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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 심판

바울은 인간의 행위가 최후 심판의 기준이 됨을 전하고 있다.(롬 2:6-11,행 24:24~25) 이밖에도 성경에는 행위 심판에 대한 구절들이 가득하다. (겔 18:27-27,30, 겔 33:12, 18-20, 마 5:20, 마7:21-23, 막 9:43-47, 요 5:28-29, 히 10:26-27, 약 1:14-15, 약 2:14, 요일 3:7-10, 계 21:6-8)

'행위 구원'과 '행위 심판'은 엄연히 다른 것인데 '행위 구원'이란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비성경적인 이단 사설이다. 반면에 '행위 심판'은 모든 믿는 자가 아니라 침 믿음을 가진 사람만 구원 받음을 나타낸다.[1]성경하나님이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하신다고 말하고 있다. 한국 교회에 만연해 있는 루터식의 구원론[2]처럼 과연 믿기만 하면 죄를 지어도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일까? ​ 확실한 것은 하나님은 참고 선을 행하는 자에게 영생으로 보응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진리를 따르지 않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보응하신다. 심판은 오직 '진리대로' 공정하게 이루어진다. ​ 그런데 인간의 힘으로는 죄를 결코 이길 수 없다. 복음의 능력만이 죄와 속박의 지배에서 인간을 자유케 할 수 있다. 인간은 단지 죄 사함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인 참 복음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된다.

칭의

칭의는 하나님께서 죄인인 인간을 의롭다 선언하시는 것이다.(롬3:24).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의를 전가하시고 의롭다고 인정하셔서 죄로 말미암아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은총을 말한다. 사람은 누구든지 죄인이므로(욥 9:2; 롬 3:10) 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고 죽음의 형벌을 면할 수 없다(롬 3:10, 23; 6:23).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로 하여금 죄인을 대신하여 죄값을 치르게 하셨고(롬 3:25) 또 그 피 공로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값없이 의롭다고 선언하셨다(롬 3:24-26; 4:3). 이것이 곧 칭의다. 이는, 하나님께서 심판자의 자격으로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의롭다고 선언하시고 심판 날 하나님의 진노에서 건짐을 받게 됨을 말한다.(데살전 1:10)[3]

종교개혁자 루터(Martin Luther, 1484-1546년)는 "칭의란 인간의 선행에 따른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로움이 되셨고(고전1:30), 그것은 신자에게 외부에서 주어지는 '낯선 의'(iustitia aliena)"라고 보았다. 칼빈(JohnCalvin, 1509-1564년) 역시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칭의를 은혜로 간주하여 "칭의란 우리가 마치 의롭기나 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의 은혜 속에 들어오도록 받아주심을 뜻한다"고 했다. 그리고 칭의는 '죄 용서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구성된다고 했다.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년)는 "칭의의 성경적 정의는 죄의 용서이다. 칭의는 하나님 아버지의 역사로서 아들의 피로 인하여 이룩된 화해에 근거하여 전에 지은 우리의 죄를 사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는 일이다"고 하였다.[4]

칭의를 법정적인 의미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 대가를 지불하셔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다고 선언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무죄선언이 영원하다라는 잘못된 신념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칭의를 단순히 단회적인 사건이 아닌 관계적인 의미[5]에서 보면, 관계란 관계를 맺고 있는 양자간에 책임이 존재하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움의 초청에 응해야만 하는 책임이 주어진다. 하나님은 의의 잔치를 여신다. 자녀 된 우리는 회개하여 깨끗해진 세마포 옷을 입고, 주님께 드릴 성령의 열매를 들고 하나님의 의의 잔치에 참여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하나님과의 관계는 흔들리게 되고, 칭의도 위태로워질 수 있다.

아울러 칭의를 이미와 아직의 의미에서 보면 과거에 이미 칭의를 받고, 법정적인 무죄선언을 받았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칭의 속에 계속 머물러야 한다. 즉,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 머물러야 하며 이를 위해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이 칭의의 시제이다. 김세윤 교수는 이에 대해 칭의가 종말론적으로 유보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종말론적 유보란 쉽게 말해 우리가 구원받을 때 우리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회복되었지만, 이러한 구원의 완성은 법정적으로 보장된 것이 아니라 최후의 심판 때까지 보류된 것을 말한다.[6]


바른 구원관

청교도들을 위시해서 19세기 이전의 유명한 신학자와 설교자와 전도자들은 ‘자기 점검’을 중시했다. 그런데 19세기 이후 자기 점검을 강조하는 메시지가 강대상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 ‘구원의 확신’이다. 지금 교회에서 가르치는 구원관은 성경의 논지와 다르게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함을 강조하지 않는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는 동시에 매일 세상과 죄를 이겨야 한다고 전하지 않는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 즉 거듭난 자는 예외 없이 모두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요일 5:4-5)세상을 뜻하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이기는 사람에게 약속이 있으며(계2:7,11)천국은 이기는 자만 들어갈 수 있다.(계21:1-5) 지금은 많은 메시지가 사랑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만을 강조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복음을 그대로 들여다본다면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이자 공의를 나타내는 십자가 앞에 사랑의 감격뿐만 아니라 경외함도 갖게 될 것이다. 균형 잡힌 구원관을 가질 때 바르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으며 비로소 올바른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각주

  1. 존 스토트는 '진정한 기독교'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행위에 의해 심판받음 신약성경 전체는 이것을 가르친다. 곧 죄인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서만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지만' 행위에 의해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모순된 말이 아니다. 사라으이 선한 행위만이 우리의 믿음을 보여주는 유일한 공개적 증거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마음속에 은밀히 감추어진 것이다. 그 믿음이 진정한 것이라면 선행으로 눈에 보이게 나타날 것이다. 야고보가 말했듯이.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약 2:18, 20)이다. 심판 날은 공개적인 날이 될 것이므로 공개적인 증거, 즉 동정심을 보이는 행동으로 우리의 믿음의 결과를 제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예수님도 여러 번에 걸쳐 이것을 가르치셨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꼐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 16:27) 우리의 행위대로 되는 것은 우리의 구원이 아니라 우리의 심판이다.
  2. 루터의 오직 믿음은 잘못된 것이다. 성경은 율법에 대해 오직 믿음을 얘기하고 있으며 회개나 믿음에 따르는 순종에 대해 오직믿음을 말씀하지 않는다. 그러나 루터는 오직 믿음을 지나치게 확장하여 율법뿐만 아니라 회개나 행함이 있는 산 믿음에 대해서도 오직 믿음을 외쳐 신자들 안에 도덕적 방종을 불러왔으며 진리를 심각하게 왜곡시켰다. 또한 현대 교회가 무율법주의로 가는데 크게 일조했다.
  3. 칭의는 단순히 의롭다는 것뿐만 아니라 장래의 노하심에서 건져지는 것을 말한다. 심판 날 하나님의 진노에서 건져지는 것을 말하는데 행위 심판 없이 칭의를 논할 수 없다. 한국 교회는 복음을 전할 때 바울처럼 행위심판에 대해서 전하고 죄를 깨닫고 회개로 인도해야 한다. 그래야 신자들을 참된 믿음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이다.
  4. 라이프성경사전, 2006. 8. 15., 생명의말씀사
  5. [참조] 칭의가 관계적이라는 점에 대해서 이한수 교수는 “히브리인들이 의란 말을 사용할 때 그것은 본질적으로 관계적 개념이다. 의는 다른 사람과 관계없이 자기 것으로 소유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과 바른 관계에 놓여 있을 때 의로운 사람이라 칭하여진다.” 라고 말했다. 홍인규 교수는 칭의의 관계적 의미에 대해 “의롭다하다라는 말은 일차적으로 법정적 용어라고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법정적 칭의론은 언약의 문맥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심판자 하나님은 이 세상 재판관처럼 사건에 개입되지 않은 제 삼자가 아니라 인간과의 언약관계 속에서 배신을 당한 피해자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의 칭의는 인간으로부터 배신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과의 언약을 유지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언약적인 신실하심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칭의 행위는 죄로 말미암아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언약 회복)으로 연결된다.“ 라고 말했다.
  6. 칭의에 대한 이해는 결국 구원론에 대한 이해이며, 기독론 전반에 대한 이해이다. 일각에서는 한국 교회가 칭의에 대해 부분에 불과한 법정적인 의미를 전체로 받아들이는 우를 범함으로 많은 영혼들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는 의견을 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