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신학이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정의롭지 못한 정치, 경제, 사회적 조건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하고 실천을 강조하는 기독교 신학운동이다.

개요

1960년대 라틴 아메리카를 중심으로 시작되어, 가톨릭 신학자들이 주도하고 진보적 개신교 신학자들이 참여함으로써 초교파적인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빈곤한 사람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서 교리를 해석함으로써 교회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불평등과 부조리로부터 이들을 해방시키는 사회참여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특히 빈곤을 신의 뜻에 어긋나는 사회적 죄악으로 규정하고 이를 타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회의 사회참여를 강조한 해방신학적 관점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년)와 콜롬비아 메데인에서 열린 제2차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1968년) 후 라틴 아메리카에서 본격적으로 발전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빈곤한 국가가 부유한 국가에 종속되는 세계적인 문제를 지적하고, 교회가 인류·역사와의 유대에 따라 그런 문제에 공동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천명하였으며, 메데인 주교회의에서는 이에 대한 공식적이고 구체적인 논의가 이루어졌다. 이후 해방신학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걸쳐 지속적으로 발전하였다.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WCC)는 방콕대회(1972)와 나이로비 대회(1975)에서 해방신학을 “WCC의 신학”으로 채택하기도 했다. 그러나 로마 교황청에서 1984년과 1986년 두 차례에 걸쳐 해방신학과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 사이의 연관성을 우려하는 경고 문건을 발표한 이후, 영향력이 줄어들었다.

해방신학이 라틴 아메리카를 중심으로 발달한 데는 지역적인 특수성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라틴 아메리카는 15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 스페인포르투갈 등에 의한 식민통치를 받았고, 독립 후에도 군사독재가 지속되면서 고질적인 빈부격차와 극심한 사회적 불평등에 시달렸고 부패와 부조리가 만연했다. 말하자면 해방신학은 라틴 아메리카 지역의 경제, 사회적 불평등과 부조리에 대한 교회의 도덕적인 반응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라틴 아메리카 인구의 대다수가 가톨릭교도라는 점도 이 지역에서 해방신학이 태동하여 발전하는 데에 밑거름이 되었다.

배경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첫 번째 배경은 교회는 인간의 존엄성을 높이고 사회구조를 인간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회적 가르침이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영향 속에서 1968년 라틴 아메리카의 주교들은 콜롬비아의 메델린(Medellin)에서 열린 제2차 남미 주교 모임에서 교회의 중요한 사명 중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난한 자들의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존중히 여기고 구조화된 사회악을 비판하며 극복하는 데 있다고 선포하였다. 해방 신학은 이 메델린 회의에서 1979년 푸에블라의 제3차 남미 주교단 회의까지의 약 11년 사이에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정치신학

두번째 배경으로는 1960년대 이후 서독에서 일어난 정치 신학(political theology)을 들 수 있다. 위르겐 몰트만(Jurgen Moltmann), 요한 벱티스트 메츠(Johann Baptist Metz), 도로테 죌레(Dorothee Soelle) 등 제2차 세계대전을 몸으로 겪은 젊은 신학자들은 나치 독일의 등장과 유대인 대학살(Holocaust)이 일어난 이유는 독일의 교회와 신학이 복음을 너무 개인주의적으로 이해해서 정치적인 보수 반동주의를 정당화했기 때문이라고 비판하면서 기독교 복음의 정치적 책임성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이 중 몰트만은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정치적 요소를 그 안에 품고 있기 때문에 올바른 정치적 선택과 결단을 하는 것 역시 신앙의 본질이라고 외쳤다. 또한 메츠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로마의 억압구조에 대한 예언자적 항거의 죽음, 곧 정치적 죽음이었고, 이 죽음은 불의한 정치체제를 위협하는 위험한 기억(the dangerous memory of the death of Jesus Christ)이며 교회는 이 위험한 기억에 의해 형성되고 그것에 의해 살아가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교회의 삶은 고난당하는 이들과의 연대 속에서 잘못된 정치구조에 대한 비판과 저항으로 특징지어지는 정치적인 삶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해방 신학은 이런 독일의 정치 신학을 받아들이되 그것을 그들의 상황 안에서 더욱 철저화시켰다.

마르크스 사상

세 번째 주요한 요인으로 칼 마르크스의 사상을 들 수 있다. 마르크스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자본가노동자 사이의 빈부 격차는 더욱 커지고 노동자들은 그들의 노동에서 소외되어 비인간화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그는 자본주의에 의해서는 부의 균등한 분배로 인한 인간적 삶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현실 변혁은 프롤레타리아의 단결된 힘에 의한 혁명 외에는 없다고 가르쳤다. 해방 신학자들은 1950년대와 1960년대의 미국의 후원에 의한 개발 독재의 시기가 더 큰 빈부 격차를 낳은 것을 보면서 마르크스의 이런 사회 비판을 받아들인다.

곧 이들은 남미의 정치적 억압과 사회·경제적인 수탈을 극복하는 길은 미국식 자본주의가 아닌 사회의 총체적 혁명, 곧 해방의 길이라고 본다. 하지만 이들은 마르크스주의를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하고 새로운 사회 질서를 모색하는 수단으로 받아들일 뿐 다른 부분–가령 무신론–을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해방 신학의 주요 신학자들로는 구스타보 구티에레즈, 얀 소브리노(Jon Sobrino), 레오나르도 보프(Leonardo Boff), 이그나시오 엘라꾸리아(Ignacio Ellacuria), 호세 미란다, 호세 꼼블린(Jose Comblin) 등을 들 수 있다.

해방신학의 정체는 ?

해방신학은 기독교의 옷을 입은 공산 마르크스주의다.(Liberation Theology is Marxism in Christian Dress.) 무신론 공산주의 적그리스도의 사상이 기독교의 탈을 쓰고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지역 등 개발도상에 있는 제3세계의 나라들과 서방자유주의 선진 공업국가들에도 깊이 침투 부식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정치적 민주주의, 경제적 자본주의를 지향하여 나아가는, 반공을 국시로 하는 자유 대한민국에도 최근에는 해방신학의 독소가 침투하여 종교단체, 언론기관, 대학생층을 위주로 한 학원가, 공장의 노동자들, 농어촌의 농어민들 등 사회 각계 각층에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듯 깊이 부식하여 조국의 안보와 사회의 안녕 질서에 큰 타격을 주고 있다.

특히 배교와 불신앙으로 타락한 자유주의 교회들의 연합단체인 세계 교회 협의회(WCC)는 해방신학을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그들의 산하 교회들에게 주입시키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WCC 정회원 교단이 셋이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측=장로회신학대학 계통), 대학기독교장로회(기장측=한국신학대학 계통), 대한기독교감리회(기감측=감리교신학대학 계통)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