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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A%B5%AC 김구] - 위키백과
*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A%B5%AC 김구] - 위키백과


==해방전 활동 자료==
 
==해방전 활동==
* 김구(Kim Koo)가 서명한 임시정부의 대독선전포고문 : 1945.02.28
* 김구(Kim Koo)가 서명한 임시정부의 대독선전포고문 : 1945.02.28
: [http://archive.history.go.kr/id/AIN001_02_00C0001_005 The Declaration of War on Germany by Korean provisional Govt : 1945.02.28] 인도 국립공문서관 소장 한국독립 및 정부수립 관련 자료
: [http://archive.history.go.kr/id/AIN001_02_00C0001_005 The Declaration of War on Germany by Korean provisional Govt : 1945.02.28] 인도 국립공문서관 소장 한국독립 및 정부수립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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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협상 관련 자료==
==남북협상==
[[남북협상]]은 1948년 5.10 총선거 직전인 4월 하순 ~ 5월 초순 평양에서 열렸다. 김구가 방북한 기간은 4월 19일 ~ 5월 4일간이다.<ref name="sin">신복룡,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C03&nNewsNumb=002371100007 <nowiki>[광복 70주년 특집 | 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nowiki> 김구와 김일성의 다른 계산] [주간조선 2371호] 2015.08.24</ref>
김구는 1947년 12월 1일에 소련이 UN의 남북동시총선 결의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남한만이라도 선거를 해야하고, 이를 두고 남한 단독의 정부수립이라고 부르면 안 되며, 북한 지역은 추후에 조건이 되면 선거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 [http://db.history.go.kr/id/dh_005_1947_12_01_0090 자료대한민국사 제5권  >  1947년 12월 1일  >  한독당 김구, 정부수립과 민족단결 문제에 관해 담화 발표] 동아일보, 조선일보 1947년 12월 02일
: [http://www.nl.go.kr/nl/search/bookdetail/online.jsp?contents_id=CNTS-00088000611 南北을 通한 選擧아니라도, 政府는 統一政府, 金九氏·聲明發表] 婦女日報 1947.12.02
 
 
[[남북협상]]은 1948년 5.10 총선거 직전인 4월 하순 ~ 5월 초순 평양에서 열렸다. 김구는 4월 19일 청년학생들이 경교장 앞에서 그의 방북을 가로막자<ref>[http://db.history.go.kr/id/dh_006_1948_04_19_0030 자료대한민국사 제6권  >  1948년 4월 19일  >  김구, 청년 학생들의 북행만류에 비장한 결의 표명] 동아일보, 서울신문, 조선일보 1948년 04월 20일</ref> 담을 넘어 북행을 결행하였고<ref>[http://db.history.go.kr/id/dh_006_1948_04_19_0020 자료대한민국사 제6권  >  1948년 4월 19일  >  김구 38선을 넘어 북행] 서울신문, 조선일보 1948년 04월 21일</ref>, 5월 5일에 돌아왔다.<ref>[http://db.history.go.kr/id/dh_007_1948_05_05_0020 자료대한민국사 제7권  >  1948년 5월 5일  >  남북협상 참석차 북행했던 김구, 김규식 입경] 서울신문, 조선일보 1948년 05월 06일, 07일</ref>


* [http://webviewer.nl.go.kr/imageviewer_web/imageviewer.jsp?control_no=CNTS-00069125245 『양김씨(兩金氏) 이미 항복(降服)』 북조선(北朝鮮)의 모략선전(謀略宣傳)] 현대일보 [現代日報] 1948년 04월 15일 2면
* [http://webviewer.nl.go.kr/imageviewer_web/imageviewer.jsp?control_no=CNTS-00069125245 『양김씨(兩金氏) 이미 항복(降服)』 북조선(北朝鮮)의 모략선전(謀略宣傳)] 현대일보 [現代日報] 1948년 04월 15일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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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특히 비망록에는 남한(南韓)으로부터 받은 정세보고에서 김구가 기자들에게『나를 5월10일까지 암살하려는 것을 알고 있다』고 기록, 김구는 평양으로 출발하기 전 자신의 암살을 예견하고 있었음이 드러났다.<br>
{{인용문|특히 비망록에는 남한(南韓)으로부터 받은 정세보고에서 김구가 기자들에게『나를 5월10일까지 암살하려는 것을 알고 있다』고 기록, 김구는 평양으로 출발하기 전 자신의 암살을 예견하고 있었음이 드러났다.<br>
이후 평양에 간 김구는 48년5월3일 1시간 30분동안 김일성과의 단독회담에서『만일 미군정(美軍政)이 나를 강하게 압박하면 북한에서 나에게 피난처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도 좋은가』라고 묻자『김일성이 긍정적으로 대답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후 평양에 간 김구는 48년5월3일 1시간 30분동안 김일성과의 단독회담에서『만일 미군정(美軍政)이 나를 강하게 압박하면 북한에서 나에게 피난처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도 좋은가』라고 묻자『김일성이 긍정적으로 대답했다』고 기록돼 있다.}}
레베데프 비망록의 내용으로 보아 김구가 김일성에게 북한에서 노후를 보낼 과수원을 달라고 했다는 북한의 주장은 사실일 수도 있는 것 같다.<ref name="sin"/>
레베데프 비망록의 내용으로 보아 김구가 김일성에게 북한에서 노후를 보낼 과수원을 달라고 했다는 북한의 주장은 사실일 수도 있는 것 같다.<ref name="sin">신복룡,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C03&nNewsNumb=002371100007 <nowiki>[광복 70주년 특집 | 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nowiki> 김구와 김일성의 다른 계산] [주간조선 2371호] 2015.08.24</ref>


===서울 귀환 후===
===서울 귀환 후===

2018년 10월 5일 (금) 04:30 판

김구(金九, 1876년 8월 29일 (음력 7월 11일) ~ 1949년 6월 26일)는 일제하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당시 임시정부 주석이었다. 해방 후 미군정기에 한독당(한국독립당) 당수로, 신탁통치 반대 운동, 남북협상 등 정치활동을 했으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여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지 않았다. 1949년 6월 26일 암살 당했다.

생애


해방전 활동

  • 김구(Kim Koo)가 서명한 임시정부의 대독선전포고문 : 1945.02.28
The Declaration of War on Germany by Korean provisional Govt : 1945.02.28 인도 국립공문서관 소장 한국독립 및 정부수립 관련 자료

일본 아닌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 것은 좀 이상해 보인다.


남북협상

김구는 1947년 12월 1일에 소련이 UN의 남북동시총선 결의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남한만이라도 선거를 해야하고, 이를 두고 남한 단독의 정부수립이라고 부르면 안 되며, 북한 지역은 추후에 조건이 되면 선거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南北을 通한 選擧아니라도, 政府는 統一政府, 金九氏·聲明發表 婦女日報 1947.12.02


남북협상은 1948년 5.10 총선거 직전인 4월 하순 ~ 5월 초순 평양에서 열렸다. 김구는 4월 19일 청년학생들이 경교장 앞에서 그의 방북을 가로막자[1] 담을 넘어 북행을 결행하였고[2], 5월 5일에 돌아왔다.[3]

양김씨(김구, 김규식)가 평양으로 출발도 하기 전에 북한 방송은 그들이 이미 항복했다고 선전하고 있었다.


48년 남북정치협상은 蘇각본-蘇민정사령관 레베데프 비망록 [중앙일보] 1994년 11월 15일 종합 1면
특히 비망록에는 남한(南韓)으로부터 받은 정세보고에서 김구가 기자들에게『나를 5월10일까지 암살하려는 것을 알고 있다』고 기록, 김구는 평양으로 출발하기 전 자신의 암살을 예견하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이후 평양에 간 김구는 48년5월3일 1시간 30분동안 김일성과의 단독회담에서『만일 미군정(美軍政)이 나를 강하게 압박하면 북한에서 나에게 피난처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도 좋은가』라고 묻자『김일성이 긍정적으로 대답했다』고 기록돼 있다.

레베데프 비망록의 내용으로 보아 김구가 김일성에게 북한에서 노후를 보낼 과수원을 달라고 했다는 북한의 주장은 사실일 수도 있는 것 같다.[6]

서울 귀환 후

  • 김구(金九) - 유어만(劉馭萬, Liu Yuwan) 대화 비망록 전문(全文) : 1948년 7월 11일. 원문은 영문임.
유어만(劉馭萬, Liu Yuwan)은 서울주재 중국(장개석 정부) 총영사
Record of Conversation between Kim Gu and Liu Yuwan : July 11, 1948 Wilson Center : 영문 원문
조갑제(趙甲濟), 이화장에 있는 ‘金九-류위완 대화 비망록’ 全文 공개 : 金九, “공산군 곧 남침, 공화국 세울 것”이라면서 주한미군 철수 주장 월간조선 2009년 9월호
조갑제(趙甲濟), 金九가 유어만 중국 공사와 나눈 대화록: 金九는 북한이 남침할 것을 알면서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였나? 조선 pub 2014-10-27
류근일, 김구 선생이 단독정권(대한민국)수립 반대한 것은 사실 - 이인호 이사장은 역사적 사실을 말했을 뿐 조선 pub 2014-10-24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