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번째 줄: 2번째 줄:


==남북 분단이 구체화되는 실제 과정==
==남북 분단이 구체화되는 실제 과정==
스탈린은 1945년 9월에 이미 소련군 점령지인 한반도 북부를 분할하여 별도 정부를 세운다는 명확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소련의 북한 단독정부 수립 계획과 실행===
===소련의 북한 단독정부 수립 계획과 실행===
<ul>
<ul>

2018년 9월 10일 (월) 10:38 판

남북의 분단이 구체화되는 과정은 소련 붕괴 후 발굴된 자료들에 의해 스탈린이 주도한 것이라는 사실이 명백히 밝혀졌음에도, 대다수 역사학자들이 소설가로 전락한 한국에서는 소련과 김일성에게는 면죄부를 주고, 책임을 이승만과 미국에 돌리고 있다. 교과서에도 이승만의 정읍 발언이 분단의 원인으로 나온다고 한다.[1][2] 이러한 주장의 이면에는 남한마저 공산화되어 김일성 일족의 노예가 되었어도 좋으니 통일정부를 수립했어야 하며, 국민주권과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정체성에는 아무런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통일지상주의가 자리잡고 있다. 한국이 공산화와 김일성 일족의 지배를 수용한다면 통일은 지금이라도 당장 가능하다. 그러나 왜 무턱대고 통일만 주장하고 소련과 김일성이 한 일들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지 의문이다.

남북 분단이 구체화되는 실제 과정

스탈린은 1945년 9월에 이미 소련군 점령지인 한반도 북부를 분할하여 별도 정부를 세운다는 명확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소련의 북한 단독정부 수립 계획과 실행

  • 1945년 9월 초 스탈린이 하바로프스크 88여단의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불러 면접하고 북한 지도자로 결정함. - 북한에 김일성을 지도자로 하는 정부를 만들겠다는 의도의 표출
    소련 관계자들의 믿을만한 증언이 있으나, 아직 문서적인 증거는 나오지 않음. 그러나 김일성이 해방 직후 9월 19일 입북하면서부터 소련군이 그를 지도자로 대접하고, 자신도 지도자 행세를 하고 다녔는데, 이런 일은 스탈린의 사전 결정이 없이는 불가능하므로 사실임이 명백함.

  •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이 "북한에 부르조아 민주국가를 만들라"는 비밀 지령을 내림.[3][1]
    지령문서는 스탈린(소련군 최고사령관)과 안토노프 軍(군)참모총장이 바실레프스키 극동전선 총사령관과 연해주 군관구 군사평의회, 제25군 군사평의회에 보냈던 1945년 9월 20일자 암호 전보[4][5]

  • 1945년 12월 25일 쉬킨 보고서[3][1][6] : 이오시프 쉬킨 (Iosif Shikin, 1906-1973)
    스탈린의 지령이 잘 이행되고 있지 않다고 평가. ‘북한의 반동(反動) 지주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토지개혁과 북조선 내 정권을 중앙집권화할 것을 스탈린에게 건의’

  • 1946년 1월 5일 소련의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협력을 거부한 민족 지도자 조만식(曺晩植, 1883 ~ 1950) 선생을 고려호텔에 연금하여 정치적으로 제거함.
    민족진영 인사들은 배제하고 북한에 공산정권을 세우겠다는 소련의 의지가 명백해짐.
    소련이 북한에 허용한 정당은 북조선공산당, 신민당(연안파), 천도교 청우당 등 3개이며 모두 소련에 순종하던 정당들임. 공산당과 신민당은 합당하여 노동당으로 됨.

  • 소련군정은 1946년 2월 9일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발족시켰다.[7] 사진의 현수막에 "(임시인민위원회)는 우리에 政府(정부)이다."라고 씌어 있다. 북한은 이미 단독의 임시정부를 만들어 토지개혁까지 실행했어도 소련은 남한을 직접 통치한 미국과 달리 조선인(김일성)을 내세워 간접통치를 했다고 찬양받는다. 하지만, 이승만은 남한 단독의 임시정부가 필요하다고 한 그의 발언이 실현되지도 않았는데도 분단의 원흉으로 몰린다. 이것이 한국 학계의 수준이다.
  • 1946년 2월 9일 사실상 북한 단독의 정부인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출범.[8][9][10][11]

  • 1946년 3월 5일 북한에서 쉬킨 보고서의 제안대로 토지개혁을 단행.
    "무상몰수·무상분배"라고 하나 농민은 토지의 소유권 아닌 경작권만 받았고, 지주에게 내던 소작료 대신 국가에 현물세를 내야 해서 거의 달라진 것이 없음.(6.25 이후에는 농민은 경작권마저 박탈당하고 협동농장 체제의 고용원으로 신분이 바뀜.[12])
    남북한은 이질적인 사회로 진행하고 통일정부 수립은 남한이 공산화를 받아들일 때만 가능하게 됨.


중국의 국공 내전이 한반도 분단에 미친 영향

1946년 5월 스탈린 “북한, 중공군 후방기지로” 지령

이정식 (李庭植, Chong-Sik Lee, 1931 ~ ) 전 펜실베이니아 대학 교수의 견해[13]

“국제사적 시야에서 한국현대사를 재조명해야 합니다. 해방정국은 우리 교과서에는 잘 보이지 않는 손이 뒤흔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잘 몰랐던 진실이 운명을 결정했습니다. 한반도 분단의 수수께끼는 소련의 세계정책의 변화를 통해 풀어낼 수 있습니다. 그 키를 쥔 인물이 스탈린입니다. 해방 직후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열린 런던 외무장관회담과 스탈린의 대북한 비밀지령, 그리고 북한의 중국 팔로군 후방기지화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이해해야 비로소 수수께끼가 풀립니다. 북한이 중국 공산화의 후방지역, 내지는 연장지역으로 변한 상황에서 한반도의 남과 북이 합해 통일을 이룬다는 꿈은 춘몽(春夢)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될 경우 스탈린은 만주를, 그리고 나아가서 중국을 국민당과 미국에 넘겨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내전에서 모택동의 중공군이 승리한 배경
일제가 지은 산업시설들이 몰려 있어 결정적으로 중요했던 만주를 두고 벌어진 국부군과의 쟁패전에서 패퇴하던 중공군이 북한을 후방 기지로하여 피난도 하고, 부상자 치료, 훈련, 보급품과 무기 조달 등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전세가 역전됨. 중공군은 만주에서의 역전 승리 후 불과 1년이 못되어 본토 전체를 석권함.[14][15] 이러한 배경 때문에 소련이 북한을 포기하고 통일정부를 세우도록 할 수가 없었음.

런던 외무장관 회담 : 1945년 9월

포츠담 선언 후 2차대전 전승국 외무장관들의 전후문제 처리 협의체 (Council of Foreign Ministers)를 만들고 여러 차례 외무장관 회담이 열림.
한반도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은 1945년 9월의 제1차 런던 회의와,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를 결의한 12월의 제2차 모스크바 회의 (소위 모스크바 3상 회의)임.
9월의 런던 회담에서는 한국문제는 논의되지 않았으나, 소련의 일본 홋카이도 분할요구나 리비아의 트리폴리 지역 할양 요구 등이 거부되자 미소관계가 급격히 악화되고, 소련은 중국 국공내전에서 장개석 지지를 포기하고 모택동 지지로 선회함. 북한을 중공군 지원 후방기지로 삼게 되며, 이것이 한반도 분단의 주요 요인이 됨.


전승국 외무장관 협의체 자료


국공 내전에 대한 국내 언론의 보도

아래와 같은 국공 내전에 대한 당시 국내 언론의 보도를 보면 소련과 북한이 중공군과 일심동체가 되어 도와주고 있었다는 것이 확인된다. 공식적인 중공 정부 수립 이전 내전 단계에서 중공군과 북한은 군사적인 동맹 수준의 유대를 맺고 있었다. 한반도 분단은 남북만의 문제가 아니라 중국 문제와도 깊숙히 관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소련이 미국과 전쟁을 벌여 남한까지 적화할 능력이 없었던 이상 남북통일 정부를 세운 뒤 북한을 포기한 채 물러날 수 있는 상황이 절대로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분단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사안들

남한 우파들의 반탁운동이 분단을 불렀다는 주장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의 정읍 발언이 분단의 원인이라는 주장

남한 단독의 임시정부 수립 필요성 제기한 발언.
이승만은 당시 실권자가 아닌 유력 정치인 중의 한 명으로 개인적 견해를 표명한 것일 뿐이며, 미군정도 그 견해에 반대를 표명했고, 그 견해를 따라 일을 추진한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 후의 미소공동위원회에서도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남북이 분단 정권을 세우게 된 것이 이승만의 발언 때문이라는 것은 넌센스임. 실권자도 아닌 이승만의 개인적 발언과 그 후 분단의 구체화 과정에는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음.
분단의 책임을 남한과 미국에 덮어씌우고, 소련과 김일성에게는 면죄부를 줄 구실만 찾다보니 당시 실권자도 아닌 이승만의 개인적 발언 때문에 분단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임.
당시 실권자도 아닌 이승만이 미국과 소련을 능가하는 초인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주장임.

김일성은 당시 이승만과 달리 북조선(임시)인민위원장으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므로 분단에 대한 책임을 져야함.

참고 자료


각주

  1. 1.0 1.1 1.2 <사설> 한국정치학회의 解放前後史 새로 쓰기 조선일보 2006.04.22 A31 면
  2. <사설> 한국정치학회의 ‘해방전후사 제대로 쓰기’ 조선일보 2006.12.11 A39 면
  3. 3.0 3.1 <제40회 이승만 포럼> 원문으로 본 그 비밀의 정체 : 스탈린 지령문 "북한에 소련체제 이식은 이렇게 하라" New Daily 2014.06.24 : 스탈린 지령문 원문 이미지
    소련이 만든 북한, 아직도 붕괴 안 된 이유는…"돌연변이 공산주의 북한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New Daily 2014.06.21
  4. "北韓(북한)에 부르주아 民主政權(민주정권) 수립"스탈린,占領(점령) 蘇聯軍(소련군)에 비밀지령 문서 50년만에 공개 1993.02.26. 동아일보 6면
  5. 극동의 소련군 : 우남위키
  6. 구소 북 장악음모 “결정적 자료”/쉬킨중장 비밀보고서 내용·의미 한국일보 1995.08.14
  7.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8. 임시인민위원회 구성원 : 북한연표 해설목록 국사편찬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9. 北朝鮮臨時人民委員會 조직, 인민정부 진용 자유신문 1946년 02월 20일
  10. 북선위원회진용(鮮委員會陣容) 공업신문 1946.02.21 1면
  11. 北朝鮮 臨時人民委員會 樹立, 委員長 委員二十五人等 部署決定 중앙신문, 1946.02.20
  12. 북한 협동농장 북한 지식사전 (통일부 북한정보 포털)
  13. 이정식 펜실베이니아대 교수의 인생 유전 중앙일보 2011.11.09 종합 4면
  14. 송재윤, <문혁춘추>3회. "1948 장춘 홀로코스트"(I) pennmike 2018-01-14
    송재윤, <문혁춘추>4회. "1948 장춘 홀로코스트"(II) pennmike 2018-01-19
  15. 송재윤, <문혁춘추 : 현대중국의 슬픈 역사> 5회. "해방, 인민을 삼켜버린" pennmike 2018.01.30
    송재윤, <문혁춘추 : 현대중국의 슬픈 역사> 6회. "인민해방군과 인해전술" pennmike 2018.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