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절필동(萬折必東)은 ‘황하(黃河)가 만 번 굽이쳐도 결국은 동(東)으로 간다’는 뜻으로, 《순자(荀子)》의 【유좌편(宥坐篇)】에 나오는 말이다. 원래는 뜻이 굳은 사람은 이를 반드시 관철시킨다는 의미로 쓰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후기에 현실은 청나라를 섬길 수 밖에 없지만,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저버릴 수 없다는 의미로 쓰였다.
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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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시대 순자(荀子)에 나오는 ‘황하(黃河)가 만 번 굽이쳐도 결국은 동(東)으로 간다’는 뜻(荀子·宥坐 以出以入,以就鮮絜,似善化。其萬折也必東,似志。是故見大水必觀焉。)이다.[1] 본래 중국에서는 변하지 않는 충신의 절개를 빗댄 용어로 쓰여 졌다.[2]
- 조선에서는 명나라가 망한 뒤 현실적으로 청나라를 섬기고 있지만 명나라에 대한 의리는 저버릴 수 없다는 의미로 쓰던 말이었다.
“‘청주 화양동의 만동사우는 누가 주관하는가? 우리나라를 떠도는 황조 사람 중에서 전가 외에 거두어서 쓸 만한 다른 사람이 또 있는지를 물어서 아뢰라.’라고 명을 내리셨습니다. 한 칸의 초옥에서 주 소왕(周昭王)을 제사 지냈던 뜻으로,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이 만동사(萬東祠)를 지어 신종황제(神宗皇帝)를 제사 지내고서 ‘중국에 대한 절의는 변함이 없다[萬折必東]’라는 뜻을 붙이려 했으나 실행하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죽음에 임박했을 때에 선정신 권상하(權尙夏)에게 이 일을 부탁하였는데, 갑신년(1704, 숙종30) 연간에 비로소 창설되어 권상하가 그대로 주관하였으며 이후에는 호서(湖西)의 사림들이 서로 돌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황조(皇朝) 사람으로 쓸 만한 자를 두 전조(銓曹)에 물으니 전가 외에 전 현령 이동배(李東培), 전 만호 이면(李葂)이 모두 이여매(李如梅)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洪好人啓曰, 淸州華陽洞萬東祠宇, 誰其主管? 皇朝人流落我國者, 田哥外, 又有他收用者乎? 問啓事, 命下矣。先正臣宋時烈, 以一間茅屋, 祭昭王之義, 欲爲營立萬東祠, 以祀神宗皇帝, 以寓萬折必東之意而未果。臨終時, 屬託於先正臣權尙夏, 甲申年間, 始得創設, 權尙夏仍爲主張, 伊後湖西士林, 相與看護, 而皇朝人收用者, 問於兩銓, 則田哥外, 前縣令李東培·前萬戶李葂, 俱是李如梅之後耶云矣, 敢啓。傳曰, 知道。]
- 만절필동(萬折必東)’은 황하(黃河)가 굽이굽이 흘러서 결국은 동쪽 황해(黃海)로 흘러든다는 뜻인데, 명(明)나라가 망한 뒤에 조선에서 현실적으로 청(靑)나라를 섬기고는 있지만 명나라에 대한 의리는 저버릴 수 없다는 뜻으로 쓰이는 말이었다.
- [만물상] 萬折必東(만절필동) 조선일보 2017.12.18
- [e글중심] 만절필동(萬折必東), 진짜 뜻은? 중앙일보 2017.12.18
만절필동 재조번방(萬折必東 再造蕃邦)
- '만절필동 재조번방(萬折必東 再造蕃邦)' : 경기도 가평군 하면 대보리 조종암(朝宗巖)의 각자로 조선 선조(宣祖)의 글씨임.
- 조선 숙종 10년(1684) 당시 경기도 가평군수 이제두(李齊杜, 1626~1687)가 숭명배청(崇明排淸)의 취지로 새겼다. 만절필동(萬折必東)은 '황하는 아무리 굽이가 많아도 반드시 동쪽으로 들어간다는 뜻으로, 충신의 절개는 꺾을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이나 의미가 확대되어 천자를 향한 제후들의 충성을 말한다. 재조번방(再造蕃邦)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구원병을 보내 조선(蕃邦)을 구해냈다(再造)는 의미이다.[3]
논란
- 유식이 문제…방명록 글귀로 혼쭐나는 노영민 주중대사 opinionnews 2017.12.17
- 중국 천자에 충성 약속하는 의미의 ‘만절필동’(萬折必東) 글귀 논란
웬만큼 한자를 공부해도 ‘만절필동’의 뜻을 이해하기 힘들다. 그 의미를 최진석 교수가 찾아낸 것이다.
이에 바른정당 하태경 의원이 이 글이 부적절하다며 노영민 대사의 경질을 요구하고 나섰다.- ↑ 荀子卷第二十 宥坐篇第二十八
- ↑ 만절필동의 의미 세종데일리 2017.12.22
- ↑ 재조지은(再造之恩) 위키 실록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