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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에 나오는 김근혁(金根赫)의 행적은 1920년대 말부터 1930년까지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0766 정의부(正義府)] 또는 그 후신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6303 국민부(國民府)]의 부원으로 활동하다 1930년 여름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A2%85%EB%9D%BD 이종락(李鐘洛, 1907~1940)]을 따라 국민부를 탈퇴하고 나와서 [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C%84%A0%ED%98%81%EB%AA%85%EA%B5%B0_%EA%B8%B8%EA%B0%95%EC%A7%80%ED%9C%98%EB%B6%80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朝鮮革命軍 吉江指揮部)]에 가담한다. 당시 김성주 즉 북한 [[김일성]]도 이종락의 부하였으므로 그와 서로 잘 알던 사이는 맞을 것이다.  이종락은 원래 국민부 산하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의 제5중대장이었으나, 그가 국민부를 탈퇴한 후 만든 군사조직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는 원래의 국민부와 조선혁명군을 주적으로 삼아 타도를 주요 목표로 했다.  
기록에 나오는 김근혁(金根赫)의 행적은 1920년대 말부터 1930년까지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0766 정의부(正義府)] 또는 그 후신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6303 국민부(國民府)]의 부원으로 활동하다 1930년 여름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A2%85%EB%9D%BD 이종락(李鐘洛, 1907~1940)]을 따라 국민부를 탈퇴하고 나와서 [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C%84%A0%ED%98%81%EB%AA%85%EA%B5%B0_%EA%B8%B8%EA%B0%95%EC%A7%80%ED%9C%98%EB%B6%80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朝鮮革命軍 吉江指揮部)]에 가담한다. 당시 김성주 즉 북한 [[김일성]]도 이종락의 부하였으므로 그와 서로 잘 알던 사이는 맞을 것이다.  이종락은 원래 국민부 산하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의 제5중대장이었으나, 그가 국민부를 탈퇴한 후 만든 군사조직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는 원래의 국민부와 조선혁명군을 주적으로 삼아 타도를 주요 목표로 했다.  


김근혁은 군자금 모집을 위해 1930년 10월 30일  밤 11시 하얼빈(哈尔滨, 哈爾濱)의 부가전(傅家甸) 북삼도가(北三道街)의 가토 우메요시(加藤梅吉)가 경영하던 복덕루(福德樓)를 습격하다 현장에서 체포되었다는 것이 1933년 8월 19일자 [[동아일보]] 보도기사에 나온다.<ref>[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3308190020920200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33-08-19&officeId=00020&pageNo=2&printNo=4556&publishType=00020 前正義府員(전정의부원) 崔汝貞(최여정) 被捉(피착)] 1933.08.19 동아일보 2면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33091000209102009&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33-09-10&officeId=00020&pageNo=2&printNo=4578&publishType=00010 朝鮮(조선)○○軍(군) 崔汝貞被逮(최여정피체)] 1933.09.10 동아일보 2면</ref> 기사에는 김근혁의 이름 한자가 김근혁(金僅赫)으로 나오나 僅은 根의 착오일 것이다. 기사에 나오는 김광렬(金光烈), 계영춘(桂永春) 등은 당시 김근혁과 김성주(김일성)의 상관 또는 동료들이고, 특히 유봉화(劉奉華)는 1931년 3월 북한 김일성과 함께 체포되었다는 신문 보도가 있다.<ref>[[:파일:1931-03-26-동아-이종락 부하 김일성 체포.jpg|朝鮮(조선)○○軍(군) 男女 三名 被捉(남여 삼명 피착), 길림성 이통현에서 잡혀 武器(무기)도 押收(압수)되엇다]] 1931.03.26 동아일보 2면</ref><ref>[[:파일:1931-03-26-이종락 부하 김일성 체포.jpg|이종락 부하(李鍾洛 部下) 삼명 우피검(三名 又被檢)]] 조선일보 1931.03.26 석간2 2 면</ref><ref>[[:파일:1931-05-04.-동아-김일성 길림성정부 이송.jpg|李鍾洛部下(이종락부하) 三名(삼명)이 被逮(피체), 이통현 공안국에 잡히어서 吉林省政府(길림성정부)로 護送(호송)]] 1931.05.04 동아일보 2면</ref>  체포된 후 김근혁이 어떻게 되넜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고, 알려진 행적도 없으므로 감옥에서 옥사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에서는 그가 체포되어 사형당한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체포된 뒤 그가 어떤 형을 받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사형까지 당할만한 사안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김근혁은 군자금 모집을 위해 1930년 10월 30일  밤 11시 하얼빈(哈尔滨, 哈爾濱)의 부가전(傅家甸) 북삼도가(北三道街)의 가토 우메요시(加藤梅吉)가 경영하던 복덕루(福德樓)를 습격하다 현장에서 체포되었다는 것이 1933년 8월 19일자 [[동아일보]] 보도기사에 나온다.<ref>[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3308190020920200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33-08-19&officeId=00020&pageNo=2&printNo=4556&publishType=00020 前正義府員(전정의부원) 崔汝貞(최여정) 被捉(피착)] 1933.08.19 동아일보 2면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33091000209102009&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33-09-10&officeId=00020&pageNo=2&printNo=4578&publishType=00010 朝鮮(조선)○○軍(군) 崔汝貞被逮(최여정피체)] 1933.09.10 동아일보 2면</ref> 기사에는 김근혁의 이름 한자가 김근혁(金僅赫)으로 나오나 僅은 根의 착오일 것이다. 기사에 나오는 김광렬(金光烈), 계영춘(桂永春) 등은 당시 김근혁과 김성주(김일성)의 상관 또는 동료들이고, 특히 유봉화(劉奉華)는 1931년 3월 북한 김일성과 함께 체포되었다는 신문 보도가 있다.<ref>[[:파일:1931-03-26-동아-이종락 부하 김일성 체포.jpg|朝鮮(조선)○○軍(군) 男女 三名 被捉(남여 삼명 피착), 길림성 이통현에서 잡혀 武器(무기)도 押收(압수)되엇다]] 1931.03.26 동아일보 2면</ref><ref>[[:파일:1931-03-26-이종락 부하 김일성 체포.jpg|이종락 부하(李鍾洛 部下) 삼명 우피검(三名 又被檢)]] 조선일보 1931.03.26 석간2 2 면</ref><ref>[[:파일:1931-05-04.-동아-김일성 길림성정부 이송.jpg|李鍾洛部下(이종락부하) 三名(삼명)이 被逮(피체), 이통현 공안국에 잡히어서 吉林省政府(길림성정부)로 護送(호송)]] 1931.05.04 동아일보 2면</ref>  체포된 후 김근혁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고, 알려진 행적도 없으므로 감옥에서 옥사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에서는 그가 체포되어 사형당한 것처럼 말하나, 체포된 뒤 그가 어떤 형을 받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사형까지 당할만한 사안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다지 주목을 받을만한 행적도 없고, 이름이 널리 알려질만한 인물도 못되지만 북한에서는 그가 김일성에게 "한별"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한별을 칭송하는 "조선의 별"이라는 노래도 작사, 작곡해 동지들 사이에 보급했다며 찬양하고 있다. 한별을 한자로 처음에 일성(一星)으로 적다가 [[차광수]]의 제의로 일성(日成)으로 바꾸어 적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는 없던 일을 꾸며내어 별 대단한 행적도 없는 [[김일성]]의 과거 선배들을 [[김일성]] 미화 찬양에 악용하고 있다.
그다지 주목을 받을만한 행적도 없고, 이름이 널리 알려질만한 인물도 못되지만 북한에서는 그가 김일성에게 "한별"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한별을 칭송하는 "조선의 별"이라는 노래도 작사, 작곡해 동지들 사이에 보급했다며 찬양하고 있다. 한별을 한자로 처음에 일성(一星)으로 적다가 [[차광수]]의 제의로 일성(日成)으로 바꾸어 적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는 없던 일을 꾸며내어 별 대단한 행적도 없는 [[김일성]]의 과거 선배들을 [[김일성]] 미화 찬양에 악용하고 있다.

2024년 3월 30일 (토) 08:23 판

김일성 회고록의 김혁 사진.
북한의 혁명열사릉에 있는 김혁(金赫)의 묘지 앞에 세워진 반신상. 하단에 새겨진 그의 사망일자는 틀린 것이다.

김혁(金赫, 1907.10.11 ~ 1930.08.25)[1]은 1930년 무렵 만주에서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朝鮮革命軍 吉江指揮部) 사령 이종락(李鍾洛, 1907 ~ 1940)의 부하로 활동하던 북한 김일성의 동료였다.

본명은 김근혁(金根赫)이고, 당시 기록에도 본명 김근혁(金根赫)으로 나오나, 북한에서는 혁명시인 김혁(金赫)으로 널리 선전되고 있는데, 김혁이란 이름을 실제로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다.

북한은 그가 김일성에게 지어준 "한별"이란 이름을 한자로 일성(一星)으로 적다가 이를 일성(日成)으로 바꾸어 적게 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로 보기 어렵다.

개요

1933년 8월 19일자 동아일보석간 2면의 최여정(崔汝貞) 체포 기사에 김근혁(金僅赫)이 1930년 10월 30일 밤 11시 하얼빈(哈尔滨, 哈爾濱)의 부가전(傅家甸) 북삼도가(北三道街)의 가토 우메요시(加藤梅吉)가 경영하던 복덕루(福德樓)를 습격하다 현장에서 체포되었다고 하였다.

기록에 나오는 김근혁(金根赫)의 행적은 1920년대 말부터 1930년까지 정의부(正義府) 또는 그 후신 국민부(國民府)의 부원으로 활동하다 1930년 여름 이종락(李鐘洛, 1907~1940)을 따라 국민부를 탈퇴하고 나와서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朝鮮革命軍 吉江指揮部)에 가담한다. 당시 김성주 즉 북한 김일성도 이종락의 부하였으므로 그와 서로 잘 알던 사이는 맞을 것이다. 이종락은 원래 국민부 산하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의 제5중대장이었으나, 그가 국민부를 탈퇴한 후 만든 군사조직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는 원래의 국민부와 조선혁명군을 주적으로 삼아 타도를 주요 목표로 했다.

김근혁은 군자금 모집을 위해 1930년 10월 30일 밤 11시 하얼빈(哈尔滨, 哈爾濱)의 부가전(傅家甸) 북삼도가(北三道街)의 가토 우메요시(加藤梅吉)가 경영하던 복덕루(福德樓)를 습격하다 현장에서 체포되었다는 것이 1933년 8월 19일자 동아일보 보도기사에 나온다.[2] 기사에는 김근혁의 이름 한자가 김근혁(金僅赫)으로 나오나 僅은 根의 착오일 것이다. 기사에 나오는 김광렬(金光烈), 계영춘(桂永春) 등은 당시 김근혁과 김성주(김일성)의 상관 또는 동료들이고, 특히 유봉화(劉奉華)는 1931년 3월 북한 김일성과 함께 체포되었다는 신문 보도가 있다.[3][4][5] 체포된 후 김근혁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고, 알려진 행적도 없으므로 감옥에서 옥사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에서는 그가 체포되어 사형당한 것처럼 말하나, 체포된 뒤 그가 어떤 형을 받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사형까지 당할만한 사안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다지 주목을 받을만한 행적도 없고, 이름이 널리 알려질만한 인물도 못되지만 북한에서는 그가 김일성에게 "한별"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한별을 칭송하는 "조선의 별"이라는 노래도 작사, 작곡해 동지들 사이에 보급했다며 찬양하고 있다. 한별을 한자로 처음에 일성(一星)으로 적다가 차광수의 제의로 일성(日成)으로 바꾸어 적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는 없던 일을 꾸며내어 별 대단한 행적도 없는 김일성의 과거 선배들을 김일성 미화 찬양에 악용하고 있다.

북한의 혁명열사릉에 김혁의 묘지가 조성되어 있고 반신상도 세웠으나 시신없는 가묘로 보인다. 반신상 아래에 새겨진 사망일자 1930년 8월 25일은 그가 1930년 10월 30일 하얼빈에서 체포되었으므로 명백히 틀린 것이다. 또 그가 1930년 7월 조선혁명군에 입대했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국민부와 조선혁명군 타도를 목표로 했던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朝鮮革命軍 吉江指揮部)에 가담한 것이다.

김혁의 아들 김환(金煥, 1929~2009)은 북한 부총리를 지냈다.[6][7]

참고 자료

북에서 ‘김혁 혁명투사 생일 100돌 기념 중앙보고회’ 열려 <조선신보>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