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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동뢰 소대 참살사건'''(高東雷 小隊 慘殺事件)은 1932년 2월 북한 만주 무송(撫松) 지방 조선인들의 원성을 사던 [[김일성]] 패거리들의 폭력배 행동을 제압하러 출동했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48959&cid=46623&categoryId=46623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제3중대 1소대 고동뢰(高東雷) 소대장과 소대원 9명이 사전 정보를 입수한 김일성 일당에게 취침 중 참살당한 사건이다.
'''고동뢰 소대 참살사건'''(高東雷 小隊 慘殺事件)은 1932년 2월 만주 무송(撫松) 지방 조선인들의 원성을 사던 북한 [[김일성]] 패거리들의 폭력배 행동을 제압하러 출동했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48959&cid=46623&categoryId=46623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제3중대 1소대 고동뢰(高東雷) 소대장과 소대원 9명이 사전 정보를 입수한 김일성 일당에게 취침 중 참살당한 사건이다.


==사건의 경과==
==사건의 경과==

2020년 8월 10일 (월) 15:50 판

고동뢰 소대 참살사건(高東雷 小隊 慘殺事件)은 1932년 2월 만주 무송(撫松) 지방 조선인들의 원성을 사던 북한 김일성 패거리들의 폭력배 행동을 제압하러 출동했던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제3중대 1소대 고동뢰(高東雷) 소대장과 소대원 9명이 사전 정보를 입수한 김일성 일당에게 취침 중 참살당한 사건이다.

사건의 경과

믿고 따르던 상관 이종락(李鍾洛, 1907 ~ 1940)이 1931년 1월말 체포되어 구금되고, 속했던 군사조직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朝鮮革命軍 吉江指揮部)도 흐지부지 와해되자 의지할 데를 잃은 김일성은 무송(撫松)으로 돌아가 장아청(張亞靑, 1913~1937) 등 또래들을 모아 불량배 짓을 하고 다녔다. 이런 일로 중국인들 사이에 조선인들에 대한 평판이 나빠질 것을 우려한 주민들이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측에 제압을 요청하자 총사령 양세봉(梁世奉, 1896~1934)은 이 패거리들을 제압하러 1932년 2월 중순 고동뢰(高東雷) 소대장이하 10명을 무송(撫松)으로 파견한다. 무송에 당도한 일행이 장거리 행군에 지쳐 피곤해서 잠든 사이에 사전 정보를 입수한 김일성 일당은 이들 10명을 무참히 살해하고, 무기를 훔쳐 도망친다.[1][2][3] 이것이 김일성의 최초의 무장투쟁이다.

이 사건에 대한 당시 기록은 발견된 것이 아직 없으나, 피살된 고동뢰 소대원 중 한 명이었던 김문빈(金文彬)의 친구이자 당시 김일성과도 알고 지냈던 이시찬(李時燦)의 증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증언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1974년 당시에는 대부분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이나, 조선혁명군에 고동뢰 소대장이 실제로 있었고, 그가 나오는 마지막 기록은 1932년 2월 상순이라는 것이 확인된다.[4] 또 조선혁명군 측에 김성주 일당을 제압해주도록 요청했다는 조선혁명군 중대장을 지낸 장철호(張喆鎬, 1892~?)라는 인물도 확인이 된다. 김일성 회고록에는 그가 길림에서 육문중학교 다닐 때 아버지의 친구 장철호(張喆鎬)로부터 학비 후원을 받았다고 하였다.[5] 김형직도 정의부 사람들과 관련을 맺고 있었으므로 장철호를 알았던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는 자신이 신세졌던 사람조차 괴롭히고 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은 또한 조선혁명군 심용준(沈龍俊, 1896~1949) 중대의 무기를 훔쳐 달아나기도 했다.[6]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는 김일성이 마치 심용준과 대단한 친분이 있었고, 그가 은퇴한 후에도 자신을 도와주려한 것처럼 장황하게 써 놓았으나 거짓말로 보인다.[7] 심용준은 김일성이 살해한 고동뢰 소대 10명의 직속 상관 중대장이었으므로 김일성을 원수처럼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다.[8]

고증

사건 자체를 직접 기록한 당시 신문 기사나 문헌은 아직 발견된 것이 없다. 그러나 근래 구축된 여러 DB들을 검색해보면 그러한 정황을 뒷받침하는 당시의 자료들은 상당수 발견된다.

1931년 10월경의 조선혁명군 조직

[註 42] 국민부 및 조선혁명군의 편제와 간부들의 명단 직책은 다음과 같다(通化縣檔案館 통화현당안관 소장문서 檔案民1號 全宗 1號目錄870號, 「鮮匪國民府ノ現況」).

一. 본부 소재지 : 신빈현 하남가(河南街 外新賓縣內)

  •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 梁仁元(梁荷山 : 본명 梁基瑕)
동위원 : 李鐘乾·張承彦·高而虛·李時烈·李一世·朴圭洙·金杜七·金桓·劉東錫·金學奎·金燉
길림지방 독립대장 金履大, 흥화지방 집행위원장 朴春琴
  • 혁명군 사령장 김보안(金輔安, 金寬戎 : 新賓縣 河南街 苗河淸에 있음)
부사령장 張世湧·尹赫, 제1중대장 黃基淸·副官 李海雲, 소대장 金東長·權泰植

一. 지부

  1. 환인현 및 집안현내
    환인지방 집행위원장 鮮于雄, 동 경무집행위원장 李相觀(李相寬), 집안지방 집행위원장 金溢天(신임)·劉光屹(구임), 동 경무집행위원장 張世翰(신임)·朴金校(구임), 혁명군 제4중대장 姜玉成 부관 崔炳棋 소대장 張道伯
  2. 통화현 특별구
    특별구 집행위원장 鄭在明(신임)·宋明奎(구임), 동 경무집행위원장 琴南
  3. 청원현
    淸原지방 집행위원장 權洛容 동 위원 鄭順喆, 동 경무집행위원 金洛玄·金昌善·李炳浩
  4. 撫本지방(永陵街 혁명군은 淸原縣지방으로 이동함)
    撫本지방 집행위원장 金永傑, 혁명군 제2중대장 田雲鶴(南山城子 정미소) 부관 朴致華, 동 소대장 金永華 金鉉宇
  5. 유하현
    유하지방 집행위원장 宋憲 동 위원 姜允杰, 同 경무집행위원장 李炳浩 동위원 朴永勳·鄭相元·金禮三·田秋·李學斗, 중국측 연락원 朴永善(朴利木, 柳河公安局 통역), 혁명군 제3중대장(在 孤山子, 양세봉), 同 소대장(재 三源浦) 李永樂·車用陸·高東雷, 중앙집행위원(在 三源浦) 고이허

1932년 1~2월경의 조선혁명군 상황

pp.350~359 - 조선혁명군 피체자 명단 : 위와 같음
pp.360~364 - 국민부-조선혁명군 조직표 : 위와 같음
pp.869~867 - 1932년 가을의 조선혁명당 조직표 : 제3중대장 심용준(沈龍俊)은 그대로이나 소대장들은 고동뢰 아닌 김성해(金成海), 김춘(金春) 두 사람이다. 변고를 당했다는 증거이다.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4013087400、各国共産党関係雑件/満州国ノ部/南満特委関係 第二巻(I-4-5-2-1_22_3_002)(外務省外交史料館)」
標題:各国共産党関係雑件/満洲国ノ部/南満特委関係 第二巻 5.鮮人共産党関係 1933년 5월 17일 자료
pp.12, 23에 조선혁명군 제3중대장 심용준(沈龍俊), 소대장 김성해(金成海), 김춘(金春)

1932년 2월 초순의 고동뢰 소대장 기록

『震光』은 임시정부 집권당인 한국독립당의 기관지이다.
그리고 同年(1932년) 2月 上旬에 柳河縣 境內에 駐屯이든 朝鮮革命軍 第3中隊 副官 黃奎淸이란 놈이 該 中隊長 沈龍俊 同志가 出他한 機會를 타서 敵에게 投降하고 走狗가 되어, 通化 倭領事에 가서 走狗輩 及 日僞軍警을 몰고 上記 柳河駐屯地로 드러가서 自己가 親手로 經理하던 武器 一部 20餘柄을 들추어 倭敵에게 주엇으며, 또 該隊 小隊長 車用陸 駐屯當所를 襲擊하야 車隊長 以下 兵士同志 李秉學 · 崔鎭英 · 白○○ 等 6名이 被逮되엿는데, 上 車用陸 同志는 被捕當時 飛彈에 中擊되야 面部가 破裂重傷되엿는데, 上 同志는 本來 運動線에 十餘 星霜의 아름다운 歷史를 所有햇음으로 朝中人士가 欽佩하던 터이라. 놈들 없는 짬을 타서 自己 面部傷處에 鮮血이 흐르는 肉塊와 骨碎를 뜯어내어 白紙上에 ‘朝中民衆은 合作하야 抗日하자’는 等 數 十種의 血書를 서서 各 中國人士에게 돌려 주엇다. 本來 9 · 18事變에 刺戟을 받은 中國人士들의 腦海에는 비록 外族일망정 敵手에 끌리여가는 立場과 環境이 同一한 사람의 告別의 血書를 받은 그 刹那 사이의 感慨無量한 쎈쎄이슌을 禁할 수 없으리라는 것도 可想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上 走狗 黃奎淸은 興京縣에서 第3中隊 小隊長 高東雷 一行의 義彈에 銃殺되엿다.

 同年 同月 上旬, 興京 某 地方에 朝鮮革命軍 第2中隊가 駐屯한 것을 敵이 알고 不意에 包圍襲擊하야, 該 中隊長 田雲鶴은 軍隊와의 距離를 멀리 두고 單獨히 事務를 보다가 不幸히 잡히엿고, 該 小隊 隊長 崔允龜가 部隊를 領率하고 敵과 應戰하야 敵方에 數十名의 死傷을 내여주엇고, 그리고 놈들은 桓仁 · 通化 · 興京 · 輯安 · 寬甸 · 臨江 · 撫松 · 濛江 · 柳河 · 淸原 · 海龍 · 撫順 · 本溪 等 各地에서 大活動을 施하야 우리 同志 7~80名의 死傷을 내인 바 있엇다. 以上의 記事는 中國 東北 3千萬, 아니 中國 4萬萬 大衆의 뼈저린 9 · 18慘變을 비롯하야 그 一環的 關係를 가진 우리에게도 이와 같이 가슴 아픈 慘變을 가져다 준 것인 同時 本黨에 對한 一大恐慌期의 歷史 페지가 되지 않을 수 없다. (繼續)

4267年(1934년) 9月 25日 震光社 發行

김학규의 백파 자서전 기록

자서전 서두에 필자가 50년전 1900년에 출생했다고 하여 1950년 경 집필한 것임.
조혁군(朝革軍)은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9]을 말한다.
[pp.6 ~ 7] 내가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의 중앙간부(中央幹部)가 되고 조혁군(朝革軍)의 참모장(參謀長)이 됨에 이르러서는 나는 그들 공산주의자(共産主義者)들과 격렬(激烈)한 정면(正面) 충돌(衝突)을 불면(不免)케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나의 동지(同志)들을 많이 죽이고 또 나를 죽이려고 많이 힘썼다. 또 나도 나의 직권(職權)이 있는 한도내(限度內)에서 그들과 여하(如何)한 투쟁(鬪爭)도 불사(不辭)하여 처음에 이론(理論)으로부터 나중에는 실제행동(實際行動)에 이르기까지 치열(熾烈)한 투쟁(鬪爭)을 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실제행동(實際行動)이라 함은 물론(勿論) 서로 총칼을 가지고 상쟁(相爭)하였음을 말함이며, 그때 그들은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책임자(責任者) 현익철(玄益哲)[10], 조혁군(朝革軍) 총사령(總司令) 양세봉(梁世奉)[11], 동참모장(同參謀長) 나를 가리켜 「삼대살인반동영수(三大殺人反動領袖)」라고 불렀던 것이다.
지금 북한(北韓)의 괴수(魁首) 김일성(金日成)은 그의 원명(原名)이 김성주(金聖柱)인 바, 그가 어렸을 때에 그의 집은 장백(長白)에 있었고 그의 부친(父親)은 우리 민족진영(民族陣營)의 일원(一員)이었다. 우리 정의부(正義府)에서 학비(學費)를 공금(公金)으로 주어 길림(吉林) 육문중학(毓文中學) 2학년(學年)까지 공부를 시켰는데, 그 후 그는 조혁군(朝革軍) 제(第)1중대(中隊) 이종락(李鍾洛) 대장(隊長) 아래 있다가 공산주의(共産主義)로 사상(思想)을 전환(轉換)한 것이다. 1929년(年) 내가 길림(吉林)에 어떤 대표(代表)로 가서 있을 때에 그는 상기(上記) 육문중학(毓文中學)에서 공부하면서 길림(吉林)에 있는 소년(少年)들을 몰아가지고 소년대(小年隊)를 조직(組織)하고 그가 대장(隊長)으로 있으면서 나를 찾아 다니던 것이 기억(記憶)되며, 내가 참모장(參謀長)으로 1932년(年) 하(夏) 당취오군(唐聚五軍)[12]과 같이 통화(通化)에 사령부(司令部)를 설치(設置)하고 있을 때 그는 무송(撫松)으로부터 한국공산청년(韓國共産靑年) 수십명(數十名)을 데리고 중국인(中國人) 유본초(劉本初)라는 사람과 동행(同行)하여 통화성(通化城)에 있는 양사령(梁司令)[11]과 나를 찾아와, 자기(自己)네도 항일(抗日)할 터이니 무기(武器)를 달라고 요구(要求)하던 생각이 난다. 그러나 나는 그가 이미 사상적(思想的)으로 우리와는 적대진영(敵對陣營)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치지불리(置之不理)해 보냈던 것도 생각난다. 공산주의(共産主義)는 그의 기도(企圖)가 세계(世界)를 정복(征服)하는데 있기 때문에 그들과 우리와는 언제든지 양립(兩立)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과 타협(妥協)이니 하는 것은 호상(互相) 자기(自己)네의 정략전략(政略戰略)에 의한 일종(一種) 시간(時間)을 쟁취(爭取)하는 수단(手段)에 불과(不過)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일성 회고록의 관련 기록

세기와 더불어 제2권 (항일 혁명 2편, 1992년 출간): 1930년 5월 ~ 1933년 2월
제6장 시련의 해 (1932년 5월 ~ 1933년 2월)
  • 3. 기쁨과 슬픔 - 당취오, 류본초, 우사령
  • 4. 합작은 불가능한가? - 당취오, 류본초, 양세봉(량사령), 우사령
  • 5. 단합의 리념 아래 - 류본초, 양세봉, 우사령
  • 6. 구국군과 함께 - 당취오, 류본초, 양세봉, 우사령

우사령의 이름은 우명진(于明辰, 卽于學堂)이라고 한다.[13]

참고 자료

각주

  1. 이명영(李命英, 1928 ~ 2000), 《진위 김일성 열전 - 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 <12> 비적두목에 권총사들여 약탈 일삼던 김성주》 중앙일보 1974.04.23 종합 3면
    《진위 김일성 열전 - 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 <13> 양세봉의 관용을 저버린 김성주》 중앙일보 1974.04.24 종합 3면
  2.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列傳)》 (新文化社, 1974) pp.143~145
  3. 國史館論叢 第4輯 > 《조선전사》 現代篇의 分析·批判(許東粲) > Ⅱ. 抗日武裝闘爭史(16〜22권)批判 > 4. 抗日遊擊隊 한국사데이타베이스
  4.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3권 한국독립당 Ⅰ > 기관지 > 『震光』 > 『震光』 제6호(1934년 9월호) : 그리고 同年(1932년) 2月 上旬에 ... 그리고 上 走狗 黃奎淸은 興京縣에서 第3中隊 小隊長 高東雷 一行의 義彈에 銃殺되엿다.
  5. 『김일성 회고록 - 세기와 더불어 3권』제8장 반일의 기치 높이(1934년 2월 ~ 1934년 10월) / 1. 리광 : 나에게 학비를 대준 사람들은 대부분 오동진, 손정도,량세봉,장철호,현묵관과 같이 길림시내에 거주하거나 류하, 흥경,무송,화전을 비롯한 독립군의 본거지들에 있으면서 정의부 본부에 들락날락하던 아버지의 친구들이였다.
  6. 匪首, 金日成의 生長記 (二) 匪名『金日成』을 襲名 滿鮮日報 1940/04/18, 6면
  7.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7권 19장 2절 : 족제비 사냥군
  8. 조선혁명군 제3중대장 심용준(沈龍俊, 1896~1949) 아래 제1소대장 고동뢰(高東雷) : 1932년 초의 조선혁명군 편성표
  9.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 백과사전
  10. 현익철(玄益哲, 1890~1938)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1. 11.0 11.1 양세봉(梁世奉, 梁瑞鳳, 梁世鳳) 위키백과
  12. Tang Juwu, Tang Chu-wu,唐聚五,(20 April 1898 – 18 May 1939) Wikipedia
  13. 김일성이 창건했다는 안도유격대의 진실 동아일보 주성하기자 블로그 2017-0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