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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년 2월 9일 사실상 북한 단독의 정부인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출범
* 1946년 2월 9일 사실상 북한 단독의 정부인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출범.<ref>[http://db.history.go.kr/item/front.do?levelId=ch_008&frontTitle=%ED%95%B4%EC%84%A4%EB%AA%A9%EB%A1%9D&elName=commentary&elType=%ED%95%B4%EC%84%A4%EB%AA%A9%EB%A1%9D 임시인민위원회 구성원 : 북한연표 해설목록] 국사편찬위<br>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70131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ref><ref>[http://db.history.go.kr/id/npfp_1946_02_20_v0001_0030 北朝鮮臨時人民委員會 조직, 인민정부 진용] 자유신문 1946년 02월 20일</ref><ref>[http://www.nl.go.kr/nl/search/bookdetail/online.jsp?contents_id=CNTS-00088047322 북선위원회진용(鮮委員會陣容)] 공업신문 1946.02.21 1면<br>
[http://www.nl.go.kr/nl/search/bookdetail/online.jsp?contents_id=CNTS-00065285879 北朝鮮 臨時人民委員會 樹立, 委員長 委員二十五人等 部署決定] 중앙신문, 1946.02.20</ref>





2018년 9월 8일 (토) 21:56 판

  • 1945년 9월 초 스탈린이 하바로프스크 88여단의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불러 면접하고 북한 지도자로 결정함. - 북한에 김일성을 지도자로 하는 정부를 만들겠다는 의도의 표출
소련 관계자들의 믿을만한 증언이 있으나, 아직 문서적인 증거는 나오지 않음. 그러나 김일성이 해방 직후 9월 19일 입북하면서부터 소련군이 지도자로 대접하고, 자신도 지도자 행세를 하고 다녔으므로 사실임이 명백함.


  •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이 "북한에 부르조아 민주국가를 만들라"는 비밀 지령을 내림.[1][2]
지령문서는 스탈린(소련군 최고사령관)과 안토노프 軍(군)참모총장이 바실레프스키 극동전선 총사령관과 연해주 군관구 군사평의회, 제25군사평의회에 보냈던 1945년 9월 20일자 암호 전보[3]


스탈린의 지령이 잘 이행되고 있지 않다고 평가. ‘북한의 반동(反動) 지주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토지개혁과 북조선 내 정권을 중앙집권화할 것을 스탈린에게 건의’


  • 1946년 2월 9일 사실상 북한 단독의 정부인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출범.[5][6][7]


  • 1946년 3월 5일 북한에서 쉬킨 보고서의 제안대로 토지개혁을 단행 : 남북한은 이질적인 사회로 진행하고 통일정부 수립은 남한이 공산화를 받아들일 때만 가능하게 됨.


  • 1946년 5월 스탈린 “북한, 중공군 후방기지로” 지령
이정식 (李庭植, Chong-Sik Lee, 1931 ~ ) 전 펜실베이니아 대학 정치학과 교수의 견해[8]
“국제사적 시야에서 한국현대사를 재조명해야 합니다. 해방정국은 우리 교과서에는 잘 보이지 않는 손이 뒤흔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잘 몰랐던 진실이 운명을 결정했습니다. 한반도 분단의 수수께끼는 소련의 세계정책의 변화를 통해 풀어낼 수 있습니다. 그 키를 쥔 인물이 스탈린입니다. 해방 직후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열린 런던 외무장관회담과 스탈린의 대북한 비밀지령, 그리고 북한의 중국 팔로군 후방기지화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이해해야 비로소 수수께끼가 풀립니다. 북한이 중국 공산화의 후방지역, 내지는 연장지역으로 변한 상황에서 한반도의 남과 북이 합해 통일을 이룬다는 꿈은 춘몽(春夢)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될 경우 스탈린은 만주를, 그리고 나아가서 중국을 국민당과 미국에 넘겨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北朝鮮(북조선)에 遁入(둔입)한 中共軍(중공군) 경향신문 1946.11.10 1면


이승만은 당시 실권자가 아닌 유력 정치인 중의 한 명으로 개인적 견해를 표명한 것일 뿐이며, 미군정도 그 견해에 반대를 표명했고, 그 견해를 따라 일을 추진한 것도 아니므로, 그 후의 미소공동위원회에서도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남북이 분단 정권을 세우게 된 것이 이승만의 발언 때문이라는 것은 넌센스임.


김일성은 당시 이승만과 달리 북조선(임시)인민위원장으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므로 분단에 대한 책임을 져야함.


참고 자료


각주

  1. 1.0 1.1 <제40회 이승만 포럼> 원문으로 본 그 비밀의 정체 : 스탈린 지령문 "북한에 소련체제 이식은 이렇게 하라" New Daily 2014.06.24 : 스탈린 지령문 원문 이미지
    소련이 만든 북한, 아직도 붕괴 안 된 이유는…"돌연변이 공산주의 북한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New Daily 2014.06.21
  2. 2.0 2.1 <사설> 한국정치학회의 解放前後史 새로 쓰기 조선일보 2006.04.22 A31 면
  3. "北韓(북한)에 부르주아 民主政權(민주정권) 수립"스탈린,占領(점령) 蘇聯軍(소련군)에 비밀지령 문서 50년만에 공개 1993.02.26. 동아일보 6면
  4. 구소 북 장악음모 “결정적 자료”/쉬킨중장 비밀보고서 내용·의미 한국일보 1995.08.14
  5. 임시인민위원회 구성원 : 북한연표 해설목록 국사편찬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6. 北朝鮮臨時人民委員會 조직, 인민정부 진용 자유신문 1946년 02월 20일
  7. 북선위원회진용(鮮委員會陣容) 공업신문 1946.02.21 1면
    北朝鮮 臨時人民委員會 樹立, 委員長 委員二十五人等 部署決定 중앙신문, 1946.02.20
  8. “한국엔 잘못된 신앙 있다 스탈린의 북 단독정권 지령 자료 있는데도 인정 안 해” 중앙일보 2011.11.09 종합 1면
    스탈린 “북한, 중공군 후방기지로” 지령 … 분단, 돌이킬 수 없게 됐다 중앙일보 2011.11.09 종합 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