 민국 24년(1935) 3월 奉天 桓仁縣 廟嶺에서 日寇와 전투를 벌이던 중 불행히도 적들의 총탄에 맞아 희생되었다.
이홍광 열사(국내 일부 신문에는 열사를 女傑로 잘못 보도하였으나 열사는 분명한 열혈남아이다)는 조선 출신으로 민국 8년 부모를 따라 吉林省 磐石縣으로 이주하였다. 집안사정이 매우 어려운 데다 두 동생이 아직 어린아이였던 관계로 가계는 열사와 부친이 막노동을 해 유지하였다. 어려운 형편 탓에 열사는 낮에는 노동일을 하고 밤에는 마을 부근에 있는 소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이런 환경 속에서도 워낙 천성이 총명한 열사는 1년만에 글을 읽고 쓸 수 있을 정도로 재능을 보였다.
민국 20년 9·18사변이 발생하자 각지에서 무장대오가 일어나 반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당시 이홍광 열사도 반석 반일의용군의 일원이 되어 반일운동에 적극 참가하였다. 모략에 뛰어난 데다 군사적인 재능을 타고난 열사는 반일의용군에 가담하자마자 동료들의 큰 신임을 얻었다. 그 결과 민국 21년 열사는 주변의 추천에 의해 반일의용군총대부 참모장에 임명되어 본격적으로 반일운동의 중심에 서서 전략을 수립하는 중요한 임무를 담당하게 되고 누차 공을 세우게 되었다.
민국 22년 동북인민혁명군이 성립되자 이홍광 열사는 역시 주변의 추대에 의해 제1독립사단 참모장에 취임하였다. 민국 23년 인민혁명군 제1군이 성립되자 이홍광 열사는 제1군 제1사단장에 임명되었다. 그가 이끄는 제1사단의 대원은 대부분이 청년들로 구성되어 지식수준이 높은 데다 군기가 엄하고 사기가 높은 것으로 유명하였다.
중국의 언어와 문자에 능한 데다 중국인의 풍속 습관과 인정에도 밝은 관계로 이홍광 열사는 각 반일무장대오 및 반일민중단체와의 관계가 매우 원만하였다. 그는 통솔력과 추진력이 강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대할 때도 진심을 다하였다. 이홍광 열사의 이런 장점이 반일민족통일전선공작을 진행하는 데 매우 유리하게 작용하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부분이다.
민국 22년 겨울 日寇는 아군을 섬멸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磐石·伊通 두 현을 포위하였다. 민첩한 행동과 신출귀몰한 전술로 적군의 포위망을 뚫은 이홍광 열사는 송화강을 건너 파죽지세로 柳河로 진격하였다.
민국 23년(1935) 日寇가 동절기 ‘대토벌’을 진행하자 이홍광 열사는 興京·桓仁등지에서 적들과 무수히 많은 격전을 벌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해 말 이홍광 열사는 부대원을 이끌고 야음을 틈타 압록강을 건너 日寇의 경계망을 뚫고 東興을 공격하였다. 일구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토호 12명을 사로잡고 다수의 군용물자를 탈취한 이홍광 열사와 부대원들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고 무사히 근거지로 복귀하였다. 당시 각 신문은 '9·18사변 이래 초유의 쾌거’, ‘한국 망국 후 공전의 대사변’ 이라는 제목으로 다투어 이 사건을 보도하였다. 심지어 日寇의 신문들도 ‘국경경비사상의 중대 사변’ 이라는 제목으로 이 사건을 대서특필하였다. 이는 당시 이홍광 열사가 지휘하던 부대의 위세가 어느 정도였는지, 그의 지휘력과 통솔력이 얼마나 출중하였는지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陳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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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2020년 3월 24일 (화) 04:41710 × 500 (290 KB)JohnDoe (토론 | 기여)1937.09.18 구망일보 이홍광 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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