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와 시장경제는 동의어로 볼수 있다. 이런 관점은 영국의 경제학자 클라팜 등이 주장하듯, '자본주의는 18세기 후반에 영국의 산업혁명으로 등장한 것이 아니라 오랜 과정을 거쳐 점진적으로 발전되어 왔다'는 그의 의견을 인정하는 측면에서 그러하다. 자본주의를 부정적 측도 있다. (페르낭 브로델의 '자본주의와 물질문명'참조.)

자유주의와 중상주의의 역사

과거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정부가 경제를 통제해 왔다.현대 북한은 모든 것이 어버이 수령으로부터 왔다고 생각하고 그걸 위해 존재하는 나라이기때문에 '김일성 왕조'라 부른다. 조선시대에도 백성이 중요한게 아니고 종묘사직이 중요했다. 이씨 왕가의 나라였다. 이렇게 동양은 왕실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소유하는 모습이다.


유럽도 중상주의 시대에는 국가가 경제를 통제했다. 거기서 최초로 자유주의 사조가 출현한 것이다. 19세기에 경제적 자유주의 사조가 확산 되었는데, 20세기 전반기에 다시 중상주의 사조가 반전을 일으켰다. 그 후 다시 20세기 후반기에 자유주의 사조가 확산되었다.

중상주의 vs. 자유주의

중상주의라는 용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해당 시대에는 상업을 중시 여겼다 보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중상주의의 핵심이 아니다. 당시는 농경시대에 비해 상업이 매우 중요했지만, 여전히 제일 중요한 산업은 농업이었다. 중상시대는 부국강병을 위해 정부가 경제와 교역을 강력히 통제했다. 정부가 통제했다는 것이 바로 중상주의의 핵심이다. 스 반대가 개인의 자발적 선택을 중요시하는 자유주의인 것이다.

사회주의 vs. 개인주의

사회주의의 반대말이 개인주의이다. 그래서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는 통한다.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여 창의력을 극대화시켜 사회의 효율성을 달성하는 것이 개인주의적 자유주의다.

반세계화적 중상주의

중상주의 하에서 수출은 이득이고 수입은 손해라고 생각했고 대외적으로는 자립경제를 축했다. 오늘날 세게화와는 반대되는 개념이다. 중상주의 시대때 식민지를 확보했는데 이것은 일종의 확대된 자급자족이었다. 본국와 식민지로 영역은 확대되었지만, 여전히 제국 안에서는 자급자족이었다.

자유주의의 등장

이것에 반대해서 등장한 것이 자유주의이다. 상속에 따라 국경이 결정되었던 스페인처럼, 또한 조선의 종묘사직을 중시했던 시대에 개인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개인은 통치자나 국가를 위해 존재했다. 그러나 반대로 국가나 사회가 개인을 위해 존재한다는 정치적 자유주의 사상이 17세기 유럽에서 등장한다. 또한 18세기에 계몽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의 등장으로 자유주의가 널리 확산 되었다.

영국을 비롯한 스페인, 프랑스, 독일 등 유럽 각국은 1860년대에 상호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면서 자유무역이 크게 확산 되었다. 루드비히 미제스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인 1913년까지를 자유주의의 시대로 보았다.

자유주의시대에는 놀라운 경제적 발전이 있었다. 이 자유주의의 결과로 20세기가 시작될 때 무렵의 노동자들은 불과 한세게 전의 귀족들보다 더 높은 소비생활을 누렸다.

신중상주의

20여년간(1873~1896) 유럽에 장기 불황이 이어지자 유럽의 자유주의는 위기에 직면했다. 이에 각국은 관세율을 높이고 보호무역주의로 돌아섰다. 또한 수출할 곳으로서의 식민지 쟁탈전이 있었다. 경기 변동으로 독점기업이 늘어나자, 독점자본주의에 대응하기 위해서 대기업에 대한 정부의 규제가 확산되었다. 그리고 지구의 ㅂ한쪽에서는 공산주의가 태동되고 정부가 시장을 대체하였다. 공산주의 확산에 대응하기 위해 서구에도 복지국가개념이 등장하여 정부가 시장에 깊숙이 개입했다.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케인즈주의가 확산되어 정부가 인위적으로 경기변동을 조정하는 것이 당연시 되었다. 이러한 정부개입 확산과 보호무역확대 현상은 중상주의의 현상이므로 이를 '신중상주의 사조'라 부른다.

공산주의와 신중상주의

대공황(1929~1933)

대공황의 원인 - 시장실패 때문인가?

회복- 뉴질정책에 대한 평가

중남미의 포퓰리즘

복지국가 이념

동아시아의 개발독재

20세기 후반. 신자유주의 사조

상기한 내용대로 자유주의 사상과 이에 기초한 시장경제이념은 19세기말 부터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고 1970년대 말까지 거의 백년간 중상주의 사조가 확산되었다.

그런데 20세기 후반으로 넘어오면서 다시 자유주의 사조가 중상주의 사조를 극복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 쟁탈전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며 승전국들이 식민지를 독립시키고 그 대신 세계경제질서를 자유주의에 기초한 자유무역을 통한 세계화를 추진하게 되었다. 그 시작이 브렌튼우즈 체제와 GATT의 출현이다.

브레튼우즈 체제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 중인 1944년 7월1일 미국의 브레튼우즈에서 연합국 44국이 제2차 세계대전의 원인이었던 경제민족주의와 식민지 쟁탈전에 대한 반성을 하고, 전후 세계시장경제질서를 어떻게 할 것이가 논의했다. 전쟁 전 각국은 자국 이익을 위해 경쟁적으로 자국 화폐의 평가절하로 'beggar-thy-neighbor policy'를 실시했는데, 이러한 무질서를 바로잡으려고 금 1온스의 가격을 미화33달로 고정하고, 각국의 화폐가치를 금의 가치로 표현함으로써 보다 고정적인 환율제도를 운용하기로 결정했다. 각국의 화폐가 금의 가치에 완전히 고정되어 있는 고정환율제도 대신에 1% 범위내에서 환율의 변동을 허용하는 'adjustable peg'제도이다. 당시 세계 금의 70%를 보유한 미국의 달러화를 금으로 태환이 가능하게 하고, 다른 나라의 화폐는 달러화와 교환함으로써 금과 태환이 가능하도록 한 방식으로 화폐의 가치를 유지하는 금본위제이다.

이후 미국의 달러화는 기축통화로 정해진다. 브레튼우즈 협정은 국제통화기금(IMF)를 통해 환율유지가 어려운 국가에게는 긴급자금을 빌려 줌으로써 국제적 통화질서가 유지되었고, 국제부흥개발은행(IBRD)를 통해 가난한 저개발 국가에 대한 원조를 해왔다. 국제 통화 안정, 구제 상호 무역의 발전, 개도국 지원을 목적으로 특히, 국제 환율안정을 목표로 운영된다.

GAT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