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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金日成, 1912년 4월 15일 ~ 1994년 7월 8일, 영어: Kim Il-sung)은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하 북한) 출범 당시부터 1994년 사망할 때까지 북한의 최고 지도자였다. 어릴 때 만주로 가서 성장하여 오랜 외국 생활로 국내 기반이 전혀없었던 그는 운좋게 스탈린의 간택을 받아 소련군 무력의 도움으로 북한의 최고 권력을 장악했으나, 초기에는 연안파, 남로당파 등 여러 세력과 연합할 수 밖에 없었다. 6.25 남침 전쟁 실패후 책임을 박헌영 등에게 덮어씌워 남로당파를 숙청하고, 1956년 8월 종파 사건을 일으켜 연안파, 소련파등을 숙청하여 김일성 유일체제를 구축하는데 성공한다. 1967년 마지막 남은 갑산파를 숙청한 후부터 장남 김정일에로 권력 승계 작업을 시작하였으며, 1980년대에는 김정일의 권력이 김일성을 능가하게되어 김일성은 명목상의 최고 지도자로 전락하였다. 그는 6.25 남침 전쟁을 일으켜 수백만 동족을 살상케한 전범이고, 정치적 반대 계층을 탄압하고 수십만을 수용소에 가두어 반인도적 범죄를 자행한 최악의 반인권 사범이며, 국가를 김일성 일족의 사유물로 만들고, 인민들의 대부분 자유를 박탈하여 노예화한 총책임자이다.  
'''김일성'''(金日成, 1912년 4월 15일 ~ 1994년 7월 8일, 영어: Kim Il-sung)은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하 북한) 출범 당시부터 1994년 사망할 때까지 북한의 최고 지도자였다. 어릴 때 만주로 가서 성장하여 오랜 외국 생활로 국내 기반이 전혀없었던 그는 운좋게 스탈린의 간택을 받아 소련군 무력의 도움으로 북한의 최고 권력을 장악했으나, 초기에는 연안파, 남로당파 등 여러 세력과 연합할 수 밖에 없었다. 6.25 남침 전쟁 실패후 책임을 박헌영 등에게 덮어씌워 남로당파를 숙청하고, 1956년 8월 종파 사건을 일으켜 연안파, 소련파등을 숙청하여 김일성 유일체제를 구축하는데 성공한다. 1967년 마지막 남은 갑산파를 숙청한 후부터 장남 [[김정일]]에로 권력 승계 작업을 시작하였으며, 1980년대에는 김정일의 권력이 김일성을 능가하게되어 김일성은 명목상의 최고 지도자로 전락하였다. 그는 6.25 남침 전쟁을 일으켜 수백만 동족을 살상케한 전범이고, 정치적 반대 계층을 탄압하고 수십만을 수용소에 가두어 반인도적 범죄를 자행한 최악의 반인권 사범이며, 국가를 김일성 일족의 사유물로 만들고, 인민들의 대부분 자유를 박탈하여 노예화한 총책임자이다.  


[[파일:1945-10-14 Kim Il-sung.jpg|300픽셀|섬네일|오른쪽|1945년 10월 14일 오후 1시 평양 기림리 공설운동장에서 개최된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소련군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Jing Zhichen)  대위"가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처음으로 대중들 앞에 나선 모습. 가슴에 소련군 적기훈장을 달고 있다. 김일성의 왼편은 소련군 강미하일 소좌 (소련의 고려인)이고, 뒷줄 소련군 장성들 중 맨 오른 쪽이 [https://ko.wikipedia.org/wiki/%EB%8B%88%EC%BD%9C%EB%9D%BC%EC%9D%B4_%EB%A0%88%EB%B2%A0%EB%8D%B0%ED%94%84 니콜라이 레베데프] 소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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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25일 (토) 05:48 판

김일성(金日成, 1912년 4월 15일 ~ 1994년 7월 8일, 영어: Kim Il-sung)은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하 북한) 출범 당시부터 1994년 사망할 때까지 북한의 최고 지도자였다. 어릴 때 만주로 가서 성장하여 오랜 외국 생활로 국내 기반이 전혀없었던 그는 운좋게 스탈린의 간택을 받아 소련군 무력의 도움으로 북한의 최고 권력을 장악했으나, 초기에는 연안파, 남로당파 등 여러 세력과 연합할 수 밖에 없었다. 6.25 남침 전쟁 실패후 책임을 박헌영 등에게 덮어씌워 남로당파를 숙청하고, 1956년 8월 종파 사건을 일으켜 연안파, 소련파등을 숙청하여 김일성 유일체제를 구축하는데 성공한다. 1967년 마지막 남은 갑산파를 숙청한 후부터 장남 김정일에로 권력 승계 작업을 시작하였으며, 1980년대에는 김정일의 권력이 김일성을 능가하게되어 김일성은 명목상의 최고 지도자로 전락하였다. 그는 6.25 남침 전쟁을 일으켜 수백만 동족을 살상케한 전범이고, 정치적 반대 계층을 탄압하고 수십만을 수용소에 가두어 반인도적 범죄를 자행한 최악의 반인권 사범이며, 국가를 김일성 일족의 사유물로 만들고, 인민들의 대부분 자유를 박탈하여 노예화한 총책임자이다.

1945년 10월 14일 오후 1시 평양 기림리 공설운동장에서 개최된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소련군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Jing Zhichen) 대위"가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처음으로 대중들 앞에 나선 모습. 가슴에 소련군 적기훈장을 달고 있다. 김일성의 왼편은 소련군 강미하일 소좌 (소련의 고려인)이고, 뒷줄 소련군 장성들 중 맨 오른 쪽이 니콜라이 레베데프 소장이다.

출생과 가계

김일성은 1912년 4월 15일[1] 평안남도 대동군 용산면 하리 칠골의 외가에서 김형직(金亨稷)과 강반석(康盤石) 부부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의 생가로 알려진 만경대 고향집은 조부모 김보현과 이보익이 살던 집이며, 당시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리에 속했다. 오늘날 칠골과 만경대는 평양직할시(平壤直轄市)에 편입되어 있다.

흔히 그의 본명은 김성주(金成柱)라고 하나, 그의 어린 시절 학교 동창들의 증언에 의하면 김성주(金聖柱)가 맞을 가능성이 크고[2], 김성주(金誠柱)로 기록한 문헌도 있다.[3][4] 김일성은 3가지 모두 자신의 이름이 맞다고 했다 한다.

김일성의 증조부 김응우는 남의 집 소작농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다 1860년부터 평양에 살고 있던 지주 리평택의 조상 묘를 봐주는 산당지기로 만경대에 이사하게 되었다고 한다.[5] 북한은 김응우가 제네랄 셔먼호 격침을 주도했다고 주장하나, 이런 말은 1967년 갑산파 숙청후 김정일로 권력을 승계하는 과정에서 김일성 가계를 우상화할 필요성 때문에 지어낸 것이다.


소련 도피 시기

해방 전 그는 만주서 항일 빨치산(게릴라) 활동을 하다 일본군에 쫓겨 1940년 10월 23일 소련으로 불법 월경하여 도주하였다. 소련서는 만주 빨치산들을 수용한 극동전선군 산하 제88 독립저격여단(第88獨立狙撃旅團, 88-я отдельная стрелковая бригада)에서 제1영장을 지냈다. 소련군에서 그의 이름은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Jing Zhichen)"이었고, 계급은 대위(Капитан, Captain )였다. 당시에 그는 소련 극동전선군 정찰국장 나움 소르킨 (Naum Semyonovich Sorkin, 1899~1980) 소장의 비밀 정보원이 되어 동료 빨치산들의 동태를 감시하여 소르킨 소장과 극동전선군 사령관 막심 푸르카예프 (Maxim Alekseevich Purkayev, 1894~1953) 대장에게 보고하는 프락치 역할을 하였다.[6][7]

이 일로 상관들의 신임을 얻어 그들의 강력한 추천을 받은 것이 그가 스탈린에 의해 북한 지도자로 발탁된 배경이다. 스탈린은 1945년 9월초 그를 모스크바로 불러 면접시험을 본 후 북한지도자로 낙점하였다.[8][9] 당시 극동군 총사령관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원수는 하바로프스크 군용 비행장에 수송기를 대기시키고, KGB 극동본부 요원 2명에게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안내하도록 했다고 한다.[8]


김일성 연보

김일성의 생애에 대해서는 그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나 북한 간행 전기들이 조작이 많아 정확한 진실을 알기 어렵고, 아직도 잘 모르는 부분이 많다. 아래의 김일성 연보도 작성자에 따라 상당한 편차를 보이고, 잘못된 것들도 있다.

각주

  1. 이 날은 타이타닉(Titanic)호가 빙산에 부딪혀 침몰한 날이며, 북한은 이를 또한 김일성 우상화 선전에 이용하고 있다. 김일성 출생은 타이타닉 침몰보다 더한 재난이다.
  2. 「조선공산청년회 조직의 건(朝鮮共産靑年會 組織ノ件)」 1929년 5월 14일자 길림 총영사의 보고문
  3. 최형우(崔衡宇),《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海外朝鮮革命運動小史)》 제1집(第一輯) (漢城 : 東方文化社, 1945년 12월 10일) p.28
  4. 金日成은 나의 弟子다? 三八線 넘는 崔東旿氏談 민중일보(民衆日報) 1948/04/22
  5. 김응우와 샤만호격침기념비 자유아시아방송 (RFA) 2017-06-20
  6. 秘話(비화) 金日成(김일성)과 北韓(북한) : 前(전) 北韓軍(북한군) 師團(사단) 정치위원 呂政(여정) 手記(수기) <1> 1990.04.22 동아일보 : 솔로킨 소장이 소르킨 정찰국장이고, 부르가예프 대장은 극동전선군(원동방면군) 사령관 Maksim Purkayev 대장이다.
    여정(呂政, 본명 강수봉), 『붉게 물든 대동강 : 前 인민군 사단 정치 위원의 수기』,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 1991.07.01
  7. 김충석, 소련 극동군 제88여단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 : 북한 정치에서 제88여단파의 기원과 형성 역사연구 제30호, 2016.6
    김충석, 제88여단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연구 (북한대학원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6. 2)
  8. 8.0 8.1 비록(秘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상, 하 2권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중앙일보사, 1992) - 하권 pp.202~204 ;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한울 아카데미, 2008) pp.72-73
  9. 평양 소련군정 요원이었던 그리고리 메클레르(Grigory Konovich Mekler, 1909~2006)도 김일성이 귀국전 스탈린의 면접심사를 받은 것을 증언했다 : 김일성정권 내가 만들었다; 소련군 정치장교 G .메크레르의 증언 <對談> / 메크레르,G·惠谷治 極東問題. 159('92.5) pp.48-58. 極東問題硏究所
    Kim Il Sung's Soviet Image-Maker Moscow Times 07/22/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