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자. 남로당 총책. 월북. 사형


신탁통치 반대에서 찬성으로 돌변

1945년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信託統治反對國民總動員委員會)」에 박헌영도 홍명희(洪命憙) 등과 함께 참여하여 중앙위원이 되었고[1], 이튿날인 31일 상무위원(常務委員)에 선정되었다.[2] 12월 29일의 경교장 모임에 참석했던 강원룡 목사의 증언도 있으므로 박헌영의 참여는 사실로 보인다.[3]

하지 장군이 박헌영을 1946년 1월 1일 만났을 때는 강경한 반탁 입장이었으나 1월 3일 다시 만났을 때는 입장이 정반대로 바뀌어 있었다고 하였다.[4].

1월 2일 공산당중앙위원회가 모스크바 3상회의 합의사항을 지지(찬탁)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책임비서 박헌영이 주도했을 것이다.[5][6]

이날을 기준으로 모든 좌파들이 연말의 반탁에서 찬탁으로 입장을 표변하였다[7] 1월 3일 예고된 좌익들의 반탁집회가 당일날 지도부에 의해 찬탁집회로 변경되어 일대 혼란이 벌어졌다.

이런 당시 기록들로 보아 박헌영이 신탁통치에 대한 소련의 뜻을 파악하려고 12월 28일 밤 비밀리에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가서 지침을 받고, 신년 행사에 참석한 후 1월 1일 밤 3.8선을 넘어 서울로 귀환했다고 하는 전 노동당 간부 (1922년) 박병엽(朴炳燁, 1922 ~ 1998)의 증언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8][9]

당시 서울의 소련 부영사였던 아나톨리 샤브신의 부인이자 영사관 도서관장이었던 샤브시나(쿨리코바)도 1990년대에 당시 박헌영이 46년 1월 초 평양으로 가서 신탁통치에 대한 지령을 받고 왔다고 증언하였다.[10]

박병엽이나 샤브시나 모두 믿을만한 사람으로 여겨지지만, 두 사람이 증언하는 박헌영의 방북 일자가 서로 어긋나고, 연말이든 연초든 박헌영이 방북했다는 것 자체가 당시 기록과 맞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연말 연초에 박헌영은 계속 서울에 있었고, 찬탁으로 입장이 바뀐 1월 1일부터 2일 사이에 어떤 경로로든 소련의 의사를 전달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의 조선공산당은 여러 경로로 소련의 지시를 받고 있었다[11].

소련이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선택한 것이 명백해지자 1946년 이른 봄에는 남한에서도 김일성의 영향력이 박헌영을 뛰어넘게 된다.[12]

북한 소련군정 총지휘자 스티코프와의 관계

스티코프는 연해주 군관구 군사위원으로 북한 소련군정 총지휘자였는데, 박헌영 등 남한의 공산주의자들도 수시로 그의 지령을 받고 있었다. 2004년 국사편찬위원회가 간행한 ≪스티코프 일기≫[13] 에 의하면 박헌영은 1946년 10월 7일 관 속에 들어가 북한으로 탈출했고, 수시로 스티코프에게 행동 지침을 내려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도 소련이 자신들의 대리인으로 선택하여 내세운 김일성 못지 않게 소련의 지시를 따르는 사람인 것이 드러난다.

  • 쉬띄꼬프일기 Ⅰ부 1946년 9월 9일
    남조선 정세를 검토하고 [남조선 좌파에 대한] 지원 대책을 강구한다.
    로동당의 당원 수는 약 40만 명이다.(377,000명) 합당이 임시적인 조치라는 말들이 계속되고 있다. 이론적인 문제들에서 명확하지 못한 점들이 많다.
    박헌영은 당이 사회단체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
    1946년 9월 8일자 서울의 라디오방송 보도에 의하면 박헌영과 이주하(공산당 제2비서) 및 이강국(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 사무국장)은 법률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박헌영 등에 대한 체포령을 말함)

  • 쉬띄꼬프 일기 Ⅰ부 > 1946년 10월 7일
    이그나찌예프가 보고하다. 1946년 10월 6일 박헌영이 남조선을 탈출하여 북조선에 도착했다. 박헌영은 9월 29일부터 산악을 헤매며 방황했는데, 그를 관에 넣어 옮겼다. 박헌영이 휴식을 취하게 하라고 지시를 내리다.

  • 쉬띄꼬프 일기 Ⅱ부 > 1946년 12월 25일
    박헌영이 김규식에 대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묻고 있다. 그는 이승만과 김구의 정체를 대중 앞에 폭로한 것처럼 김규식의 정체도 폭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흥분하지 말고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고 지시하다. 구체적인 자료를 통해 그의 옳지 못한 결정들을 근거로 폭로해야 한다고 조언하다.


서울의 소련 부영사 아나톨리 샤브신과의 관계

아나톨리 샤브신과 그의 부인이자 영사관 도서관장이었던 파냐 이사악꼬브나 샤브시나(쿨리코바)

미군정이 기록한 주한미군사에 의하면 샤브신은 그의 한국인 친구에게 박헌영은 자신의 심복(henchman)이라 했다고 한다.[12]


박헌영에 대한 평가


박헌영 관련 증언


각주

  1.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 선임 : 1945년 12월 30일 서울신문 1946년 01월 01일 (국사편찬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印은 常任委員) ▲洪命憙 ..▲洪南杓 ▲朴憲永 등 포함
  2.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31일 >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파업단행과 상무위원 선정 동아일보 1946년 01월 01일 (국사편찬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洪命憙, ...洪南杓 朴憲永 金若水..
    南北朝鮮, 左右一致, 行動方針을 討議 決定, 反託總動員中央委員會 중앙신문 1946.01.01 상임위원 : 21명중 洪命憙, 朴憲永 있음.
  3. <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1부>(17) 삼상회의 보도 동아일보 2004-12-12
  4. Radio TFGBI #157, Telegram from CG USAFIK to CINCAFPAC 25 Jan. 1946
    Radio TFGBI #157, Telegram from CG USAFIK to CINCAFPAC ; 25 Jan. 1946
  5.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6년 01월 02일 > 조공, 3상회담 결의에 지지 표명 중앙신문 1946년 01월 03일
    反託보다 먼저 戰線 統一, 朝鮮共産黨中央委員會 態度 表明. 중앙신문, 1946.01.03
  6. 託治(탁치)는 國際協力(국제협력) 朝共(조공)의 態度表明(태도표명) : 1월 2일 동아일보 1946-01-05 1면
  7.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6년 01월 02일 > 인공 중앙인민위원회, 3상회의 결정 지지 전문 보냄 조선일보 1946년 01월 04일
  8. (1922년) 박병엽(朴炳燁, 1922 ~ 1998) 구술, 유영구-정창현 엮음,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선인, 2010) pp. 27~34
  9. 孫世一의 비교 評傳 (84)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 信託統治反對鬪爭을 ‘새로운 獨立運動’으로 월간조선 2011년 3월호
  10. 박헌영의 정치노선:상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37) 중앙일보 1992.02.06 종합 11면
    박헌영의 정치노선:하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38) 소의 「찬탁」지지에 겉으로만 따르는 척/남쪽 정세 불리하자 김일성 지지 선회“중위세력 손잡고 사회주의로 통일” 중앙일보 1992.02.10 종합 11면
  11. Telegram TFGBI #176 from CG USAFIK to CINCAFPAC 1946-01-30 하지 장군이 맥아더 사령부에 보낸 1946년 1월 30일자 전문.
    미군정청 USAFIK G-2 Weekly Summary #32, 23 Apr. 1946, Incl. #2. 조선공산당이 소련 지시를 받는 문헌적 증거 입수
  12. 12.0 12.1 주한미군사 2 > 2부. 1장. 한국의 정치와 사람들, 첫 6개월 > 2. 공산당 국사편찬위원회
  13. 해외사료총서 10권 쉬띄꼬프 일기 (전현수 번역) 국사편찬위원회, 2004년 12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