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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은 또한 조선혁명군 [http://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Popup.do?goTocode=0&mngNo=6491&kwd=%EC%8B%AC%EC%9A%A9%EC%A4%80 심용준(沈龍俊, 1896~1949)] 중대의 무기를 훔쳐 달아나기도 했다.<ref>[[비수 김일성의 생장기|匪首, 金日成의 生長記 (二) 匪名『金日成』을 襲名]] 滿鮮日報 1940/04/18, 6면</ref>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는 김일성이 마치 심용준과 대단한 친분이 있었고, 그가 은퇴한 후에도 자신을 도와주려한 것처럼 장황하게 써 놓았으나 거짓말로 보인다.<ref>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7권 19장 2절 : 족제비 사냥군</ref> 심용준은 김일성이 살해한 고동뢰 소대 10명의 직속 상관 중대장이었으므로 김일성을 원수처럼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다.<ref>[[:파일:1932-02-국민부-조선혁명군 조직표.pdf|조선혁명군 제3중대장 심용준(沈龍俊, 1896~1949) 아래 제1소대장 고동뢰(高東雷)]] : 1932년 초의 조선혁명군 편성표</ref>
김일성은 또한 조선혁명군 [http://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Popup.do?goTocode=0&mngNo=6491&kwd=%EC%8B%AC%EC%9A%A9%EC%A4%80 심용준(沈龍俊, 1896~1949)] 중대의 무기를 훔쳐 달아나기도 했다.<ref>[[비수 김일성의 생장기|匪首, 金日成의 生長記 (二) 匪名『金日成』을 襲名]] 滿鮮日報 1940/04/18, 6면</ref>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는 김일성이 마치 심용준과 대단한 친분이 있었고, 그가 은퇴한 후에도 자신을 도와주려한 것처럼 장황하게 써 놓았으나 거짓말로 보인다.<ref>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7권 19장 2절 : 족제비 사냥군</ref> 심용준은 김일성이 살해한 고동뢰 소대 10명의 직속 상관 중대장이었으므로 김일성을 원수처럼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다.<ref>[[:파일:1932-02-국민부-조선혁명군 조직표.pdf|조선혁명군 제3중대장 심용준(沈龍俊, 1896~1949) 아래 제1소대장 고동뢰(高東雷)]] : 1932년 초의 조선혁명군 편성표</ref>


고동뢰 소대장 일행을 참살하고 도망갔던 김일성은 1932년 초여름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양세봉 총사령을 다시 찾아와서 지난 잘못에 대한 용서를 빌고 조선혁명군에 자신을 받아 줄 것을 간청했다고 한다. 주위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양세봉은 그를 용서하고 받아주기는 했지만, 못 미더워하여 그가 원하는 직책은 맡겨주지 않았다. 이에 김일성은 다시 어디론가 떠나고 만다.<ref>이명영(李命英), [https://news.joins.com/article/1374897 眞僞 金日成 列傳 (13) | 양세봉의 관용을 저버린 김성주] 중앙일보 1974.04.24 종합 3면</ref> 양세봉이 김일성이 저지른 잔혹하고 패륜적인 행위를 용서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나, 그의 부친 김형직과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0766 정의부(正義府, 국민부 전신)] 사람들이 가까이 지냈던 일이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같다. 김형직이 무면허이긴 하지만 의사였기 때문에 정의부 사람들이 신세지는 일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고동뢰 소대장 일행을 참살하고 도망갔던 김일성은 1932년 초여름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양세봉 총사령을 다시 찾아와서 지난 잘못에 대한 용서를 빌고 조선혁명군에 자신을 받아 줄 것을 간청했다고 한다. 주위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양세봉은 그를 용서하고 받아주기는 했지만, 못 미더워하여 그가 원하는 직책은 맡겨주지 않았다. 이에 김일성은 다시 어디론가 떠나고 만다.<ref>이명영(李命英), [https://news.joins.com/article/1374897 眞僞 金日成 列傳 (13) | 양세봉의 관용을 저버린 김성주] 중앙일보 1974.04.24 종합 3면</ref> 양세봉이 김일성이 저지른 잔혹하고 패륜적인 행위를 용서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나, 그의 부친 김형직과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0766 정의부(正義府, 국민부 전신)] 사람들이 가까이 지냈던 일이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같다. 김형직이 무면허이긴 하지만 의사였기 때문에 정의부 사람들이 신세지는 일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김일성 열전》의 이시찬(李時燦)의 증언==
==《김일성 열전》의 이시찬(李時燦)의 증언==

2020년 8월 11일 (화) 05:24 판

고동뢰 소대 참살사건(高東雷 小隊 慘殺事件)은 1932년 2월 만주 무송(撫松) 지방 조선인들의 원성을 사던 북한 김일성 패거리들의 폭력배 행동을 제압하러 출동했던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제3중대 1소대 고동뢰(高東雷) 소대장과 소대원 9명이 사전 정보를 입수한 김일성 일당에게 취침 중 참살당한 사건이다.

사건의 개요

믿고 따르던 상관 이종락(李鍾洛, 1907 ~ 1940)이 1931년 1월말 체포되어 구금되고, 속했던 군사조직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朝鮮革命軍 吉江指揮部)도 흐지부지 와해되자 의지할 데를 잃은 김일성은 무송(撫松)으로 돌아가 장아청(張亞靑, 1913~1937) 등 또래들을 모아 불량배 짓을 하고 다녔다. 이런 일로 중국인들 사이에 조선인들에 대한 평판이 나빠질 것을 우려한 주민들이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측에 제압을 요청하자 총사령 양세봉(梁世奉, 1896~1934)은 이 패거리들을 제압하러 1932년 2월 중순 유하현 삼원포(柳河縣 三源浦)에 주둔해 있던 고동뢰(高東雷) 소대장이하 10명을 무송(撫松)으로 파견한다. 무송에 당도한 일행이 장거리 행군에 지쳐 피곤해서 잠든 사이에 사전 정보를 입수한 김일성 일당은 이들 10명을 무참히 살해하고, 무기를 훔쳐 도망친다.[1][2][3] 이것이 김일성의 최초의 무장투쟁이다.

이 사건에 대한 당시 기록은 발견된 것이 아직 없으나, 피살된 고동뢰 소대원 중 한 명이었던 김문빈(金文彬)의 친구이자 당시 김일성과도 알고 지냈던 이시찬(李時燦)의 증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증언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1974년 당시에는 대부분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이나, 조선혁명군에 고동뢰 소대장이 실제로 있었고, 그가 나오는 마지막 기록은 1932년 2월 상순이라는 것이 확인된다.[4] 또 조선혁명군 측에 김성주 일당을 제압해주도록 요청했다는 조선혁명군 중대장을 지낸 장철호(張喆鎬, 1892~?)라는 인물도 확인이 된다. 김일성 회고록에는 그가 길림에서 육문중학교 다닐 때 아버지의 친구 장철호(張喆鎬)로부터 학비 후원을 받았다고 하였다.[5] 김형직도 정의부 사람들과 관련을 맺고 있었으므로 장철호를 알았던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는 자신이 신세졌던 사람조차 괴롭히고 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은 또한 조선혁명군 심용준(沈龍俊, 1896~1949) 중대의 무기를 훔쳐 달아나기도 했다.[6]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는 김일성이 마치 심용준과 대단한 친분이 있었고, 그가 은퇴한 후에도 자신을 도와주려한 것처럼 장황하게 써 놓았으나 거짓말로 보인다.[7] 심용준은 김일성이 살해한 고동뢰 소대 10명의 직속 상관 중대장이었으므로 김일성을 원수처럼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다.[8]

고동뢰 소대장 일행을 참살하고 도망갔던 김일성은 1932년 초여름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양세봉 총사령을 다시 찾아와서 지난 잘못에 대한 용서를 빌고 조선혁명군에 자신을 받아 줄 것을 간청했다고 한다. 주위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양세봉은 그를 용서하고 받아주기는 했지만, 못 미더워하여 그가 원하는 직책은 맡겨주지 않았다. 이에 김일성은 다시 어디론가 떠나고 만다.[9] 양세봉이 김일성이 저지른 잔혹하고 패륜적인 행위를 용서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나, 그의 부친 김형직과 정의부(正義府, 국민부 전신) 사람들이 가까이 지냈던 일이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같다. 김형직이 무면허이긴 하지만 의사였기 때문에 정의부 사람들이 신세지는 일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김일성 열전》의 이시찬(李時燦)의 증언

이 사건은 이명영(李命英, 1928 ~ 2000) 전 성균관대 교수의 저서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 그 傳說과 神話의 眞相糾明을 위한 硏究》 (新文化社, 1974)에 처음 나온다. 증언한 이시찬(李時燦)은 고동뢰 소대장을 무송(撫松)으로 파견했던 당시 유하현 삼원포(柳河縣 三源浦)의 국민부 총관(國民府 總管) 이병근(李炳根)의 아들로, 김일성과도 직접 아는 사이였다. 그의 친구 김문빈(金文彬)이 피살된 고동뢰 소대원 중 한 명이었다. 김성주(金聖柱)는 김일성이다.

[pp.143~145] 張亞靑과 같이 撫松에 나타난 金聖柱는 권총을 휘두르고 다니면서 약탈의 선두에 나서 큰 문제를 일으켰다.

金聖柱 張亞靑은 그 지방의 껄렁한 자기 또래의 젊은 것들을 긁어모아 패거리를 지어 中國 사람들 집을 털고 다녔다. 그때 金聖柱는 金一星이란 이름을 썼다. 당시 웬만한 중국 사람들은 대개 집에다 경호용의 총들을 갖고 있었는데 金聖柱 張亞靑등은 돌아다니면서 이걸 강탈해 같은 패거리들끼리 나누어 갖고 무장 작당이 이루어지자 다음에는 또 군자금 모집이다 해서 돈을 털고 다니기 시작했다.

撫松 일대의 中國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한국놈 金一星(金聖柱) 일당의 약탈 때문에 못 살겠다는 소리가 비등해졌다. 韓中 양민족 사이에는 큰 금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一九三一년과 一九三二년 사이의 겨울 내내 金聖柱 일당의 행패는 그치지 않았다. 그때 撫松에는 張喆鎬[10]라는 朝鮮革命軍 中隊長을 하다가 그만 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이 사람이 金聖柱 일당의 행패를 퇴치하지 않고서는 撫松 일대에서 韓人들이 배겨나기 어렵다고 판단, 朝鮮革命軍 본부가 있는 興京縣 旺淸門으로 급히 기별하러 갔다.

그때 朝鮮革命軍의 總司令은 梁世奉으로 바뀌어 있었다. 一九三二년 一월 一九일에 朝鮮革命軍 總司令으로 있던 金保安(金俊澤, 1865~1935) 등이 韓人 밀정의 통보로 日帝 경찰에 체포된 불행이 있어 그 후임으로 梁世奉이 총사령으로 취임했던 때이다. 張喆鎬는 梁司令에게 가서 撫松 일대의 실정을 보고하고 金聖柱 일당을 퇴치할 것을 요청했다. 張喆鎬는 당시 四三세, 본명은 張致旭,(1887~?)이었다. 그는 中日戰爭 발발 (一九三七년) 후 北京에 가서 살다가 해방후 서울을 거쳐 고향인 平北 義州로 갔다. 그 후 소식은 알 수 없으나 四男 張鳳勳이 永登浦에 살고 있다.

梁世奉 司令은 興京과 撫松의 중간지대인 柳河縣 三源浦의 國民府總管이었던 李炳根(本章 第三節의 證言者 李時燦씨의 부친) 에게 편지를 보내 李炳根총관 밑에 있는 朝鮮革命軍 小隊長 高東雷로 하여금 金聖柱 일당을 퇴치토록 하라 했다. 당시는 滿洲事變(一九三一년 九월 一八일) 후라서 도처에 日軍들이 마음 놓고 들락거릴 때라 한인사회는 불안하기 그지 없었다. 李炳根은 梁司令에게 柳河縣 자체가 日軍들 때문에 불안하니 무장병력을 撫松에까지 보내면 柳河縣의 한인사회 보호가 문제라면서 난색을 표하는 답장을 보냈다. 그랬더니 梁司令은 군인은 상부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면서 그대로 집행토록 하라는 지시를 재차 내렸다.

高東雷 小隊長(黃海道 사람)은 권총으로 무장한 九명의 대원을 데리고 撫松으로 떠났다. 그속에는 李炳根의 아들 李時燦씨의 化興中學 동창이었던 金文彬도 끼어 있었다. 金文彬은 咸南사람으로 고향에 가족을 둔채 旺淸門에 공부하러 왔던 사람이었다. 高東雷 소대장 일행은 먼길을 오느라고 撫松에 도착했을 때엔 매우 지쳐 있었다.

도착한 첫날 밤은 우선 푹 쉬기로 했다. 일행은 모두 한 방에서 베개 밑에 권총을 깔고 깊은 잠에 들었다. 날이 새면 金聖柱 일당을 찾아나서 그들을 무장해제해서 다시는 행패를 부리지 못하도록 할 참이었다. 韓中兩民族의 친화를 해치는 일을 막고 그로써 한인사회의 안전을 도모함과 동시에 젊은 것들이 철없이 비적떼 노릇이나 하고 다니는 것을 응징할 참이었다.

그러나 불행은 高東雷 소대장 일행이 撫松에 도착한 것을 金聖柱 패들이 탐지한 데 있었다. 金聖柱 패들은 한밤중에 곤히 잠든 高東雷 일행의 잠자리를 습격하여 一○명을 몰살하고 말았던 것이다. 우리 獨立軍인 朝鮮革命軍의 귀중한 병력의 한 부분이 치안 확보차 출동했다가 金聖柱에 의해 살해된 끔찍한 사건이었다. 金聖柱 일당은 베개 밑 권총들을 모조리 거두어 달아났다. 이 사건을 저지르고 나서 金聖柱 일당은 撫松 지대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一九三二년 二월 께의 일이다. 그 후 이 해 여름까지 金聖柱의 발자취를 말해 주는 자료도 증인도 없다.

위의 내용은 책으로 출판되기 전에 중앙일보에 먼저 연재되었다. 아래 기사이다.

고증

사건 자체를 직접 기록한 당시 신문 기사나 문헌은 아직 발견된 것이 없다. 그러나 근래 구축된 여러 DB들을 검색해보면 그러한 정황을 뒷받침하는 당시의 자료들은 상당수 발견된다.

국민부 산하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총사령은 현익철(玄益哲, 1890~1938)이 맡다가 그가 1931년 8월 31일 체포되자 후임으로 김준택(金俊澤, 金保安, 1865~1935)이 맡게 된다. 김준택(김보안)도 1932년 1월 20일 체포되자 3중대장이었던 양세봉(梁世奉, 梁瑞鳳, 1896~1934)이 총사령을 맡고, 3중대장은 심용준(沈龍俊, 1896~1949)이 맡게 된다. 고동뢰(高東雷)는 3중대의 1소대장이었다.

1931년 10월경의 조선혁명군 조직

이시찬/이명영은 김일성 일당을 제압하러 무송으로 간 고동뢰 소대장이 유하현 삼원포(柳河縣 三源浦)에 주둔해 있었다고 하는데, 1931년 10월에 조선혁명군 제3중대장 양세봉 아래 이영락(李永樂)·차용륙(車用陸)·고동뢰(高東雷) 등 3인의 소대장이 삼원포에 주둔해 있는 것이 확인된다.

[註 42] 국민부 및 조선혁명군의 편제와 간부들의 명단 직책은 다음과 같다(通化縣檔案館 통화현당안관 소장문서 檔案民1號 全宗 1號目錄870號, 「鮮匪國民府ノ現況」).

一. 본부 소재지 : 신빈현 하남가(河南街 外新賓縣內)

  •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 梁仁元(梁荷山 : 본명 梁基瑕)
동위원 : 李鐘乾·張承彦·高而虛·李時烈·李一世·朴圭洙·金杜七·金桓·劉東錫·金學奎·金燉
길림지방 독립대장 金履大, 흥화지방 집행위원장 朴春琴
  • 혁명군 사령장 김보안(金輔安, 金寬戎 : 新賓縣 河南街 苗河淸에 있음)
부사령장 張世湧·尹赫, 제1중대장 黃基淸·副官 李海雲, 소대장 金東長·權泰植

一. 지부

  1. 환인현 및 집안현내
    환인지방 집행위원장 鮮于雄, 동 경무집행위원장 李相觀(李相寬), 집안지방 집행위원장 金溢天(신임)·劉光屹(구임), 동 경무집행위원장 張世翰(신임)·朴金校(구임), 혁명군 제4중대장 姜玉成 부관 崔炳棋 소대장 張道伯
  2. 통화현 특별구
    특별구 집행위원장 鄭在明(신임)·宋明奎(구임), 동 경무집행위원장 琴南
  3. 청원현
    淸原지방 집행위원장 權洛容 동 위원 鄭順喆, 동 경무집행위원 金洛玄·金昌善·李炳浩
  4. 撫本지방(永陵街 혁명군은 淸原縣지방으로 이동함)
    撫本지방 집행위원장 金永傑, 혁명군 제2중대장 田雲鶴(南山城子 정미소) 부관 朴致華, 동 소대장 金永華 金鉉宇
  5. 유하현
    유하지방 집행위원장 宋憲 동 위원 姜允杰, 同 경무집행위원장 李炳浩 동위원 朴永勳·鄭相元·金禮三·田秋·李學斗, 중국측 연락원 朴永善(朴利木, 柳河公安局 통역), 혁명군 제3중대장(在 孤山子, 양세봉), 同 소대장(재 三源浦) 李永樂·車用陸·高東雷, 중앙집행위원(在 三源浦) 고이허

1932년 2월 초순의 고동뢰 소대장 기록

1932년 2월 상순 유하현(柳河縣)에 주둔 중이던 제3중대장 심용준(沈龍俊)의 부관 황규청(黃奎淸)이 변절하여 일만군경을 몰고와 차용륙(車用陸) 소대장이 체포되었다. 이에 고동뢰 소대가 황규청을 사살하였다. 이것이 고동뢰 소대장이 나오는 마지막 기록이다. 그 직후 고동뢰 소대는 무송으로 출동나갔다가 김일성 일당에게 변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震光』은 임시정부 집권당인 한국독립당의 기관지이다.
그리고 同年(1932년) 2月 上旬에 柳河縣 境內에 駐屯이든 朝鮮革命軍 第3中隊 副官 黃奎淸이란 놈이 該 中隊長 沈龍俊 同志가 出他한 機會를 타서 敵에게 投降하고 走狗가 되어, 通化 倭領事에 가서 走狗輩 及 日僞軍警을 몰고 上記 柳河駐屯地로 드러가서 自己가 親手로 經理하던 武器 一部 20餘柄을 들추어 倭敵에게 주엇으며, 또 該隊 小隊長 車用陸 駐屯當所를 襲擊하야 車隊長 以下 兵士同志 李秉學 · 崔鎭英 · 白○○ 等 6名이 被逮되엿는데, 上 車用陸 同志는 被捕當時 飛彈에 中擊되야 面部가 破裂重傷되엿는데, 上 同志는 本來 運動線에 十餘 星霜의 아름다운 歷史를 所有햇음으로 朝中人士가 欽佩하던 터이라. 놈들 없는 짬을 타서 自己 面部傷處에 鮮血이 흐르는 肉塊와 骨碎를 뜯어내어 白紙上에 ‘朝中民衆은 合作하야 抗日하자’는 等 數 十種의 血書를 서서 各 中國人士에게 돌려 주엇다. 本來 9 · 18事變에 刺戟을 받은 中國人士들의 腦海에는 비록 外族일망정 敵手에 끌리여가는 立場과 環境이 同一한 사람의 告別의 血書를 받은 그 刹那 사이의 感慨無量한 쎈쎄이슌을 禁할 수 없으리라는 것도 可想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上 走狗 黃奎淸은 興京縣에서 第3中隊 小隊長 高東雷 一行의 義彈에 銃殺되엿다.

 同年 同月 上旬, 興京 某 地方에 朝鮮革命軍 第2中隊가 駐屯한 것을 敵이 알고 不意에 包圍襲擊하야, 該 中隊長 田雲鶴은 軍隊와의 距離를 멀리 두고 單獨히 事務를 보다가 不幸히 잡히엿고, 該 小隊 隊長 崔允龜가 部隊를 領率하고 敵과 應戰하야 敵方에 數十名의 死傷을 내여주엇고, 그리고 놈들은 桓仁 · 通化 · 興京 · 輯安 · 寬甸 · 臨江 · 撫松 · 濛江 · 柳河 · 淸原 · 海龍 · 撫順 · 本溪 等 各地에서 大活動을 施하야 우리 同志 7~80名의 死傷을 내인 바 있엇다. 以上의 記事는 中國 東北 3千萬, 아니 中國 4萬萬 大衆의 뼈저린 9 · 18慘變을 비롯하야 그 一環的 關係를 가진 우리에게도 이와 같이 가슴 아픈 慘變을 가져다 준 것인 同時 本黨에 對한 一大恐慌期의 歷史 페지가 되지 않을 수 없다. (繼續)

4267年(1934년) 9月 25日 震光社 發行

1932년 1~2월경의 조선혁명군 상황

pp.350~359 - 조선혁명군 피체자 명단 : 위와 같음
pp.360~364 - 국민부-조선혁명군 조직표 : 위와 같음
pp.869~867 - 1932년 가을의 조선혁명당 조직표 : 제3중대장 심용준(沈龍俊)은 그대로이나 소대장들은 고동뢰 아닌 김성해(金成海), 김춘(金春) 두 사람이다. 변고를 당했다는 증거이다.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4013087400、各国共産党関係雑件/満州国ノ部/南満特委関係 第二巻(I-4-5-2-1_22_3_002)(外務省外交史料館)」
標題:各国共産党関係雑件/満洲国ノ部/南満特委関係 第二巻 5.鮮人共産党関係 1933년 5월 17일 자료
pp.12, 23에 조선혁명군 제3중대장 심용준(沈龍俊), 소대장 김성해(金成海), 김춘(金春)

김학규의 백파 자서전 기록

조선혁명군 참모장이었던 김학규(金學奎, 1900~1967)의 자서전에 의하면 1932년 여름 김일성(金聖柱)이 양세봉을 찾아 온 것은 사실이다.

자서전 서두에 필자가 50년전 1900년에 출생했다고 하여 1950년 경 집필한 것임.
조혁군(朝革軍)은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11]을 말한다.
[pp.6 ~ 7] 내가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의 중앙간부(中央幹部)가 되고 조혁군(朝革軍)의 참모장(參謀長)이 됨에 이르러서는 나는 그들 공산주의자(共産主義者)들과 격렬(激烈)한 정면(正面) 충돌(衝突)을 불면(不免)케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나의 동지(同志)들을 많이 죽이고 또 나를 죽이려고 많이 힘썼다. 또 나도 나의 직권(職權)이 있는 한도내(限度內)에서 그들과 여하(如何)한 투쟁(鬪爭)도 불사(不辭)하여 처음에 이론(理論)으로부터 나중에는 실제행동(實際行動)에 이르기까지 치열(熾烈)한 투쟁(鬪爭)을 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실제행동(實際行動)이라 함은 물론(勿論) 서로 총칼을 가지고 상쟁(相爭)하였음을 말함이며, 그때 그들은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책임자(責任者) 현익철(玄益哲)[12], 조혁군(朝革軍) 총사령(總司令) 양세봉(梁世奉)[13], 동참모장(同參謀長) 나를 가리켜 「삼대살인반동영수(三大殺人反動領袖)」라고 불렀던 것이다.
지금 북한(北韓)의 괴수(魁首) 김일성(金日成)은 그의 원명(原名)이 김성주(金聖柱)인 바, 그가 어렸을 때에 그의 집은 장백(長白)에 있었고 그의 부친(父親)은 우리 민족진영(民族陣營)의 일원(一員)이었다. 우리 정의부(正義府)에서 학비(學費)를 공금(公金)으로 주어 길림(吉林) 육문중학(毓文中學) 2학년(學年)까지 공부를 시켰는데, 그 후 그는 조혁군(朝革軍) 제(第)1중대(中隊) 이종락(李鍾洛) 대장(隊長) 아래 있다가 공산주의(共産主義)로 사상(思想)을 전환(轉換)한 것이다. 1929년(年) 내가 길림(吉林)에 어떤 대표(代表)로 가서 있을 때에 그는 상기(上記) 육문중학(毓文中學)에서 공부하면서 길림(吉林)에 있는 소년(少年)들을 몰아가지고 소년대(小年隊)를 조직(組織)하고 그가 대장(隊長)으로 있으면서 나를 찾아 다니던 것이 기억(記憶)되며, 내가 참모장(參謀長)으로 1932년(年) 하(夏) 당취오군(唐聚五軍)[14]과 같이 통화(通化)에 사령부(司令部)를 설치(設置)하고 있을 때 그는 무송(撫松)으로부터 한국공산청년(韓國共産靑年) 수십명(數十名)을 데리고 중국인(中國人) 유본초(劉本初)라는 사람과 동행(同行)하여 통화성(通化城)에 있는 양사령(梁司令)[13]과 나를 찾아와, 자기(自己)네도 항일(抗日)할 터이니 무기(武器)를 달라고 요구(要求)하던 생각이 난다. 그러나 나는 그가 이미 사상적(思想的)으로 우리와는 적대진영(敵對陣營)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치지불리(置之不理)해 보냈던 것도 생각난다. 공산주의(共産主義)는 그의 기도(企圖)가 세계(世界)를 정복(征服)하는데 있기 때문에 그들과 우리와는 언제든지 양립(兩立)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과 타협(妥協)이니 하는 것은 호상(互相) 자기(自己)네의 정략전략(政略戰略)에 의한 일종(一種) 시간(時間)을 쟁취(爭取)하는 수단(手段)에 불과(不過)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일성 회고록의 관련 기록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2권 (항일 혁명 2편, 1992년 출간): 1930년 5월 ~ 1933년 2월
제6장 시련의 해 (1932년 5월 ~ 1933년 2월)

  • 3. 기쁨과 슬픔 : 당취오(唐聚五)[14], 류본초(劉本初), 우사령(于司令)이 나옴
  • 4. 합작은 불가능한가? - 당취오, 류본초, 양세봉(량사령), 우사령이 나옴
  • 5. 단합의 리념 아래 - 류본초, 양세봉, 우사령이 나옴
  • 6. 구국군과 함께 - 당취오, 류본초, 양세봉, 우사령이 나옴

유순호는 우사령(于司令)의 이름이 우명진(于明辰, 卽于學堂)이라고 한다.[15]

김일성은 사실 이 때 양세봉에게 항복하여 그의 군대에 입대할 것을 간청했다. 양세봉은 자기 부하들이 피살당하였지만 사상적으로 포섭할 수 있는 김일성 일당을 대담하게 받아들이고 그를 조선혁명군의 대원으로 키울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들은 한국의 학자들과 여러 증언자들에 의하여 밝혀지고 있다. 그런데 김일성은 직접 이를 뒷받침하는 말을 이번 회고록에서 하게 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반일 인민유격대의 남만 진출과 때를 같이하여 우사령 부대에서도 200명으로 편성된 구분대를 통화지방으로 파견하였다. 이 구분대의 인솔자는 류본초 선생 이었다. 우사령이 자기의 오른 팔이나 다름이 없는 류본초 참모장을 남만으로 보낸 목적은 당취오자위군(唐聚伍自衛軍)과의 합작을 실현하며 자위군을 통하여 무장을 해결하려는데 있었다.”[16]

아닌게 아니라 그는 우사령이 파견한 유본초 부대에 붙어서 통화로 갔는데 그 목적은 당취오와 합작하는 것이었다. 당시 양세봉 장군은 당취오와 합작하고 있었으므로 김일성의 우사령 별동대는 그 양세봉을 찾아갔다. 양세봉은 우사령 부대에 붙어서 온 김일성일당을 민족대오라고 생각하여 항일의 대의(大義)를 위해 고동뢰 소대 학살에 대한 책임추궁을 약간 늦추었던 것이다.
  •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3권》 제8장 반일의 기치 높이(1934년 2월 ~ 1934년 10월) / 1. 리광
나에게 학비를 대준 사람들은 대부분 오동진, 손정도,량세봉,장철호[10],현묵관(현익철)[17]과 같이 길림시내에 거주하거나 류하, 흥경,무송,화전을 비롯한 독립군의 본거지들에 있으면서 정의부 본부에 들락날락하던 아버지의 친구들이였다.
사건과 관련된 위에 나온 국민부와 조선혁명군 인사들은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과도 알던 사이였고, 김일성에게 학비 지원도 해주는 등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도 김일성은 은혜를 져버리고 패륜을 저질렀다.
  •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7권》 제19장 2. 족제비 사냥군
김일성이 고동뢰 소대장의 직속 상관이었던 조선혁명군 3중대장 심용준과 마치 대단한 친분이 있었고, 그가 은퇴한 후에도 자신을 도와주려한 것처럼 장황하게 써 놓았으나 거짓말로 보인다.

조선족 작가 유순호의 주장

이것은 재미 조선족 작가 유순호(劉順浩, 1962~ )의 ⟨김일성 평전⟩의 내용을 인용한 것인데[18], 사건의 발생 과정이 위와는 상당히 다르고, 고동뢰 소대장 한 사람만 살해된 것으로 주장한다.

유순호에게 증언을 해 준 사람은 조선혁명군 사령부에서 호위병을 지내며 현익철의 심부름을 다녔던 적이 있는 김영철(다른 이름은 김청회)이라고 한다. 그는 광복 후에도 국민부가 있던 요녕성 신빈현에서 1983년까지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사건이 1931년 여름 (7월경)일어났고, 조선혁명군 총사령 현익철(玄益哲, 1890~1938)이 부대원 100여명을 풀어 김성주를 잡아오라고 했다는데, 고동뢰 소대장은 1932년 2월 초까지 생존해 있었다는 것은 위의 자료들에서 입증이 되므로 이런 증언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또 체포조 지휘관은 고동뢰의 후임 소대장 심용준이라고 했지만, 심용준은 1932년 초의 조선혁명군 조직표에는 고동뢰 소대장의 직속상관인 3중대장이므로 역시 잘못된 주장이다.

이명영의 저서에 나오는 이시찬의 증언은 주변 정황 기록과 대체로 부합하지만, 유순호의 저서에 나오는 김영철의 증언은 잘못된 곳이 많아 믿기 어렵다. 다만 고동뢰 소대장이 살해된 장소가 무송(撫松)이고, 범인이 김성주(김일성)와 그 친구 장아청(張亞靑, 1913~1937) 등이라는 점은 두 증언이 일치하므로 김영철의 증언도 어느 정도 이시찬의 증언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참고 자료

각주

  1. 이명영(李命英, 1928 ~ 2000), 《진위 김일성 열전 - 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 <12> 비적두목에 권총사들여 약탈 일삼던 김성주》 중앙일보 1974.04.23 종합 3면
    《진위 김일성 열전 - 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 <13> 양세봉의 관용을 저버린 김성주》 중앙일보 1974.04.24 종합 3면
  2.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列傳)》 (新文化社, 1974) pp.143~145
  3. 國史館論叢 第4輯 > 《조선전사》 現代篇의 分析·批判(許東粲) > Ⅱ. 抗日武裝闘爭史(16〜22권)批判 > 4. 抗日遊擊隊 한국사데이타베이스
  4.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3권 한국독립당 Ⅰ > 기관지 > 『震光』 > 『震光』 제6호(1934년 9월호) : 그리고 同年(1932년) 2月 上旬에 ... 그리고 上 走狗 黃奎淸은 興京縣에서 第3中隊 小隊長 高東雷 一行의 義彈에 銃殺되엿다.
  5. 『김일성 회고록 - 세기와 더불어 3권』제8장 반일의 기치 높이(1934년 2월 ~ 1934년 10월) / 1. 리광 : 나에게 학비를 대준 사람들은 대부분 오동진, 손정도,량세봉,장철호,현묵관과 같이 길림시내에 거주하거나 류하, 흥경,무송,화전을 비롯한 독립군의 본거지들에 있으면서 정의부 본부에 들락날락하던 아버지의 친구들이였다.
  6. 匪首, 金日成의 生長記 (二) 匪名『金日成』을 襲名 滿鮮日報 1940/04/18, 6면
  7.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7권 19장 2절 : 족제비 사냥군
  8. 조선혁명군 제3중대장 심용준(沈龍俊, 1896~1949) 아래 제1소대장 고동뢰(高東雷) : 1932년 초의 조선혁명군 편성표
  9. 이명영(李命英), 眞僞 金日成 列傳 (13) | 양세봉의 관용을 저버린 김성주 중앙일보 1974.04.24 종합 3면
  10. 10.0 10.1 장철호(張喆鎬, 1892~?)
  11.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 백과사전
  12. 현익철(玄益哲, 1890~1938)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3. 13.0 13.1 양세봉(梁世奉, 梁瑞鳳, 梁世鳳) 위키백과
  14. 14.0 14.1 Tang Juwu, Tang Chu-wu,唐聚五,(20 April 1898 – 18 May 1939) Wikipedia
  15. 김일성이 창건했다는 안도유격대의 진실 동아일보 주성하기자 블로그 2017-07-28
  16. ⟨세기와 더불어 제2권⟩ 제6장 3. 기쁨과 슬픔
  17. 현익철(玄益哲, 1890~1938)
  18. 유순호, 《김일성 평전 (상)》 (지원출판사, 2016) pp.186~188, 225~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