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황제는 누가 임명하는가, 시진핑은 누가 임명하였는가

《황제뽑기》를 소개하는 이유는 현재 중국이 중화민국이후 중국 공산당에 의한 현대 문명속의 국가라고 착각들을 하고 있지만, 현 중국은 진나라의 중국 통일 이후 지속되어온 중국 정치체제의 근본을 유지한체 공산주의로 포장된 국가라는 점을 인식하기를 바라는 점이다.

《황제뽑기 : 자치통감 행간읽기 2》
권중달 지음, 도서출판 삼화, 2012-07-02

저자소개

권중달(權重達, 1941년 02월 28일~ )[1]
중앙대학교 사학과, 중국 근세사상사를 전공,
대만 국립정치대학에서‘자치통감이 한국과 중국의 학술에 끼친 영향’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6년부터 중앙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중국사강의,
2006년에 정년퇴임,명예교수.
2015년 6월에 대만의 중화문화총회는 ‘자치통감을 번역하고, 중국역사학 연구에 기여한 공로’를 기려서 문화공로상을 수여하였다.
자치통감을 14년간에 완역, 2010년 《권중달 역주 자치통감》 총 32권과 그 해설서 《자치통감전》을 완간하였다.[2] 대학 정년퇴임후 퇴직금 털어서 출판사 설립후 출판까지 마무리를 지었다고 한다.
대중들의 역사적 시각을 제고하기 위해 자치통감 관련 서적을 꾸준히 집필·출간하여 "자치통감 행간읽기" 씨리즈등을 내놓았다. 현재는 《속자치통감》을 번역·출간하는데 힘쓰고 있다.[3]
자치통감 한글 완역은 한 개인이 집녑으로 완성한 결과물로서, 일반인들로서는 32권 모두를 몇몇이나 읽었을까만이 궁금할 정도이겠지만 그 노고에는 고개를 숙인다.

책소개

중국에서 황제 뽑기는 고관(高官)들에게서 황태후와 외척으로, 다시 무장 세력으로 옮겨졌고 맨 마지막에는 환관에게로 넘어 갔다. 즉, 중국은 고관, 외척, 무장세력, 환관들이 황제를 뽑아간 역사를 가지고 있다. 현대 중국 또한 다르지 않다. 중국공산주의청년단, 태자당, 상하이방 그리고 중국 인민해방군으로 자리 바꿈해 있을 뿐이다.

알라딘에서 일부 발췌

책소개

〔자치통감행간읽기〕그 두 번째 이야기!

시대의 권력자, 꼭두각시 황제를 뽑다!

황제제도의 허점을 간파하여 황제를 조종한 사람들의 이야기 그럴듯한 명분 속에 자신의 이익을 위해 황제를 뽑는 사람들의 이야기


2. ‘황제 만들기’가 아닌 ‘황제 뽑기’ ‘황제 만들기’란 황제의 자격에 모자랄지라도 옆에서 잘 보필하여 성인군자로 만든다는 말인 반면, ‘황제 뽑기’란 내 마음에 들거나 혹은 이 사람이 황제가 되었을 때 자기의 실리(實利)를 계산하여 되도록 내게 많은 이익이 될 사람을 뽑는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물론 그 결정권자가 오늘날과 같이 국민이라면 국민들이 각자의 입장에서 자기에게 유리한 사람을 뽑으려고 하겠지만, 전통시대에는 힘 있는 소수의 권력자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할 사람을 뽑게 되어 있다. 그러한 점에서 본다면 권력의 이동은 눈에 보이는 황제에게서 황제에게로 이동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황제를 뽑는 누군가들 사이에서 이동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예컨대 동진(東晉, 317년 ~ 420년)의 강제(康帝)[4]의 황후인 저(褚)씨[5][6]는 강제가 죽은 뒤에 목제, 애제, 폐제 등 세 황제가 재위하는 동안 수렴청정의 방법으로 황제권을 사용하였다. 황제는 세 사람이 바뀌었지만 권력은 한 번도 저태후의 손을 떠난 일이 없는 경우이다. 따라서 전통시대의 정치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표면상 드러난 사람들 보다는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손으로 황제를 조종하거나 대신하는 세력을 찾아내는 것이 가장 핵심일 것이다. 그러나 제아무리 황제를 조종하는 숨은 권력자라도 공식적으로 절대권은 황제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권력자는 만에 하나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황제를 선택하게 될까봐 심사숙고를 하게 된다. 즉 황제 선택의 전례에 비추어 원천적으로 자신의 뜻에 거역하지 않을 인물을 고르는데 고심한다. 그래서 자신의 실리를 위해 가차 없이 관례를 무시하고 무리하게 황제를 뽑기도 한다. 그리하여 점점 더 황제를 뽑는 일은 상상을 초월하여 벌어지는 것이다.

3. 황제를 뽑는 방법에는 왕도가 없다. 이《황제뽑기》에서는 전한시대부터 당나라 시대까지 숨은 권력자들의 황제 뽑기를 모아 두었다. 황제를 뽑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내세우는 명분은 종묘와 사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대외용 수사에 그칠 뿐 실제로는 자기의 권력을 영속적으로 유지하려는데 목표가 있었다. 맨 처음 전임 황제가 태자를 정하지 않았거나 혹은 정하지 못하고 죽었을 때 후임 황제를 뽑는 일은 중신(重臣)들의 몫이었다. 이들은 외척과 같은 정치적 배경이 없는 인물을 뽑으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여태후의 전력에 비추어 그것이 자기들의 권력을 최대한 보장 받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힘없는 사람일지라도 일단 황제가 된 다음에는 황제권을 적당히 발동하여 그 중신들을 몰아냈다. 그래서 중신들은 자기가 뽑은 황제에게 쫓겨났다. 그런 점에서 중신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들의 황제 뽑기는 실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다음으로 후임 황제를 뽑은 세력은 황태후와 그 외척들이었다. 그들은 되도록 직접 정치를 할 수 없는 어린 황제를 뽑아 황태후가 황제의 모후로써 임정칭제하려고 했다. 황제가 아니면서 실제로 조정에 나아가서 정치를 주관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군사력이 없는 태후들의 이러한 행태는 궁궐 내의 정치행각이었다. 궁중 안에서 황제가 결정되는 상황이 계속되자 결국 궁궐의 사정을 제일 잘 아는 환관들이 황제를 뽑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면서 왕조는 그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그리고 전·후한,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전·후한을 지배해 온 유교적 논리가 쇠퇴하고 사회를 통제하는 규범이 미약해지자 극도의 자유주의가 팽배해졌다. 바로 대분열의 시기로 일컬어지는 위진남북조시대의 도래였다. 이 시기에도 태자를 임명하는 제도는 있었다. 그러나 오로지 형식으로만 존재할 뿐, 그 속을 들여다보면 군사력을 가진 사람이 권력을 오로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군사력을 배경으로 한 권력자는 어떤 명분으로 자기 말을 듣는 황제로 바꿀 수 있을지, 그리고 바꾼 다음에 바꾼 명분을 그럴 듯하게 만들려고 하는데 관심을 기울이기 급급했다. 그것은 군사력을 가지고 현임 황제의 내쫓는 것이며 그들의 쿠데타를 일으키는 명분이다. 하지만 이때 자신이 직접 황제 자리에 나가지는 않는다. 자기에게 황제 자리를 합법적으로 물려주거나 혹은 선양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왕조를 건국할 수 있게 할 사람을 뽑는다. 황제가 되는 길에 징검다리를 먼저 만들어 스스로 황제가 되는 것의 정당성을 극대화시키는 것이다. 이 방법은 후한시대에 궁정 안에서의 음모만으로 황제 자리에 간다는 것이 한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타난 방법이었다. 그러나 무력 역시 한계가 드러났다. 자신의 후계자가 자신과 똑같은 군사력을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후계자들은 군사력을 가진, 경우에 따라서는 삼촌이나 형제에 의해 무참히 죽는 비극이 끊임없이 발생했다. 즉 군사력으로 황제가 됨으로써 누구든지 힘이 있으면 황제 자리를 차지하라고 가르쳐 준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후대에 군사력을 가지고 제왕이 된 사람들은 앞 다투어 무치(武治) 대신 문치(文治)를 채택했다. 오랜 무장 세력으로 송 왕조를 세운 조광윤, 명 태조 주원장도 역시 문치주의를 택했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 태조 왕건과 조선 태조 이성계 역시 무장에서 출발했지만 왕조를 일으킨 후에는 하나 같이 문치를 택했다. 이는 “비록 나는 무력으로 나라를 빼앗았지만, 너희들은 무력을 쓰지 말라.”라는 다른 표현일 뿐이었다. 즉 ‘나를 닮지는 말라’는 말이었다. 그 다음으로 당 왕조 시대에 오면서 중신도, 황태후도 황제 뽑기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군사력을 가진 사람도 불가능했다. 앞의 역사에서 이미 경험한 바에 의해, 비록 그들 모두 결과적으로 보면 황제 뽑기에 실패했고, 그러한 방법으로 황제 뽑기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권력을 잡는 새로운 세력과 길이 나타났다. 이제 황제는 중신이나, 외척 혹은 무장 세력으로부터 자기의 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자기의 하수인인 될 세력을 찾았다. 그것은 자신의 절대권에 도전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판단되는 바로 환관이었다. 환관은 궁중에서 한낱 심부름을 하는 사람이어서 심부름만 할 뿐 절대로 정치적인 힘을 가지리라고 상상하지도 못하였다. 그래서 황제는 그들을 믿고, 그들은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환관은 항상 황제 곁에서 심부름을 하며 황제의 눈과 혀가 되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일을 맡기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해서 조금씩 권력을 맛보기 시작한 환관들은 점점 더 큰 힘을 요구하게 되었고, 결국 군사를 감독하는 직책까지 부여해주고 말았다. 권력에 눈을 뜬 환관들은 다시 황제의 절대권을 조정할 수 있을 만큼의 권력을 키웠고, 이제 그들의 입맛대로 천하를 움직이고자 했다. 그리하여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는 황제는 죽였고, 후임 황제를 세우는데도 황제의 유서를 환관이 마음대로 고쳐 썼으며,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조정에 있을 수가 없게 조치했다. 환관의 발호는 명대(明代)까지 내려와 영락제가 남경을 공격하면서 환관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로 인해 환관이 크게 득세하였다. 그리하여 환관의 손에서 동창(東廠, 황제의 정보기관)까지 움직였으니, 역시 환관 정치라고 해도 무방하다 할 것이다. 환관은 겉으로는 심부름꾼으로 위장한 황제였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권력의 중심은 고관(高官)에서 황태후와 외척으로, 다시 무장 세력으로 옮겨졌고 맨 마지막에는 환관에게로 넘어 갔다. 그동안 황제가 없었던 시대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또 공식적으로 황제의 막강한 권한이 축소된 일도 없었다. 그러나 실제로 정치를 움직인 세력은 이처럼 끊임없이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4. 역사의 진실을 보기 위하여 역사는 승리자의 전리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물론 그러한 면이 당연히 있는 점을 감안하여 역사를 보지 않으면 역사를 쓴 사람에게 우롱 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 쓴 사람이 자기를 미화하려고 쓴 그 글의 행간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 행간을 들여다보면 역사를 기록한 사람에게 속지 않는다. 역사 가운데는 칼로 사람을 죽였을 때에 그 죄를 칼에 있는가 칼을 쥐고 있는 사람에게 있는가? 라는 초보적인 질문을 던지면 사람을 죽인 죄는 칼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역사에는 칼에다 죄를 주면서 쓰여 있는 경우가 너무 많다.

황제의 권위는 칼보다 더 무섭다. 그 근처만 가도 다치기 쉽다. 그런데 황제를 뽑은 사람은 마치 황제라는 칼을 쥐고 있는 사람처럼 겉으로 나타나지 않은 채 하고 싶은 짓을 다 한다. 그렇게 본다면 황제를 뽑았던 환관들은 한갓 심부름꾼으로만 볼 수 없다. 황제권을 사용하는 환관이 실제의 황제이다. 이것이 진실이다.

동아시아사 중심이 한족이라는 발상은 허상

권중달은 조선조 사대부나 선비들이 성리학(주자학)과 명나라를 숭상하며 소중화(小中華)라 자부한 것은 중국에 대한 허상 때문이라 말한다.

참고 : 대명천지 숭정일월 ; 만절필동 ; 대보단 ; 만동묘

권 교수는 "우리나라에 큰 영향을 미친 학자 주희(朱熹·1130∼1200)가 살던 때 남송은 중원을 금에 빼앗겼고 영토도 작았다"며 "이러한 상황에서 주희는 혈통주의를 내세워 남송을 세운 한족은 오랑캐보다 힘은 약하지만 문화적 수준은 높다고 역설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주자학의 병폐가 한반도에 이식돼 지금도 우리는 아시아를 너무 좁게 보고 있다"며 "한족이 중심이고 주변에 있는 민족은 오랑캐라는 인식에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속자치통감이 완성된 시기에 중국 땅의 주인은 만주족이었다. 당시에는 사실을 과장하거나 축소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고증학(考證學)이 유행했다.

권 교수는 "청대에는 역사가가 자신의 견해를 집어넣지 않았고, 사실만 이야기하면 독자가 알아서 판단할 수 있다고 믿었다"며 "속자치통감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중국 역사에서 다양한 민족이 공존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연관도서

권중달의 "자치통감 행간읽기" 시리즈에는 아래와 같은 책들이 있다.


권중달 교수님의 강의 영상들

권중달 교수님의 강의영상들이 모여 있는 유튜브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