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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김일성 미화를 위해 김혁을 이용==
==북한이 김일성 미화를 위해 김혁을 이용==
1930년에 김혁은 23세였으나 북한 김일성은 18세에 불과했는데도 북한은 마치  김혁이 김일성을 떠받들던 충직한 부하였던 것처럼 조작하고 있다.
===김혁이 김일성에게 "한별"이란 이름을 지어줬다는 것은 사실인가?===  
===김혁이 김일성에게 "한별"이란 이름을 지어줬다는 것은 사실인가?===  
"조선의 별" 노래  
"조선의 별" 노래  


===김혁의 최후 미화===
===김혁의 최후 미화===
위에서 본대로 군자금 강제모금애 나섰던 김혁은 1930년 11월 2일 하얼빈의 복덕루에서 여종업원 2명을 살해하고 현장에서 체포된 후 대련(大連)의 감옥에서 옥사한 것으로 보이지만 김일성 회고록에는 그의 체포와 죽음을 전혀 다르게 미화하고 있다. 1930년에 김혁은 23세였으나 북한 김일성은 18세에 불과했는데도 마치  김혁이 김일성을 떠받들던 부하였던 것처럼 조작하고 있다.
위에서 본대로 군자금 강제모금애 나섰던 김혁은 1930년 11월 2일 하얼빈의 복덕루에서 여종업원 2명을 살해하고 현장에서 체포된 후 대련(大連)의 감옥에서 옥사한 것으로 보이지만 김일성 회고록에는 그의 체포와 죽음을 전혀 다르게 미화하고 있다.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91597 ‘김일성 회고록’으로 본 김정일이 찾은 항일 유적지 : 위원(毓文)중학교, 베이산(北山)공원, 하얼빈(哈爾濱), 무단장(牧丹江)] 통일뉴스 2010.08.31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91597 ‘김일성 회고록’으로 본 김정일이 찾은 항일 유적지 : 위원(毓文)중학교, 베이산(北山)공원, 하얼빈(哈爾濱), 무단장(牧丹江)] 통일뉴스 2010.08.31
{{인용문|김 주석은 김혁을 1930년 8월초 조선혁명군 소조를 내기 위해 하얼빈으로 파견했다. 김 주석은 회고록에서 “길림, 장춘, 류하, 흥경, 회덕, 이통 일대에서 주로 활동해온 그(김혁)에게 있어서 할빈(하얼빈)은 생소한 고장이었”는데 “나도 이 도시에 대해서는 별로 파악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럼에도 김 주석은 “우리는 길림에 있을 때부터 할빈을 중시하였다”고 해 하얼빈을 중요 지역으로 삼았음을 시사했다.
{{인용문|김 주석은 김혁을 1930년 8월초 조선혁명군 소조를 내기 위해 하얼빈으로 파견했다. 김 주석은 회고록에서 “길림, 장춘, 류하, 흥경, 회덕, 이통 일대에서 주로 활동해온 그(김혁)에게 있어서 할빈(하얼빈)은 생소한 고장이었”는데 “나도 이 도시에 대해서는 별로 파악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럼에도 김 주석은 “우리는 길림에 있을 때부터 할빈을 중시하였다”고 해 하얼빈을 중요 지역으로 삼았음을 시사했다.

2024년 3월 30일 (토) 14:32 판

김일성 회고록의 김혁 사진.
북한의 혁명열사릉에 있는 김혁(金赫)의 묘지 앞에 세워진 반신상. 하단에 새겨진 그의 사망일자는 틀린 것이다. 1930년 7월 조선혁명군 입대라는 것도 실제로는 국민부와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타도를 목표로 했던 이종락의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朝鮮革命軍 吉江指揮部)에 가담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김혁(金赫, 1907.10.11 ~ 1930.08.25)[1]은 1930년 무렵 만주에서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朝鮮革命軍 吉江指揮部) 사령 이종락(李鍾洛, 1907 ~ 1940)의 부하로 활동하던 북한 김일성의 동료였다.

본명은 김근혁(金根赫)이고, 당시 기록에도 본명 김근혁(金根赫)으로 나오나, 북한에서는 혁명시인 김혁(金赫)으로 널리 선전되고 있는데, 김혁이란 이름을 실제로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다.

북한은 그가 김일성에게 지어준 "한별"이란 이름을 한자로 일성(一星)으로 적다가 이를 일성(日成)으로 바꾸어 적게 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로 보기 어렵다.

개요

1933년 8월 19일자 동아일보석간 2면의 최여정(崔汝貞) 체포 기사[2]에 김근혁(金僅赫)이 1930년 10월 30일 밤 11시 하얼빈(哈尔滨, 哈爾濱)의 부가전(傅家甸)[3] 북삼도가(北三道街)의 가토 우메요시(加藤梅吉)가 경영하던 복덕루(福德樓)를 습격하다 현장에서 체포되었다고 하였다.

기록에 나오는 김근혁(金根赫)의 행적은 1920년대 말부터 1930년까지 정의부(正義府) 또는 그 후신 국민부(國民府)의 부원으로 활동하다 1930년 여름 이종락(李鐘洛, 1907~1940)을 따라 국민부를 탈퇴하고 나와서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朝鮮革命軍 吉江指揮部)에 가담한다. 당시 김성주 즉 북한 김일성도 이종락의 부하였으므로 그와 서로 잘 알던 사이는 맞을 것이다. 이종락은 원래 국민부 산하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의 제5중대장이었으나, 그가 국민부를 탈퇴한 후 만든 군사조직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는 원래의 국민부와 조선혁명군을 주적으로 삼아 타도를 주요 목표로 했다.

김근혁은 군자금 모집을 위해 1930년 11월 2일 새벽 5시 하얼빈(哈尔滨, 哈爾濱)의 부가전(傅家甸)[3] 북삼도가(北三道街)의 가토 우메요시(加藤梅吉)가 경영하던 복덕루(福德樓)를 습격하다 현장에서 체포되었다는 것이 1933년 8월 19일자 동아일보 보도기사에 나온다.[2] 기사에는 김근혁의 이름 한자가 김근혁(金僅赫)으로 나오나 僅은 根의 착오일 것이다. 기사에 나오는 김광렬(金光烈), 계영춘(桂永春) 등은 당시 김근혁과 김성주(김일성)의 상관 또는 동료들이고, 특히 유봉화(劉奉華)는 1931년 3월 북한 김일성과 함께 체포되었다는 신문 보도가 있다.[4][5][6] 체포된 후 김근혁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고, 알려진 행적도 없으므로 감옥에서 옥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다지 주목을 받을만한 행적도 없고, 이름이 널리 알려질만한 인물도 못되지만 북한에서는 그가 김일성에게 "한별"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한별을 칭송하는 "조선의 별"이라는 노래도 작사, 작곡해 동지들 사이에 보급했다며 찬양하고 있다. 한별을 한자로 처음에 일성(一星)으로 적다가 차광수의 제의로 일성(日成)으로 바꾸어 적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북한은 이 일을 소재로 1980년대에 "조선의 별"이라는 영화까지 만들어 김일성 우상화 교육에 이용했다. 실제로는 없던 일을 꾸며내어 별 대단한 행적도 없는 김일성의 과거 선배들을 김일성 미화 찬양에 악용하고 있다.

북한의 혁명열사릉에 김혁의 묘지가 조성되어 있고 반신상도 세웠으나 시신없는 가묘로 보인다. 반신상 아래에 새겨진 사망일자 1930년 8월 25일은 그가 1930년 11월 2일 하얼빈에서 체포되었으므로 명백히 틀린 것이다. 또 그가 1930년 7월 조선혁명군에 입대했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국민부와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타도를 목표로 했던 유사한 이름의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朝鮮革命軍 吉江指揮部)에 가담한 것이다.

김혁의 아들 김환(金煥, 1929~2009)은 북한 부총리를 지냈다.[7][8][9][10][11]

당시 기록에 나오는 김근혁

  • 국민부 산하 청년 단체 남만한인청년총동맹(南滿韓人靑年總同盟)의 간부로 있었다.
  • 1930년 여름 이종락이 국민부와 조선혁명군을 탈퇴하고 나와서 동아혁명군 김광렬(金光烈)과 함께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를 창설할 때 그도 동참하였다.

하얼빈 복덕루 습격 사건

김근혁(金根赫)은 1930년 11월 2일 새벽 5시경 하얼빈(哈尔滨, 哈爾濱)의 부가전(傅家甸)[3] 북삼도가(北三道街)의 가토 우메요시(加藤梅吉)가 경영하던 복덕루(福德樓)를 습격하여 여종업원 2명을 사살하고 1명을 부상시킨 후 자신도 부상을 당하고 출동한 경찰에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당시 국내신문에도 사건이 보도되었으나 당시 체포된 범인의 이름이 김근혁(金根赫)으로 밝혀지는 것은 1933년 8월 공범 최여정(崔汝貞)이 제포되었을 때의 기사에서이다. 그는 체포된 후 대련(大連)으로 압송되어 갔다고 하므로 재판도 그곳에서 이루어진 탓인지 국내 신문에 재판과 처벌에 대한 후속보도는 없다.

拳銃團突現(권총단돌현) 酌婦(작부)를銃殺(총살) 1930.11.16 조선일보 2면
隊員一名被捉(대원일명피착) 1930.11.17 동아일보 2면
朝鮮(조선)○○軍(군) 軍資金募集(군자금모집) 1930.11.29 동아일보 2면
金景瑞等三名(김경서등삼명) 大連(대련)으로押送(압송) 1931.02.26 조선일보 2면

1933년 8월 복덕루 사건의 공범이었던 최여정(崔汝貞)이 체포되었다는 기사에 사건 당일인 1930년 11월 2일 체포된 범인의 이름이 김근혁(金僅赫)으로 나오는데 주변 인물들의 이름으로 보아 김근혁(金根赫)이 틀림없다. 이 기사에는 사건이 일어난 일시도 1930년 10월 30일 밤 11시라 했으나, 사건 당시 보도에 나오는 11월 2일 새벽 5시가 맞는 것으로 보인다.

朝鮮(조선)○○軍(군) 崔汝貞被逮(최여정피체) 1933.09.10 동아일보 2면

그의 상관이었던 이종락과 김광렬 등이 1931년 1월 28일 체포되었을 당시 기사에도 하얼빈의 복덕루 사건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만 그의 이름은 명시되지 않았다.

軍資募集(군자모집) 數回(수회) 巡査(순사)까지 射殺(사살) 1931.02.04 조선일보 7면

기타 이종락 부하들의 군자금 강취 사건

被殺(피살)된 國民府員(국민부원)은 寧邊(영변) 出生(출생) 白信漢(백신한) 1929.12.10 동아일보 2면
銃殺(총살)된〇〇團(단)은 軍校出身(군교출신)의 白信漢(백신한) 1929.12.12 조선일보 2면
朝鮮(조선)〇〇 玄大洪(현대홍)을送局(송국) 1930.08.01 조선일보 7면
朝鮮(조선)○○軍(군) 玄大洪公判(현대홍공판) 1932.03.25 동아일보 2면
十七回나 强盜질 장춘서 잡혀 매일신보 1930-08-02 석간 07면 05단
○○隊員 長春서 逮捕押送 자금을 강탈하는 것을 매일신보 1930-08-03 석간 02면 07단
時局標榜코 軍資金强請 ○○○○○단원인 玄大洪에 十二年役 매일신보 1932-03-25 7면 8단

북한이 김일성 미화를 위해 김혁을 이용

1930년에 김혁은 23세였으나 북한 김일성은 18세에 불과했는데도 북한은 마치 김혁이 김일성을 떠받들던 충직한 부하였던 것처럼 조작하고 있다.

김혁이 김일성에게 "한별"이란 이름을 지어줬다는 것은 사실인가?

"조선의 별" 노래

김혁의 최후 미화

위에서 본대로 군자금 강제모금애 나섰던 김혁은 1930년 11월 2일 하얼빈의 복덕루에서 여종업원 2명을 살해하고 현장에서 체포된 후 대련(大連)의 감옥에서 옥사한 것으로 보이지만 김일성 회고록에는 그의 체포와 죽음을 전혀 다르게 미화하고 있다.

김 주석은 김혁을 1930년 8월초 조선혁명군 소조를 내기 위해 하얼빈으로 파견했다. 김 주석은 회고록에서 “길림, 장춘, 류하, 흥경, 회덕, 이통 일대에서 주로 활동해온 그(김혁)에게 있어서 할빈(하얼빈)은 생소한 고장이었”는데 “나도 이 도시에 대해서는 별로 파악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럼에도 김 주석은 “우리는 길림에 있을 때부터 할빈을 중시하였다”고 해 하얼빈을 중요 지역으로 삼았음을 시사했다.

김 주석은 하얼빈을 중시한 이유를 “거기에 국제당연락소가 있는 사정과도 관련된다”고 밝혔다. 즉, 김 주석이 “길림육문중학교에 조직한 공청과 연계를 가지고 있던 국제당 산하의 공청조직도 할빈에 있었”기에 “국제당과의 연계를 가지자면 어차피 이 도시에 우리의 통로를 내고 할빈을 우리가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곳으로 개척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 주석이 김혁을 하얼빈에 보낸 중요한 목적은 “할빈 일대에서 우리의 혁명조직을 늘이는 한편 국제당과의 연계를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김혁을 책임자로 한 조선혁명군 소조가 도착하였을 때 할빈의 공기는 매우 살벌하였다.” 합법적 조직들까지도 지하에 들어가야 할 형편이었고, 비합법적 조직들은 자기를 위장해야 헸다. 이런 어려움 속에 김혁은 “능숙한 조직적 수완과 담력을 가지고 청년들을 교양하고 조직을 확대하는 한편 기층 당조직을 내오기 위한 준비사업과 무기를 확보하기 위한 사업도 힘 있게 밀고나갔”으며 “적들의 삼엄한 감시망을 피해가며 국제당연락소와의 연계도 지어놓았다.”

김 주석은 “할빈의 일을 추켜세우는 데서는 김혁의 공로가 컸다”면서 김혁의 최후를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혁명의 한개 지역을 담당한 책임자답게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다가 할빈도리의 비밀연락소에서 불의에 달려드는 적들과 총격전을 벌리던 끝에 최후를 결심하고 3층에서 뛰어내렸다. 그런데 강철 같은 육체가 그의 뜻을 배신하였다. 김혁은 자결에 성공하지 못한 채 적들에게 붙잡혀 려순감옥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그 감옥에서 모진 고문과 박해에 시달리다가 옥사하였다고 한다.”

김 주석은 김혁의 죽음을 접하고서 “김혁은 우리 혁명대오에서 백신한과 함께 조국과 민족을 위해 삶과 젊음을 바친 첫 세대의 대표자의 한사람”이라면서 “한 명의 혁명동지가 천금보다 더 귀중했던 그때 김혁과 같이 훌륭한 재사를 잃은 것은 우리 혁명에 있어서 참으로 가슴아픈 손실이었다. 그가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며칠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회고했다.

한편, 북한에서는 김일성 주석과 함께 항일빨치산 활동을 하다 일찍 사망한 김혁, 차광수를 거론하며 이들은 김 주석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수령님(김 주석)을 조선혁명의 영도자로 내세우고 끝까지 혁명적 의리를 지켰다”고 강조해 왔다.

참고 자료

북에서 ‘김혁 혁명투사 생일 100돌 기념 중앙보고회’ 열려 <조선신보>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