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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은 여러 가지 만행을 저질렀다. 8월 25일에 점령군인 소련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포고문|치스차코프는 포고문을 발표]]하고 자신들이 해방군인양 선전했지만, 실제로는 양민에 대한 무차별 약탈과 부녀자 강간이 일상적으로 일어났고, 일제가 지은 발전소, 공장 등 산업시설을 해체하여 소련으로 반출하고, 쌀등의 식량도 가져갔다.
1945년 8월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은 여러 가지 만행을 저질렀다. 8월 25일에 점령군인 소련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포고문|치스차코프는 포고문을 발표]]하고 자신들이 해방군인양 선전했지만, 실제로는 양민에 대한 무차별 약탈과 부녀자 강간이 일상적으로 일어났고, 일제가 지은 발전소, 공장 등 산업시설을 해체하여 소련으로 반출하고, 쌀 등의 식량도 가져갔다.
무수히 많은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처형하거나 시베리아로 끌고 갔다. 김일성은 이런 일을 뻔히 보면서도 아무런 항의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소련의 산업설비 반출에 협력하기도 했는데, 스탈린에 의해 소련의 대리인으로 발탁된 인물의 한계를 보여준다.
무수히 많은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처형하거나 시베리아로 끌고 갔다. 김일성은 이런 일을 뻔히 보면서도 아무런 항의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소련의 산업설비 반출에 협력하기도 했는데, 스탈린에 의해 소련의 대리인으로 발탁된 인물의 한계를 보여준다.



2018년 9월 3일 (월) 19:0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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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은 여러 가지 만행을 저질렀다. 8월 25일에 점령군인 소련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는 포고문을 발표하고 자신들이 해방군인양 선전했지만, 실제로는 양민에 대한 무차별 약탈과 부녀자 강간이 일상적으로 일어났고, 일제가 지은 발전소, 공장 등 산업시설을 해체하여 소련으로 반출하고, 쌀 등의 식량도 가져갔다. 무수히 많은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처형하거나 시베리아로 끌고 갔다. 김일성은 이런 일을 뻔히 보면서도 아무런 항의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소련의 산업설비 반출에 협력하기도 했는데, 스탈린에 의해 소련의 대리인으로 발탁된 인물의 한계를 보여준다.

당시 사정을 기록한 문헌으로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다.


소련군 중좌 페드로프가 연해주군관구 군사위원 스티코프 상장에게 올린 보고서

2010년에는 1945년 12월 29일 소련군 중좌 페드로프가 소련군 진주 후 북한의 황해도와 평안남북도 등 3개도를 방문조사한 뒤 만든 총 13p 분량의 보고서가 공개되었는데, 보고서 내용에는 258 소총사단장 드미트리예프 대좌는 “조선사람은 35년간 노예로 있었다. 좀 더 노예로 있게 하자”는 말도 남겼다고 보고서는 기록하고 있다.



소련군의 산업설비 반출에 대한 김일성의 협력

  • G-2 Periodic Report : 1946.02.18 미군 정보참모부(G-2) 보고서
    김일성 중심의 임시인민위원회 구성 소식; 조만식의 구금.
    미소위원회가 평양서 열리는 줄로 잘못알고 북한 다녀온 기자의 현지 사정 증언: 1월 3일 학생, 근로자 4,000여명 동원한 평양의 관제 찬탁 데모.- 처음에는 독립시위로 속임. 북한 주민의 공산당 지지율 20% 미만.
    소련군이 수풍댐(Sui-ho Dam)에서 철거한 발전시설을 선박으로 실어가기 위해 청진으로 수송할 수 있도록 평양 철도 관리국장 김원걸 및 기술자 10여명을 현지로 파견하여 선로 연결 작업을 시킴.
  • 美軍政 情報報告書 - 駐韓美陸軍司令部惰報參謀部 日日報告書 - 第2卷 (1946. 2-1946. 7) 國土統-院 : p.91에 평양 철도국장 김원걸이 수풍댐 갔다는 부분 나옴.
    (4) 그 신문기자가 보낸 계속된 보고는 소련군이 수이호 댐 (수풍동(800-1990))에서 발전기를 제거하고 있으며 이를 청진(1250 - 2150)항을 거쳐 운반하고 있다고 한다. 평양의 철도 보수국장인 김원걸 (KIM, Won Gul)이 10명의 기술자와 함께 수이호 댐으로 갔는데 이는 이 기계가 철도로 운반될 수 있도록 철도 운반도를 마련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어서 였다.


윤하영 / 한경직 목사가 미군정청에 제출한 청원서

광복 직후 소련군 만행 폭로…故 한경직 목사 ‘비밀청원서’ 발견돼 중앙일보 2017.08.16
故 한경직 목사가 증언한 해방 후 북한, '비밀청원서' 발견 YTN 2017-08-16
RG 59, Central Files, The Decimal File, 1910-63, 740.00119, Control(Korea) Series, 1945.10-1945.12, Attitudes towards Occupation Forces in Korea
pp.1~7 한경직/윤하영 목사의 청원서 KyungJik Han / Ha Young Yoon


소련군의 만행에 대한 증언


소련은 조선독립운동을 일본보다 더 잔인하게 탄압한 국가

북한을 점령하고 해방군이라 자처하던 소련은 사실은 조선독립운동을 일본보다 더 잔인하게 박해한 나라이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이 해방군이 되기에는 이미 한국인들에게 저지른 원죄가 너무 컸다.

  • 자유시 참변(自由市慘變) 1921년 6월
    민족계열 조선인 항일무장투사들을 자유시로 유인하여 1천여명 가까이 몰살시켜 만주와 연해주에서의 무장투쟁의 맥이 끊어지다시피 했다.

  • 고려인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1937년 가을
    연해주의 조선인 지도자급 인사 2천여명을 처형하고, 17만 여명을 강제로 중앙아시아로 실어가 허허벌판에 내팽개쳐 첫해 겨울에 추위와 굶주림으로 1/3 이 숨졌다.[1][2] 이로인해 연해주에서의 조선독립운동은 완전히 말살되었다. 저명한 홍범도(洪範圖, 1868~1943) 장군과 진짜 김일성 장군으로 불리는 김광서(金光瑞, 1888~1942) 장군도 그 대표적 피해자이다.
    김일성이 한 때 머물던 남야영이 있었고, 김정일이 태어난 출생지인 라즈돌노예 마을의 기차역은 당시 한인들을 강제로 중앙아시아로 실어나르던 출발지였다.

    아래는 강제이주 피해 당사자의 한 명인, 북한 문화선전성 부상을 지낸 소련의 고려인 정상진(鄭尙進, 1918~2013)의 당시 일에 대한 증언이다.[3]
    1937년은 그 꿈이 박살난 해였다. 그해 8월부터 소련 NKVD(내무인민위원부·KGB의 前身)는 연해주 조선인 인텔리들을 무차별 체포, 처형하기 시작했다. 한 달 뒤에 시작될 강제이주의 事前(사전) 포석이었다. 소련작가동맹의 유일한 조선인 문학가이면서 소련 국적 취득을 한사코 거부했던 소설가 조명희(趙明熙)도, 어린 정상진(鄭尙進)에게 항일정신을 일깨워 줬던 아버지 정치문도 체포돼 총살당했다. 조선인 인텔리 2800여 명이 재판 없이 처형됐다.
     그가 아버지의 처형 사실을 확인한 것은 1955년 북한에 있을 때였다. 부친의 묘소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NKVD가 처형자들을 한꺼번에 묻었다는 소문만 들었을 뿐이다. 
     
     
     카자흐人들의 친절
     
    
     1937년 9월25일, 연해주 페르바야 레츠카驛(역)에서 조선인 강제이주가 시작됐다. 「연해주 거주 고려인(러시아 시절부터 그곳에 거주하는 韓人들을 일컫던 말)들이 日帝와 내통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조선사범大, 조선사범전문학교, 사범노동학원, 사범기술학교, 4개의 고급중학교(고등학교), 8개 초급중학교(중학교), 23개 인민학교(초등학교) 학생들, 교직원 및 그 가족들이 첫 이주대상자였다. 조선극장, 조선어라디오방송국, 선봉신문사 등 문화기관 직원과 가족들도 함께였다. 
     
     이들은 열차 32량에 가축처럼 실려 한 달 뒤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에 도착했다. 鄭옹은 『그래도 우리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고 말한다. 그들보다 나중에 연해주를 출발한 열차에 탄 사람들은 열차사고와 추위 등으로 수없이 죽었는데, 그들이 탄 열차에서는 인명피해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내던져진 땅은 불모의 땅이었다. 鄭尙進의 회고다.
     
     『열차에서 내린 여자들은 주저앉아 통곡했어요.「죽으라고, 우리보고 죽으라고 이런 땅으로 보낸 거야」라면서….
     
     그때 나귀에 빵을 가득 싣고서 카자흐 여인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이름 모를 민족이 황야에 버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빵을 구워서 식을세라 모포에 덮어 가지고 달려온 것입니다. 그 빵을 아이들에게 먹이며 조선 어머니들은 다시 통곡했고, 카자흐 아낙들도 그 모습을 보면서 울었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젖어들었다.
     
     『카자흐 사람들, 참 마음씨가 고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아니었으면 우리들은 다 죽었을 겁니다. 우리 민족은 그 고마움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주 첫해에 추위와 굶주림, 풍토병으로 2만~3만 명이 죽었다. 청년 鄭尙進은 잃어버린 친척들을 찾으러 고려인 마을들을 돌아다니면서 매일같이 장례가 치러지는 것을 보았다.


소련이 대우한 유일한 조선인 그룹은 1940~1941년간 만주에서 소련으로 도피한 김일성을 비롯한 동북항일연군의 조선인 빨치산들 뿐이다. 이들은 장차 일본과 전쟁이 벌어지고 조선을 점령할 경우에 이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수용한 것이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