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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미군의) 위안부
최근 수정 : 2019년 8월 19일 (월) 10:35

일러두기

작성 기초 자료들

함께 보기 1: 이승만 TV, “6ㆍ25전쟁과 한국군 위안부” 강연.

함께 보기 2: 이승만 TV, “1950~60년대 민간 위안부” 강연.


함께 보기 3: 이승만 TV, “1950~60년대 미국군 위안부” 강연.


(1) 이 문서는 이영훈, “우리 안의 위안부”, 이영훈 외 공저, 《반일 종족주의》, 미래앤, 2019, 254~271쪽을 기반으로 작성하되, 상세한 설명을 덧붙여 전체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2) 또한 이 글에서 언급한 각종 자료를 수집하여, 위의 기본 자료를 보완하고자 하였다.


연관 검색어

  • 다음의 표제어들과 내용상 일관성을 유지해야 하며, 상호 참조할 필요가 있다.

위안부, 공창제 (일본군 위안부 이전까지), 한일 청구권 협정, 대일 민간 청구권, 역사왜곡, 노무동원, 한일 회담 반대 운동, 민족문제연구소, 일제 징용사 왜곡, 대일 8개항 요구, 친일파 청산론,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 관계에 관한 조약, 김태규 판사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 관련 소신 발언

조선시대부터 시작된, 길고 긴 군 위안부의 역사

군인이나 장교가 주둔하거나 부임하는 곳에 배치되어, 그들에게 성적인 위안을 제공하는 역(役)을 지는 신분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다. 함경북도의 군사 요충지 등에 기생을 두라는 명령이 내려진 세종 대부터, 신분제와 기생제는 더욱 공고해지는 동시에 군인을 위안하는 그들의 본질이 이어져 왔다.

이에 대해서는 ‘공창제 (일본군 위안부 이전까지)’를 반드시 참고하도록 한다.

해방 후 위안부의 역사

1960년대까지 행정상 인정된 부류인 ‘위안부’

위안부는 1960년대까지도 번창

1945년 해방 후에도 위안부라는 용어는 그대로 남았고, 1960년대까지 공적 · 사적으로 활용되었다. 1960년대까지 민간에서도 성매매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을 위안부라고 불렀다.

보건복지부 홈페이지에서는 <보건사회통계연보>를 공개하고 있다. 1949년부터 시작된 이 통계연보에서, 1955년에는 성매매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을 땐사와 위안부, 접대부, 밀창이라는 네 부류로 구분한다.

1956년 한국 정부는 성매매에 종사하는 여성을 네 부류로 나누었다. 영어로는 dancer를 가리키는‘땐사’(일제 강점기는 ‘예기(藝妓)’)는 요리점에서 춤과 노래를 제공하는 여성이다. 영어로 prostitute인 ‘위안부’(일제 강점기에는 ‘~삐’라고 불렀다. 즉 ‘조센삐’는 조선인 창녀라는 뜻이다.)는 유곽이나 사창가에서 전업으로 성매매를 하는 여성을 가리킨다. 영어의 entertainer에 해당하는 ‘접대부’는 음식점 객석에 앉아 손님의 술시중을 드는 여성이다. 일제 시대부터 흔히 쓰이는 말로 ‘작부(酌婦)’가 같은 말이다. 마지막으로 영어의 harlot에 해당하는 ‘밀창’이 있는데, 이는 카페나 바(bar), 다방, 여관 등에서 성매매를 하는 여성이다. 일제 시대에는 ‘여급(女給)’이라고 하였다. 당시 소설 등에서 자주 등장하는 말이다.

이런 분류는 정부가 매년 발표하는 《보건사회통계연보》에서 1966년까지 이어졌다.

이영훈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 통계 연보에는 성병 검진을 받은 여성들의 연령분포에 대한 정보가 있다. 이 정보를 보면 이 여성들의 3/4가 20대였다. 이를 다시 정부의 국세(國勢, 나라의 형편과 상황) 조사와 비교하여 파악해 보면, 20대 여성의 총수 대비 위안부 비중을 구할 수 있다.

그 결과 1955년에는 3.2%, 1959년에는 3.2%, 1966년에 8.1%로 상당히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1950년대는 20대 여성 33명 중 1명이 사창가의 위안부였다면 1960년대에 이르러 12명 중의 1명이 그러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들의 실상을 통계로 미루어 보면, 1955년는 11만 642명이 성병 검진을 받았고, 이 가운데 6만 1,833명이 전업으로 성매매를 하는 위안부였다. 하지만 이 수치가 월말 또는 연말과 같이 특정 시점에 활동한 위안부 수는 아니라고 한다. 사창가에 들었다가도 1년 이내에 퇴출한 여성이 많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보면, 성병 검진과 같은 보건 행정이 강화된 탓도 있겠으나 사창가의 성매매 여성이 급속히 불어났다는 추세만큼은 부인하기가 어렵다. 결국 위안부는 일본의 패망과 한국의 해방과 더불어 사라진 것이 아니라 1960년대까지는 오히려 번성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해방 후 민간 위안부들의 고단한 삶

그런데 1957년 당시 <전염병예방법시행령>을 확인해보면, 위안부는 주 2회 성병 검진 대상으로 한다는 문구가 나온다.

<전염병예방법시행령(대통령령 제1257호, 약칭: 감염병예방법 시행령, 1957. 2. 28)>


제4조 법 제8조제2항의 규정에 의하여 성병에 관한 건강진단을 받어야 할 자의 범위는 다음과 같다.

1. 접객업에 종사하는 자

2. 매음행위를 하는 자

3. 기타 성병에 감염되어 매개전파할 우려가 있다고 의사가 진단한 자

전항에 규정된 자는 다음에 의하여 특별시장 또는 도지사가 지정하는 성병진료기관에서 건강진단을 받어야 한다.

1. 접객부, 기타접객을 업으로 하는 부녀(接待婦, 酌婦等) 2주1회

2. 땐사, 유흥업체의 녀급 또는 이와 유사한 업에 종사하는 자 1주1회

3. 위안부 또는 매음행위를 하는 자 일주이회

4. 성병을 전염시키거나 또는 전염할 우려가 있는 자 수시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렇게 하여 시행된 성병 검진 결과 이들 여성의 성병 감염률이 평균 22~24%나 됐다는 사실이다.

참고로 일제시대인 1937년 기준 조선인 창기(娼妓)와 작부(酌婦)의 성병 감염률은 5%대에 불과했다. 이에 대하여 이영훈은, “해방과 전쟁의 혼란기에 성매매 산업이 얼마나 무분별하게 팽창했는지 보여주는 것으로 당시 한국 정부의 보건 행정이 매우 초라한 실정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고 설명한다.

해방과 전쟁 후 성매매 여성이 급증하는 이유

로렌스 서머스(래리 서머스, Lawrence Summers, 1954~)는 하버드대 27대 총장으로 재임하던 지난 2004년 여름학기 개강 환영식에서 "1970년대 서울에는 미성년 매춘부가 100만 명이 있었는데 경제발전으로 지금은 자취를 감췄다"고 발언했다가 한국인들의 거센 항의를 받고 사과한 적이 있었다. 이 발언의 수치가 다소 과장일 수는 있지만,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라든가 한국의 경제 사정 등을 고려한 여성의 현실 등을 고려하면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발언이었다.

1950년대 당시 성매매 또는 성매매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은 관련 업종에 종사하는 여성의 연령대는 대체로 20세~24세였다. 그들의 57%가 무학이었으며, 초등학교 졸업은 36%였다. 중학교 및 전문고 졸업은 6.8%었다. 이영훈은, 중학교나 전문고 졸업 등 고학력자들은 주로 미군을 접대하는 위안부였음을 밝힌다.

따라서 그는 “민간 위안부의 일부는 군 위안부의 전통을 잇는 ‘미국군 위안부’를 포함하고 있”으며, “민간 위안부와 군 위안부가 실질적으로 구분되지 않았다는 의미”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영훈은 1960년대 민간 위안부의 이력, 근속기간, 노동실태, 소득수준도 분석했다. 여기서 그는 1961년 서울시 부녀보건소에 수용된 위안부 600명, 1963년 서울 성동구 보건소에 등록된 위안부 144명, 1964년 군산시 보건소에 등록된 위안부 188명을 조사한 당시의 석사학위 논문들을 참고한 것이다.

이런 논문들에 따르면 당시 위안부들 중에서 가장 큰 비율의 수가 식모 또는 고아 출신이었다. 고아원을 전전하면서, 극빈 계층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적절한 부모의 보호를 받지 못하면서, 이런 저런 이유로 가출하거나 버려진 여성들이 식모로 들어가거나 성매매로 빠지기 쉬운 접객업에 종사하다가 위안부가 되었다. 이 여성들은 ‘친구 꼬임’으로 사창가에 흘러온 이유로 밝히는데, 이 중에는 ‘남자 유혹’이나 ‘팔렸다’라는 이유도 있었다. 사실 이런 이유가 따지고 보면 사실상의 인신매매인 경우가 많았다.

성매매업에 종사하는 이들의 근속기간은, 서울의 경우 평균(가중평균) 1.1년, 서울 성동구 6개월, 군산 2.5년이었다. 이를 평균으로 계산하면 1년 4개월이다. 위안부의 근속년수는 개인차도 심하고 지역 편차도 심해서, 짧게는 6개월에서 5년 이상까지 차이가 난다. 여기서 한 가지 특징은 성매매 업소가 한데 몰려있는 집창(集娼)의 형태보다는, 업소가 몰려있지 않은 산창(散娼)의 형태일수록 근속기간이 짧다는 것이다.

이는 이렇게 설명될 수 있다.

성동구와 같이 포주에 얽매이지 않고 몇 사람이 동업 형태로 종사하면 근속 기간이 길지 않다. 그렇지만 전북 군산의 경우는 매우 유명한 집창촌으로 절반 이상이 2년이 넘게 체류했다. 특히 군산에서는 상당수의 위안부가 포주에게 진 빚 때문에 탈출하지 못하고, 거의 예속 상태로서 채무 노예의 상태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인다.

실제로 군산에서는 2002년에 대형 화재가 발생하여, 위안부 12명이 불에 타 죽은 참사가 발생하였다. 이들은 당시 불이 났어도 탈출할 수가 없었는데, 포주에 의해서 방에 갇혀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2002년에도 이 지경이었으니 1950~60년대는 말할 것도 없었다. 통계 자체가 이미 서울 성동구와 큰 차이가 나는 것을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민간 위안부의 월 소득은 당시 여성 제조업 종사자의 두 배 수준

각종 통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당시 민간 위안부의 월 소득은 서울 성동구의 경우 평균 5556원, 군산의 경우 3455원이었다.

이영훈 교수가 이를 제조업 종사자의 월 소득과 비교해 보았다.

1963년 기준 제조업 종사자의 평균 임금은 남녀 통틀어 3180원, 1964년에는 3880원이었다. 이 중 여성 종사자는 평균에 못 미치는 2000~2500원 수준이었다. 여기에 국졸 이하 여성은 제조업에 취직할 기회가 없었던 점까지 고려하면, 민간 위안부들의 월 평균 소득 3400~5500원은 당시로선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1950-60년대, 보건통계연보에 나타난 성병 검진 결과를 20대 여성의 총수와 대비하여, 성매매 여성들의 수와 관련 통계들을 추론하는 장면. 이승만 TV 캡처.

노동강도의 측면에서, 서울 성동구의 경우 성매매 여성들은 하루 평균 3.7명에서 많게는 10명까지 손님을 받았다. 이에 비해 군산시의 경우에는 하루 4.43명(성교는 5.51회)을 맞았다.

이를 한국군 위안부와 비교해 보면, 당시 한국군 위안부는 하루 6명의 장병을 받았다. 군 위안부가 약간 많기는 하지만 별로 큰 차이는 아니다. 즉 한국군 위안부의 공급원은 바로 민간 위안부였고 노동 강도도 비슷했던 것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런 점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보면, 한국군 위안부와 민간 위안부는 결국 동질(同質)의 존재라고 할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군이든 민간이든 이 산업에 종사한 여성들 모두 ‘위안부’로 불렸던 것이다.

한국군 위안부

이 내용에 대해서는 한성대 김귀옥 교수의 논문, 《일본식민주의가 한국전쟁기 한국군위안부제도에 미친 영향과 과제》(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03권, 2004를 참고할 만하다.

김귀옥 등의 관련 논문을 검토하여, 1952년 한국군 특수위안대의 실적을 설명하는 이영훈 교수. 이승만 TV 캡처.

6.25 전쟁의 한복판이었던 1951년경 국군은 장병들에게 성적 위안을 제공하는 ‘특수위안대’를 설립했다. 1956년에 육군본부가 편찬한 《6.25사변후방전사》에 따르면 특수위안대는 장병들의 사기를 양양하고 성적 욕구를 장기간 해소하지 못하는 데 따르는 부작용을 예방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설립된 특수위안대는 강릉, 춘천, 원주, 속초에 각각 1개 중대, 그리고 서울에 3개 소대가 있었다. 각 소대에 소속된 위안부는 평균 20여 명이었으며, 1개 중대는 8개 소대로 구성됐다. 종합해 보면 특수위안대에 속했던 위안부의 총 수는 약 700명 정도로 추정된다.

(이영훈 교수는 이 ‘700명’이라는 숫자에 대해서, 특정한 시점에 파악된 절대수이고, 이곳을 길거나 짧게 거쳐간 여성의 수는 그것보다 몇 배, 몇 십 배일 수 있다고 부연한다.)

이들 특수위안대는 한곳에 정착하여 오가는 장병을 맞이하기도 했고, 지시나 요청에 따라서 각 부대로 출동해 위안을 하기도 했다.

1952년 당시 한국군 특수위안대 서울 제 1, 2, 3소대와 강릉 제 1소대의 위안 실적을 나타내는 표를 분석해 보면, 이 4개 소대에 속한 98명의 위안부는 1952년 한 해에 20만 4560명의 장병을 위안했다. 계산 결과 위안부 한 명이 하루 평균 6.3명의 장병을 맞았다는 결론에 이른다.

1954년 3월 특수위안대는 일제히 폐쇄되었다. 그렇지만 군부대 주변의 성매매가 소멸한 것은 아니다. 군부대를 둘러싼 민간의 성매매는 여전히 존속하고 번성했으며, 그에 종사한 여인들 역시 위안부이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1960년대까지도 정부가 이들 여성을 ‘위안부’로 분류하여 성병 검진 등을 시행하며 관리하고 있다는 것은 위에서 살펴본 바대로다.

1955년 정부는 보건사회통계를 작성하면서 민간 성매매 여성을 위안부라고 규정하고 호칭했다. 그런 점에서 6.25 당시의 특수위안대는 민간의 위안부가 잠시 영업장소를 부대 내로 옮긴 것에 다름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시 국군은 특수위안대 편성에 하등의 애로를 느끼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여러 측면에서 군 위안부와 동일한 약 6만 명의 민간 위안부가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군 위안부

속칭 ‘양색시’, ‘양갈보’, ‘양공주’ 등으로 불리는 미군을 상대로 한 성매매 여성들의 공식 호칭은 ‘미군 위안부’였다. 1970년대가 되면 민간의 성매매 여성에 대해서는 위안부라고 부르지 않게 되지만, 미군 위안부에 대해서는 1990년대까지 ‘위안부’라는 말을 공식적인 행정 용어로 사용하였다.

앞서 살펴본 대로, 1966년 기준으로 20대 여성 열 명 중 한 명(11.1%)이 성매매 산업에 종사했고, 열두 명 중 한 명(8.1%)은 성매매를 전업으로 했다고 볼 수 있다.

미군 위안부의 처지는 민간 위안부나 한국군 위안부보다 나았다. 이들을 바라보는 한국인의 집단 정서는 매우 복잡하다. 사진은 이승만 TV 캡처.

그런데 이처럼 번성했던 민간 위안부의 일부는 미군 위안부였다. 당시 미군 위안부는 1만 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는 1955~1966년의 성매매 산업 종사자(2만 6,000명 ~ 3만 9,000명)의 약 1/3에 해당하는 비율이다.

5.16 후에 박정희 정부는 미군 위안부를 조합이나 협회로 강제 등록시켰는데, 그 때 1만 명이라는 수치가 신문에 몇 차례 보도된 바 있다.

더 나아가 박정희 정부는 1962년에 <매음행위방지법>을 제정하여 민간의 윤락행위를 금지했지만, 그럼에도 미군 위안부의 존재는 인정했다. 그리하여 이들의 등록을 강제하여 검진을 받도록 한 것이다.

1950~60년대 민간 위안부의 핵심은 미군 위안부로 볼 수 있다. 전국에 걸쳐 미군 부대가 주둔한 곳에는 기지촌이 발달했다. 가장 번창한 파주는 38개의 기지촌에 5,000여 명의 위안부가 있었고, 그 다음이 오산기지촌으로 1,900명, 평택기지촌에 600명이 있었다. 그 밖에도 동두천, 양주, 부평, 포천, 군산 등에도 기지촌이 있었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1964년에 나온 박대근의 석사논문《위안부들에 대한 사회의학적 조사 연구-군산 지구를 중심으로》를 살펴보면 당시 미군 위안부의 실태도 짐작할 수 있다.

이영훈이 검토한 이 논문에서는, 한국인 상대 위안부가 180여 명, 미군 상대 위안부 130여명을 조사했다.

논문에 따르면, 미군 상대 위안부의 평균 연령은 한국인 상대 위안부보다 여섯 살 더 많은 27세였다. 평균 학력도 미군 상대 위안부가 높았는데, 한국인 상대 위안부는 대체로 ‘중학교 중퇴’ 미만이 다수인 반면 미군 위안부의 경우는 고졸에서 ‘대학교 중퇴’까지 있었다.

평균 종사 기간도 미군 상대 위안부는 3년으로, 평균 2.5년 종사한 한국인 상대 위안부보다 길었다.

이들의 하루 평균 성교 횟수는 미군 상대 위안부가 1.7회로, 하루 평균 5.51회의 성교 횟수를 기록한 한국인 상대 위안부보다 현저히 적었다. 또한 미군 상대 위안부의 월 평균 소득은 1만 1,423원이나 되었는데, 월 평균 3,455원을 버는 한국인 상대 위안부의 세 배가 넘었다.

이 당시 제조업 종사자 월평균 임금이 남녀 통틀어 3,800원이었는데, 여성 종업원은 2,500원에 불과했다. 이를 비교해 보면 미군 위안부의 소득은 꽤 높은 수준이었다. 결국 별다른 취업 기회를 갖지 못한 저학력 극빈계층 소녀들이 해마다 이 산업으로 진입했던 이유가 되었던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는 것이다.

평균적으로 본다면 미군 위안부가 한국인 상대 위안부보다는 양호한 처지에 있었다.

미군 위안부의 절반 정도는 계약 동거의 형태로 상대가 고정된 경우가 많았다. 그 외에는 기지촌 클럽에 나가 성매매를 하는 형태였다. 또한 미군 위안부들 중에서 고학력자들의 비율이 민간위안부보다 높았던 것은, 이들이 미군과 결혼하여 미국으로 건너가지 위한 목적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인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소결

2019년 2월, 《중앙일보》는 2002년에 벌어진 군산 개복동 화재 사건을 재조명하였다. 이 사고로 성매매 여성 14명이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다. 그 전인 2000년에는 근처의 군산 대명동에서 역시 성매매 여성 5명이 사망했다. 모두 포주와 폭력적으로 얽힌 금전 관계 때문에 감금 상태로 성매매를 하다가 불길을 미처 피하지 못해 벌어진 일이었다.

한국인이 한국군이나 미국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특유의 집단 정서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특히 일본군 위안부였다고 고백한 여인들은 140여 명인데, 미군 위안부였다고 고백한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나아가 6.25 전쟁 시기 한국군 위안부였다고 밝힌 여인은 단 한명도 없다. 실제로 전쟁 당시 한국군 위안부였음이 확실한 여인을 만나 공적인 고백을 권유한 학자도 있었지만, 당사자는 단호히 거부한 경우도 있었다.

그만큼 민간 위안부 특히 미군 위안부들은 보호나 지원, 더 나아가 민족의 거룩한 희생양으로 받들 만한 집단 정서에서 빠져 있다. 여기에는 유난히 반일 종족주의가 작동하지 못한다. 미국은 너무 겁이 나고 복잡한데, 일본은 한 번 해 볼 만한 상대로 여기는 독특한 정서로밖에는 이해되지 않는 지점이다.

이영훈은 이 문제에 대하여 시사점을 던질 만한 일화를 하나 소개한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정치고문이었던 로버트 올리버(Robert T. Oliver)가 “이 민족의 내부 성채는 깨지지는 않았더라도 적어도 금이 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가족이 먹을 것을 필요로 할 때 값싸게 팔아 버릴 수 있을 만큼 섹스는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했다”고 회고했다는 사실이다. 한국인 특유의 집단적 정서와 위선에 대하여 새겨볼 만한 발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영훈은 학자로서 이 회고로부터 연구 방향에 많은 시사를 받는다고 한다.

지금껏 살펴보았듯, 민간 차원의 위안부는 비교적 최근까지도 노예와 같은 굴종 상태에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한 수많은 여인들이 기지촌에서 맞거나 병들어 죽기도 하고 자살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포주와의 금전 관계에 폭력적 예속 관계가 얽힌 사건들이 1960~1970년대 한국 사회의 한쪽 구석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상대적으로 조금 더 양호한 처지에 있는 미군 위안부도 있었다.

물론 박정희 정부의, 민간의 위안부 통제와 미군 위안부 인정 정책은 어떤 점에서 보면 위선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시민단체가 이와 같은 전체적인 역사적 조망을 거부하거나 동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특히 위안부 문제에 개입하는 시민단체들 중 상당수는 일본군 위안부와 미군 위안부가 다르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렇듯 일본군 위안부에는 반일 종족주의로 분노하지만, 미군 위안부 문제에는 적대적으로 반응할 집단 정서가 작용하지 않는 경향이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다.

앞으로 조선시대를 거쳐 일본의 공창제를 지나 복잡하게 얽힌 ‘인간’과 ‘자유’, ‘타인의 몸’에 대한 한국인의 복잡한 인식과 정서를 종합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분명히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도 객관적이고 온당하게 평가할 수 있음을 소수이지만 용기 있는 지식인들이 웅변한다.

참고자료

  • 이영훈, “우리 안의 위안부”, 이영훈 외 공저, 《반일 종족주의》, 미래앤, 2019, 254~271쪽
  • 보건복지부 연구, 조사 발간 자료 검색 페이지 [1]
  • “전염병예방법시행령(대통령령 제1257호, 약칭: 감염병예방법 시행령)”, 1957 2. 28 [2]
  • 김귀옥, <일본식민주의가 한국전쟁기 한국군위안부제도에 미친 영향과 과제>,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103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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