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혁명(四一九革命) 또는 4월 혁명(四月革命)은 1960년 4월 19일 대한민국에서 제1공화국 자유당 정권이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개표조작을 하자, 이에 반발하여 부정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는 학생들의 시위에서 비롯된 혁명이다. 이로 인해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허정 과도 정부를 거쳐 제2공화국 장면 정부가 들어선다.

개요

1960년 1월말에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선거 운동 도중 신병 말기라는 판정을 받게 되어 하와이 병원으로 입원하였으나 갑자기 심장마비로 사망하여 이승만이 단독 후보가 되었다.

그러나 민주당의 부통령 후보인 장면은 건재하였고, 이에 자유당은 부통령에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어느 선거보다도 부정선거활동에 열을 올렸다. 정부로 하여금 공무원을 통한 선거운동망을 조직하고, 전국 경찰에 지시하여 이를 감시독찰하도록 하는 등 선거에 승리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였다.

2월 28일 대구에서 고등학생들이 “학원의 자유 보장하라”, “독재정치, 부정부패를 물리치자”는 구호를 앞세우며 대구 도심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를 2·28 대구 학생의거라고 부르며, 이는 전국의 다른 학생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3월 15일 자유당의 대대적인 3·15 부정선거가 도화선이 되어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대한 규탄 시위가 벌어졌다. 당시 내무부장관 최인규는 무자비하게 강경진압함으로써, 마산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이는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결국 3월 18일 내무부장관 최인규와 치안국장 이가학이 마산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고, 내무부장관이 홍진기로 교체·임명되는 등 정국을 수습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3·15 부정 선거의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던 3·15 마산 의거에 참여한 마산상업고등학교 입학생 김주열이 실종된 지 27일 후인 4월 11일 아침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왼쪽 눈에 경찰이 쏜 최루탄이 박힌 채 시신으로 떠오른 것이 부산일보를 통해 보도되면서 시위는 전국적으로 격화되었다.

4월 18일의 서울의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정오에 총궐기 선언문을 발표한 후, 세종로-태평로 일대로 진출해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유진오 고려대학교 총장 등의 만류로 하오 4시쯤 데모를 중단하고, 평화행진을 하면서 귀교하는 도중 신도환의 대한반공청년단 종로구 단장 임화수 등 폭력배들로부터 취재한 기자들 일부와 함께 학생들이 피습된 4·18 고려대학생 피습 사건이 일어났다.

4월 19일 경찰이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로 몰려드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였고, 발포 이후 시위대는 무장하여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며 맞섰다. 전국민적 저항과 군지휘부의 무력동원 거부에 봉착한 대통령 이승만이 4월 26일 하야를 발표함으로써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몰락하였고, 이 혁명의 결과로 과도 정부를 거쳐 6월 15일(6·15 개헌)에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4.19에 북한이 개입했다는 주장

귀순한 거물간첩 김용규(金用珪)의 주장

귀순한 거물간첩 김용규(金用珪, 1936 ~ 2013)[1][2]는 저서 《소리없는 전쟁》에서 4.19에 북한이 개입했다고 말했다.

불만을 부추기는 방송의 선동을 좌익공작으로 주목하라
北 대남공작 실화 <태양을 등진 달바라기> 나왔다

북한학자 이명영(李命英)의 주장

이명영(李命英, 1928~2000)은 남파 간첩 이석(李錫)이 4.19 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지른 사람이라고 하였다.

  • 이명영(李命英, 1928~2000), 《통일의 조건(統一의 條件) - 발상(發想)의 전환을 위하여》, (종로서적, 1989년 11월) pp.160~161.
[pp.160~161 발췌]

1959년 당시 북한이 남한에 배치한 간첩은 1,000명 정도였다. 500명은 서울에, 또 다른 500명은 지방에 배치했다. 각 도에 50명씩 배치했고, 이 중 25명은 도청 소재지에, 25명은 郡에 배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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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 년 10월의 대구 폭동 사건 때의 남로당(南勞黨) 경북도당 간부였던 이석(李錫)은 그 후 중앙당(中央黨) 간부로 자리를 옮겼다가 체포, 투옥되었다. 6·25 전쟁 때 구출되어 인민군(人民軍)의 철수와 함께 평양으로 갔다. 1953 년에 시작된 남로당(南勞黨) 숙청 때에 용케도 살아 남았을 뿐 아니라 대남 공작 요원으로 기용되어 남파 명령을 받고 1955년 4월에 경기도(京畿道) 화성군(華城郡) 남양만 쪽으로 상륙, 경남 마산(慶南 馬山)에다 아지트를 구축하고 여러 가지 공작에 착수했다. 그가 한 일 중 의 중요한 것의 하나로 3·15 대통령 선거 부정에 항거한 馬山 사태에의 적극 개입이 있다. 그는 그곳에서 상여군 30여 명으로 성우친목상포계(誠友親穆喪布契)를, 그리고 지게군 10여 명으로 무학친목계(舞鶴親穆契)를 조직, 의식화 작업을 해 왔다. 1960 년 3월 15일에 부정 선거 규탄의 움직임이 일게 되자 그는 재빨리 계군들을 민주당(民主黨) 마산시당(馬山市黨) 앞으로 집결케 하여 사태의 격화에 적극 앞장 서도록 했다. 1972년 1월에 이석(李錫)과 그의 공작망이 국군보안사령부(國軍保安司令部)에 의해 검거되었을 때 그는 수사관 앞에서 “4·19 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지른 사람은 나지요”라고 담담하게 진술했던 것이다.49)

49) 이석(李錫) 사건의 보충 신문을 담당했던 예비역 육군 대령 김인칙(金仁則)씨 증언. 그는 현역 때는 국군 방첩대에 근무했으며 예편 후로는 용산교회(龍山敎會)의 장로였다. (1977년 12월 16일에 필자 연구실에서 증언)

간첩 이석에 대해 증언한 김인칙(金仁則, 1917~ ?)은 황해도 출신으로 군정보계통에서 일하다 5.16 직후인 1961년 6월 대령으로 예편되었다.[3] 그 후 일부 군인들 및 구 민주당 계열 인사들과 쿠데타를 계획하다 1962년 5월 적발되어[3][4] 무기징역형을 선고 받고[5] 복역 중 1963년 12월 사면을 받았다.[6] 이후 1972년 체포된 간첩 이석(李錫) 사건 수사에 참여했다고 하니 민간인 신분(군속)으로 군정보계통에서 일한 것으로 보인다. 5.16 세력과 반대되는 구 민주당 인물들과 가까웠던 전력을 보아 그가 굳이 4.19 혁명 세력에 불리한 증언을 지어내서 할 이유는 없을 것이므로 이명영이 인용한 그의 진술은 사실로 보인다.

간첩 임창술(林昌述)과 이석(李錫), 장옥순(張玉順) 부부 체포

보안사(保安司) 발표 간첩(間諜) 7개망(7個網) 23명 검거(檢擧) 1972.01.29 경향신문 7면
간첩(間諜) 7개網(망) 23명 일망타진 —— 육군(陸軍) 보안사령부(保安司令部) 발표 —— 1972.01.29 매일경제 7면
간첩 7개망 23명 검거 중앙일보 1972.01.29 종합 1면

신현확 전 총리의 증언

신현확(申鉉碻, 1920 ~ 2007)[7] 전 총리는 제4대 부흥부장관으로 재직하던 중 4.19 때 3.15 부정선거 연루 혐의로 체포 수감되었다. 감방에는 서울대를 졸업한 후 월북해서 김일성 대학도 졸업하고 남파된 간첩도 같이 있어서 당시 겪었던 일을 증언하였다.

3.15 부정선거 혐의로 수감된 1공화국 국무위원들, 서대문형무소에서 간첩·살인범과 한 방에 수감.
간첩들로터 남한 적화 공작 이야기 듣고 망연자실. 5.16혁명 소식 듣고 “이제 대한민국 살았다. 이제는 적화 안 된다” 하고 만세 불러
<그(감옥) 내부는 어쨌느냐. 간첩도 같이 있었는데, 서울대학 졸업생도 한 놈 있었어. 서울대 졸업하고 월북해서 김일성대학 졸업하고 간첩교육을 5년을 받고 넘어와서 활동하다가 붙잡혀 들어왔다 이 말이야. 잡힌 것이 아니고 저희 형, 아버지가 알고 이놈을 억지로 붙잡아가지고 자수시켰단 말이야. 자기들 무사할려고. 그래 들어왔단 말이야.

똑똑하긴 똑똑한 놈이야. 그게 학생조직 안에 들어가 어떻게 활동했고 4.19를 어떻게 조직하고,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다 하는 거야. 내가 그 얘기를 다 들었지. 이놈은 그 안에서 나에게 얘기해주려고 하는 게 아니요. 그 안에 있는 다른 놈들 교육시키는 거야. 절도, 강도, 살인범 이런 놈들 교육시키는 거야. 사흘만 지나면 전부 간첩 지지자가 되는 거야.

그 안에는 이 체제에 대해 찬성하고 좋다고 하는 놈 한 놈도 없는 거야. 간첩 한 놈만 있으면, 사흘만 있으면 간첩이 오야붕이 되는 거야. 그래 얘기를 죽 하기에 내가 질문을 했지.

네가 넘어왔을 때 처음 어딜 갔느냐. “서울 시내 명동에 갔습니다” 명동에 가서 어떻게 느꼈느냐 하니 그 놈 말이 명동에 가 보니 시골에서 닭을 기르면 새벽에 나와 닭장을 열어준다 이 말이야. 그럼 닭이 와 하고 닭장에서 나가는 거와 똑같다는 거야. 무슨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뭐 닭이 몰려나가는 거하고 똑같은 짓이지 무슨 사람 사는 사회냐. 이렇게 말하더라고.

5.16 일어나자 만세 불러

내가 북은 어떻더냐 하니까 “평양은 다 목적이 있어서 사람들이 나오고 줄서서 다니고, 목적에 따라 움직이지 닭떼처럼 이리저리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러는 거야. 자유가 뭐고, 통제가 뭐라는 걸 전혀 모르는 거야. 그 놈이 “(남한 적화가) 이제 얼마 안 남았다”는 거야. 오래 가야 두 달 남았다. 신문도 안 들어오고 라디오도 없는 콘크리트 방 안에 앉아 있는 데도 정보가 다 들어온다는 거야. 온갖 기술 동원해 통신이 24시간 계속되는 거야.

내가 2년 7개월 살아서 잘 알아. 1평7합3장의 방에 목침이 두 개, 모포가 두 장 있는데 벽은 전부 콘크리트고. 목침을 벽에 대고 말하면 전화랑 똑같애. 옆방에서 말하면 다 들리는 거야. 이런 식으로 모든 게 다 전달되었어.

사회상을 판단해보니 정말 간첩들 말하는 것처럼 우리나라 뒤집어지겠구나. 2년 3개월 동안 거기 들어앉은 우리가 최대로 걱정한 것은 “이 나라가 언제 뒤집어지나” 이거야. 대한민국 망하는 거 아니냐고.

그러다가 5.16이 떡 났을 때 그 안에서 모두 만세를 불렀다니까. 이제 대한민국 살았다. 이제는 적화 안 된다 하고. 이게 진짜요. 아, 죄수들 중에서도 우리 같은 사람들이지. 대부분은 저짝이었고. 군사혁명을 누가 했는지도 모르고, 그 소식만 듣고 “이제 적화를 면했다”고 만세를 불렀다니까.>

김주열의 사망 원인에 대한 의혹

마산상업고등학교(현 마산용마고등학교) 학생 김주열(金朱烈)은 1960년 3월 마산의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에 참가했다가 행방불명된 뒤 실종 27일만인 4월 11일 (창원시)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알루미늄제 최루탄이 눈에 박힌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이 일이 언론에 크게 보도되면서 4.19의 기폭제가 되었다.

그러나 김주열이 어떻게 해서 이러한 모습의 시신으로 발견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최루탄은 시위 현장에서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해서 발사하는 것이 상례이다. 설사 잘못 발사되어 김주열이 맞았다해도 시위 현장에는 여러 사람이 있으니 아무도 못 볼 수가 없는데도 그가 최루탄을 맞고 쓰러지는 것을 본 사람은 없다. 그렇다고 그가 시위현장을 떠나 혼자 있을 때 경찰이 최루탄 같은 것을 쏘았을 리도 만무하다. 시신이 통상적으로 있기 힘든 모습으로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의 사망 과정에 대한 의문이 있을 수 있다.

당시에 밝히지 못한 그의 사망 과정에 대해 지금에 와서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지만 만약 불순 세력이 개입하여 시위를 격화시키고자 했다면 진압 경찰에 의해 죽은 것으로 보이는 참혹한 형태의 시신이 발견되도록 하는 것은 고전적 수법이다. 최루탄은 일반인은 구하기도 어려운 시위 진압 경찰이나 가지고 있는 물건으로, 이것이 눈에 박힌 시신으로 발견되었다는 것이 이러한 작위적인 수법을 연상시킨다. 그의 죽음에 실제로 경찰이 관련되어 있었다면 누구나 경찰을 의심하게될 단서가 되는 최루탄을 제거하지도 않고 그대로 둔 채 시신을 유기했을 가능성도 낮다.

김주열의 모친이 말하는 실종 당시 상황

참고 자료

함께 보기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