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동의 소련군은 미군과 함께 1945년 해방 전후 한반도의 정세를 주도하며 가장 큰 영향을 준 군대이다. 6.25 전쟁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관련된 극동 소련군 부대의 편성이나 인물들에 대해서는 변화가 심하고 복잡해서 알기가 쉽지 않다.



대일본전 이전의 극동군

극동전선군

극동전선군(Far Eastern Front)[1] 사령부는 하바로프스크에 있었다.

1940년대 초의 사령관은 아파나셍코[2]였고, 1943년에 막심 푸르카예프 (1894-1953)가 후임자로 왔다.[3]

제88독립저격여단(第88獨立狙撃旅團)

소련으로 도피해온 만주 동북항일연군 잔존 세력을 수용한 88여단은 1942년 7월 극동전선군 사령관 아파나셍코[4]스탈린 (1878-1953)의 명령을 받고 창설하였다. 빨치산들의 수용 문제를 타결짓고, 여단 창설의 실무작업을 주도한 사람은 극동전선군 정찰국장 나움 소르킨 (1899-1980) 소장인데,[5] 그는 88여단의 운영과 해체까지 관장하였다. 안쿠지노프 대좌[6]는 정찰부국장으로 소르킨을 도왔다.

김일성
최원 (崔元) 위키백과
유성철(兪成哲, 1917-1995) 위키백과


연해주 군단

사령부는 보로쉴로프(현재의 우수리스크)에 있었다. 연해주는 러시아어로 Primorsky Krai를 의역한 말이며 바닷가를 따라 뾰쪽하게 북한 쪽으로 내려온 지역이다. Primorsky는 영어로 Maritime에 해당되는 의미를 가짐.

만주와 북한 침공 시기

1945년 5월 대독일전이 끝나고 유럽 전선이 정리되자 스탈린은 일본과의 전쟁을 위해 병력과 장비를 비밀리에 극동지역으로 이동한다. 8월 초 3명의 원수를 극동으로 투입하고, 종래의 극동군을 대폭 개편하여 하보로프스크에 극동군 총사령부(Far East Command)를 두고, 그 아래에 제1, 제2 극동전선군과 트랜스바이칼 전선군을 두었다. 하지만 소련은 개전 시기를 미루고 미일간의 전쟁 상황을 주시하다 미국이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하여 일본의 패색이 짙어진 후 나가사키에 두번째 원폭을 투하하던 날인 8월 9일 0시에 만주 침공을 개시하고, 북한 지역으로도 침공해 들어왔다.[7] 소련은 두번째 원폭 투하 정보도 사전에 입수하고 개전을 했을 것이다.


극동군 총사령부 군사위원 이오시프 시킨 (Iosif Vasilevich Shikin, 1906-1973) 위키백과


북한을 점령한 소련 제25군은 제1극동전선군 산하로 사령관은 이반 치스차코프 (Ivan Mikhailovich Chistyakov, 1900-1979)[13] 대장이었다.

일본전 종전 후

종전후 극동군 총사령부는 해체되고, 보로쉴로프의 제1극동전선군은 연해주 군관구(Primorsky Military District)로, 하바로프스크의 제2극동전선군은 극동군관구(Far Eastern Military District)로 개편된다.

연해주 군관구

연해주 군관구의 사령관은 키릴 메레츠코프 (1897-1968) 원수였고, 군사위원이 테렌티 스티코프 (1907-1964)로 평양 소련군정을 총괄지휘하였다. 스티코프는 소속이 보로쉴로프(우수리스크) 사령부이므로 평양에 상주하지는 않았고, 수시로 평양, 모스크바, 서울을 들락거렸다. 스티코프는 1945년 4월 보로쉴로프의 연해주군단으로 부임해왔으나 하바로프스크의 88여단과는 거리가 5~600 km 가량 떨어져 있어 해방전에는 김일성을 알지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스탈린이 그를 북한 지도자로 발탁하는 데는 별 역할을 한 것이 없으나, 소련 군정이 국내 기반이 전무한 김일성을 실제 지도자로 만들어가는 정치공작에는 깊숙히 간여하였다.

극동 군관구

해방 전에는 김일성 등을 수용한 88여단이 속했던 곳이나, 해방 후 평양 소련군정과는 관련이 없다.


평양의 소련 군정

북한에 진주한 소련 제25군이나 평양의 소련군정은 보로쉴로프(우수리스크)에 사령부를 둔 제1극동전선군 (연해주 군관구) 관할하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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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의 6.25 참전

6.25 당시 극동의 소련군 총사령관은 만주침공 당시 트랜스바이칼 전선군 사령관이었던 말리노프스키(Rodion Malinovsky, 1898-1967) 원수였다. 그는 한국전 상황을 늘 보고 받았으며, 참전 명령이 떨어질 지도 몰라 대기하고 있었다 한다. 또 김일성의 작전 지휘가 엉망이라 그를 모자 쓴 대위라고 부르며 경멸하였다한다.[14]

<모자를 쓴 대위>

2차 대전의 탁월한 장군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던 말리노프스키는 유머도 풍부해서 아침마다 버릇처럼 "그래, '모자쓴 대위'가 또 무슨일을 저질렀는가 어디보자"라면서 전날의 전황보고서를 읽곤 했다.

金日成에 대한 원수의 이런 말투에는 前소련군 대위를 차갑게 빈정대는 감정이 있었는데 당시 극동군 참모부에서는 金의 별명이 이미 유행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소련 육군은 6.25에 직접 참전하지 않았으나, 공군은 비밀리에 참전하였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