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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30080100239207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30-08-01&officeId=00023&pageNo=7&printNo=3439&publishType=00020 朝鮮(조선)〇〇 玄大洪(현대홍)을送局(송국)] 1930.08.01 조선일보 7면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30080100239207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30-08-01&officeId=00023&pageNo=7&printNo=3439&publishType=00020 朝鮮(조선)〇〇 玄大洪(현대홍)을送局(송국)] 1930.08.01 조선일보 7면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32032500209202013&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32-03-25&officeId=00020&pageNo=2&printNo=4044&publishType=00020 朝鮮(조선)○○軍(군) 玄大洪公判(현대홍공판)] 1932.03.25 동아일보 2면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32032500209202013&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32-03-25&officeId=00020&pageNo=2&printNo=4044&publishType=00020 朝鮮(조선)○○軍(군) 玄大洪公判(현대홍공판)] 1932.03.25 동아일보 2면
::[十七回나 强盜질 장춘서 잡혀] 매일신보 1930-08-02 석간 07면 05단
::[https://www.nl.go.kr/newspaper/detail.do?content_id=CNTS-00094435147 十七回나 强盜질 장춘서 잡혀] [[매일신보]] 1930-08-02 석간 07면 05단
::[○○隊員 長春서 逮捕押送 자금을 강탈하는 것을]  매일신보 1930-08-03 석간 02면 07단
::[https://www.nl.go.kr/newspaper/detail.do?content_id=CNTS-00094435231 ○○隊員 長春서 逮捕押送 자금을 강탈하는 것을]  [[매일신보]] 1930-08-03 석간 02면 07단
::[時局標榜코 軍資金强請 ○○○○○단원인 玄大洪에 十二年役] 매일신보 1932-03-25
::[https://www.nl.go.kr/newspaper/detail.do?content_id=CNTS-00094524460 時局標榜코 軍資金强請 ○○○○○단원인 玄大洪에 十二年役] [[매일신보]] 1932-03-25 7면 8단


*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74940 “김혁은 김일성 주석을 혁명의 수령으로 모신 업적 남겼다”] 통일뉴스 2007.10.12
*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74940 “김혁은 김일성 주석을 혁명의 수령으로 모신 업적 남겼다”] 통일뉴스 2007.10.12

2024년 3월 30일 (토) 12:47 판

김일성 회고록의 김혁 사진.
북한의 혁명열사릉에 있는 김혁(金赫)의 묘지 앞에 세워진 반신상. 하단에 새겨진 그의 사망일자는 틀린 것이다. 1930년 7월 조선혁명군 입대라는 것도 실제로는 국민부와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타도를 목표로 했던 이종락의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朝鮮革命軍 吉江指揮部)에 가담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김혁(金赫, 1907.10.11 ~ 1930.08.25)[1]은 1930년 무렵 만주에서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朝鮮革命軍 吉江指揮部) 사령 이종락(李鍾洛, 1907 ~ 1940)의 부하로 활동하던 북한 김일성의 동료였다.

본명은 김근혁(金根赫)이고, 당시 기록에도 본명 김근혁(金根赫)으로 나오나, 북한에서는 혁명시인 김혁(金赫)으로 널리 선전되고 있는데, 김혁이란 이름을 실제로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다.

북한은 그가 김일성에게 지어준 "한별"이란 이름을 한자로 일성(一星)으로 적다가 이를 일성(日成)으로 바꾸어 적게 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로 보기 어렵다.

개요

1933년 8월 19일자 동아일보석간 2면의 최여정(崔汝貞) 체포 기사[2]에 김근혁(金僅赫)이 1930년 10월 30일 밤 11시 하얼빈(哈尔滨, 哈爾濱)의 부가전(傅家甸)[3] 북삼도가(北三道街)의 가토 우메요시(加藤梅吉)가 경영하던 복덕루(福德樓)를 습격하다 현장에서 체포되었다고 하였다.

기록에 나오는 김근혁(金根赫)의 행적은 1920년대 말부터 1930년까지 정의부(正義府) 또는 그 후신 국민부(國民府)의 부원으로 활동하다 1930년 여름 이종락(李鐘洛, 1907~1940)을 따라 국민부를 탈퇴하고 나와서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朝鮮革命軍 吉江指揮部)에 가담한다. 당시 김성주 즉 북한 김일성도 이종락의 부하였으므로 그와 서로 잘 알던 사이는 맞을 것이다. 이종락은 원래 국민부 산하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의 제5중대장이었으나, 그가 국민부를 탈퇴한 후 만든 군사조직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는 원래의 국민부와 조선혁명군을 주적으로 삼아 타도를 주요 목표로 했다.

김근혁은 군자금 모집을 위해 1930년 10월 30일 밤 11시 하얼빈(哈尔滨, 哈爾濱)의 부가전(傅家甸)[3] 북삼도가(北三道街)의 가토 우메요시(加藤梅吉)가 경영하던 복덕루(福德樓)를 습격하다 현장에서 체포되었다는 것이 1933년 8월 19일자 동아일보 보도기사에 나온다.[2] 기사에는 김근혁의 이름 한자가 김근혁(金僅赫)으로 나오나 僅은 根의 착오일 것이다. 기사에 나오는 김광렬(金光烈), 계영춘(桂永春) 등은 당시 김근혁과 김성주(김일성)의 상관 또는 동료들이고, 특히 유봉화(劉奉華)는 1931년 3월 북한 김일성과 함께 체포되었다는 신문 보도가 있다.[4][5][6] 체포된 후 김근혁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고, 알려진 행적도 없으므로 감옥에서 옥사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에서는 그가 체포되어 사형당한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체포된 뒤 그가 실제로 어떤 형을 받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살인이 아닌 단순 강도죄에 해당하므로 사형까지 당할만한 사안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다지 주목을 받을만한 행적도 없고, 이름이 널리 알려질만한 인물도 못되지만 북한에서는 그가 김일성에게 "한별"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한별을 칭송하는 "조선의 별"이라는 노래도 작사, 작곡해 동지들 사이에 보급했다며 찬양하고 있다. 한별을 한자로 처음에 일성(一星)으로 적다가 차광수의 제의로 일성(日成)으로 바꾸어 적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북한은 이 일을 소재로 1980년대에 "조선의 별"이라는 영화까지 만들어 김일성 우상화 교육에 이용했다. 실제로는 없던 일을 꾸며내어 별 대단한 행적도 없는 김일성의 과거 선배들을 김일성 미화 찬양에 악용하고 있다.

북한의 혁명열사릉에 김혁의 묘지가 조성되어 있고 반신상도 세웠으나 시신없는 가묘로 보인다. 반신상 아래에 새겨진 사망일자 1930년 8월 25일은 그가 1930년 10월 30일 하얼빈에서 체포되었으므로 명백히 틀린 것이다. 또 그가 1930년 7월 조선혁명군에 입대했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국민부와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타도를 목표로 했던 유사한 이름의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朝鮮革命軍 吉江指揮部)에 가담한 것이다.

김혁의 아들 김환(金煥, 1929~2009)은 북한 부총리를 지냈다.[7][8][9][10][11]

참고 자료

拳銃團突現(권총단돌현) 酌婦(작부)를銃殺(총살) 1930.11.16 조선일보 2면
隊員一名被捉(대원일명피착) 1930.11.17 동아일보 2면
朝鮮(조선)○○軍(군) 軍資金募集(군자금모집) 1930.11.29 동아일보 2면
金景瑞等三名(김경서등삼명) 大連(대련)으로押送(압송) 1931.02.26 조선일보 2면
前正義府員(전정의부원) 崔汝貞(최여정) 被捉(피착) 1933.08.19 동아일보 2면
朝鮮(조선)○○軍(군) 崔汝貞被逮(최여정피체) 1933.09.10 동아일보 2면
軍資募集(군자모집) 數回(수회) 巡査(순사)까지 射殺(사살) 1931.02.04 조선일보 7면
백신한(白信漢, 1908~1929.11.30)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공훈전자사료관
被殺(피살)된 國民府員(국민부원)은 寧邊(영변) 出生(출생) 白信漢(백신한) 1929.12.10 동아일보 2면
銃殺(총살)된〇〇團(단)은 軍校出身(군교출신)의 白信漢(백신한) 1929.12.12 조선일보 2면
脫走(탈주)하얏든 拳銃靑年被逮(권총청년피체) 1930.07.04 조선일보 7면
朝鮮(조선)〇〇 玄大洪(현대홍)을送局(송국) 1930.08.01 조선일보 7면
朝鮮(조선)○○軍(군) 玄大洪公判(현대홍공판) 1932.03.25 동아일보 2면
十七回나 强盜질 장춘서 잡혀 매일신보 1930-08-02 석간 07면 05단
○○隊員 長春서 逮捕押送 자금을 강탈하는 것을 매일신보 1930-08-03 석간 02면 07단
時局標榜코 軍資金强請 ○○○○○단원인 玄大洪에 十二年役 매일신보 1932-03-25 7면 8단
북에서 ‘김혁 혁명투사 생일 100돌 기념 중앙보고회’ 열려 <조선신보>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