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어: Martin Luther
(1483년 11월 10일~1546년 2월 18일)
1. 개요
마르틴 루터는 독일의 종교개혁가이다. 훗날 종교개혁을 일으킨 역사적인 인물이다. 그가 라틴어 성경에서 번역한 독일어 성경은 독일어의 성립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복합어를 이용하여 독일어 단어를 조합하는 시스템도 그가 구축한 것이다.
2. 츠빙글리와 루터의 비교
2.1. 공통점
울리히 츠빙글리와 마르틴 루터는 같은 시기인 16세기 유럽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의 부패를 비판하고 종교개혁을 이끈 인물들이다.
두 사람 모두 성경을 신앙의 최종 권위로 보았으며, 로마가톨릭의 면죄부 판매와 교황권 남용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성직자의 결혼 허용, 라틴어 대신 자국어 예배, 성경 번역 등의 활동을 하였다.
인간의 구원은 오직 믿음에 의해 은헤로 구원받는다는 이신칭의 교리를 따랐다. 가톨릭의 일곱 성례 중에서 세례와 성찬만을 유효한 성례로 인정하였다. 성상 숭배와 미사 제사 개념을 비판하고 폐지하였다. 모든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만인제사장설을 수용하여 평신도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 마르틴 루터 | 울리히 츠빙글리 | |
| 성경의 권위 | 성경을 신앙과 삶의 최고 권위로 인정 | 성경만이 유일한 권위로 인정 |
| 구원관 |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됨 |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음 |
| 은혜 중심 | 인간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함 |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함 |
| 교황권 반대 | 교황의 절대 권위를 부정함 |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음 |
| 면죄부 반대 | 면죄부 판매를 정면으로 비판 | 면죄부는 성경에 근거 없는 것이라 봄 |
| 성직자 결혼 허용 | 사제의 결혼 허용 | 사제의 결혼을 지지 |
| 성례전 축소 | 2가지 성례(세례, 성찬)만 인정 | 2가지 성례(세례, 성찬)만 인정 |
| 전통 예배 개혁 | 라틴어 대신 독일어, 설교 중심 예배 도입 | 라틴어 철폐, 말씀 중심 단순 예배 시행 |
| 성직자와 평신도 구분 폐지 | 만인제사장설 주장 | 만인제사장설에 동의 |
| 종교개혁 필요성 | 교회는 부패했으며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 | 교회의 구조와 신학 모두 개혁이 필요함 |
2.2. 차이점
루터는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실제로 존재한다 고 믿는 공재설을 주장하였다. 반면, 츠빙글리는 성찬을 단지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는 상징적 행위로 보았으며, 이는 내 몸이니 라는 말씀을 상징으로 해석하였다. 이 차이로 인해 루터와 츠빙글리는 1529년 마르부르크 회담에서 만났지만 신학적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결별하였다.#
| 마르틴 루터 | 울리히 츠빙글리 | |
|---|---|---|
| 출신 지역 | ||
| 개혁 시작 배경 | 1517년 면죄부 반박(95개조 반박문) | 1519년 성경 강해와 군목 경험을 통한 개혁 시작 |
| 성찬 이해 | 공재설: 빵과 포도주 안에 예수의 실제 임재 | 상징설: 성찬은 예수의 희생을 기념하는 상징 |
| 성례전 수 | 세례, 성찬(두 가지만 인정하나 실제로 은혜의 수단으로 봄) | 세례, 성찬(의미 있는 외적 표지로 보되 은혜 수단은 아님) |
| 교회와 국가 관계 | 양왕국론: 교회와 국가의 분리 | 신정정치: 교회와 국가의 협력 강조 |
| 개혁 방식 | 신학 중심, 점진적 개혁 | 시의회와 협력하여 제도적이고 급진적 개혁 추진 |
| 성직자 결혼 | 허용 | 허용 |
| 예배 형식 | 전통 예식 일부 유지, 독일어 사용 | 간결한 말씀 중심 예배, 라틴어 사용 철폐 |
| 성상 사용 | 제한적으로 허용 | 철저히 금지하고 파괴 |
| 음악에 대한 태도 | 찬송가 작곡, 예배 음악 적극 활용 | 예배 음악에 소극적, 제한 또는 배제 |
| 재세례파에 대한 태도 | 비판하지만 일정한 거리 유지 | 강경 탄압 |
| 신학 전승 | 루터교로 계승 | 불링거, 칼뱅 등 통해 개혁주의(장로교)로 계승 |
3. 같이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