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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으로 인해 [[대한민국 정부]]는 긴급 안보관계장관회의를 소집하였다. 후속조치로 [[이명박]] 대통령은 25일 안보경제점검회의에서 "교전수칙을 수정하여 민간인이 공격 받을 시 더욱 강력한 대응방안을 강구함과 동시에 서해 5도의 군전력 증강"을 지시하면서 국방력 강화를 통해 자국민 보호에 만전을 기할 것을 주문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대한민국 정부]]는 긴급 안보관계장관회의를 소집하였다. 후속조치로 [[이명박]] 대통령은 25일 안보경제점검회의에서 "교전수칙을 수정하여 민간인이 공격 받을 시 더욱 강력한 대응방안을 강구함과 동시에 서해 5도의 군전력 증강"을 지시하면서 국방력 강화를 통해 자국민 보호에 만전을 기할 것을 주문하였다.
== 피해 규모 ==
=== 대한민국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발사한 포탄중에는 인명살상용으로 사용되는 방사포, 열압력탄이 포함되어 있었다. 열압력탄은 공중에서 터지면서 작은 파편들로 퍼지기 때문에 조선인민군이 의도적으로 인명을 살상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는 분석이 제기되었다.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은 연평도에서 복무하던 해병대원 2명이 전사하고 민간인 2명이 사망하였으며, 민간인 3명과 [[대한민국 해병대|해병대]]원 16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밖에도 주택 12동이 대파되었고 25동은 불에 탔으며, 차량 3대와 컨테이너 박스도 여러 채 파괴되었다. 연평도의 [[집|가옥]]들 19채가 파손되고 불에 탔으며, 산불이 발생했다.
[[2010년]] [[11월 27일]] 오전 10시 국군수도병원에서 전사한 해병대원의 장례가 해병대장으로 치러졌다. 영결식 이후 성남 시립화장장으로 운구돼 화장된 뒤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며 [[화랑무공훈장]]이 추서되었다.
대한민국 경제도 영향을 받았다. 포격 당일 소식이 알려진 것은 거래소 시장이 마감된 이후였기 때문에 주가가 영향을 받지는 않았지만, 미국 현지에서 거래되던 환율은 40원이나 폭등(원화절하)하기도 했다. 다음날 주가가 하락하였으나, 이는 유럽증시의 악재에 의한 이유가 더 큰 것으로, 연평도 포격사건에 의한 주가영향은 막대한 정도는 아닐것으로 분석됐다. 최초 단기적으로 충격은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분석됐으나, 북한 리스크 학습효과로 증시는 포격 이틀만인 25일 상승 마감하면서 경제적으로는 큰 타격은 없이 마무리 되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연평도 주둔 [[대한민국 해병대]]의 대응 사격으로 [[조선인민군]]도 1명이 죽고 2명이 중상을 입었다는 보도와 함께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위원(부총리급)인 [[다이빙궈]]는 이명박 대통령과의 면담시 조선인민군이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고 언급하였으나 정확한 피해 상황은 자유아시아 방송과 중국의 CCTV, 4군단 출신 탈북자에 의해 밝혀졌다. 피해 상황에 대한 당국의 공식 입장발표는 없었다. 그러나 [[평안북도]] 대북소식통에 따르면 "지난달 23일에 조선인민군의 연평도 포격 도발에 대한 대한민국 국군의 반격으로 군부대 막사는 물론이고 다른 일반인 주택들도 상당히 파괴됐으며, 특히 민간인들을 방패로 세워 군 기지를 보호하고 있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국의 비인도적인 처사로 인해 상당수의 민가가 파괴됐으나, 북한 당국이 포격도발을 하기전에 민간인은 모두 피신시켰기 때문에 인명피해는 없었다"고 말했다.
군 당국 고위관계자는 [[이명박]] 대통령에 보고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피해상황이 담긴 위성사진이 있었다고 증언하며 "K-9 자주포의 포격으로 생긴 커다란 웅덩이들과 부서진 시설물 등의 모습이 담겨 있다"며 "무도·개머리 지역에 화재가 발생했고 개머리 진지에는 우리 포탄에 맞은 다수의 흔적이 식별됐으며 무도 지역에서도 교통호(진지와 진지 사이를 오갈 수 있도록 파놓은 좁은 길)가 매몰됐다"고 밝혔으나, 일부 언론에서는 12월 1일 공개된 북측 피해상황이 담긴 위성사진에서 대부분 포격 진지에서 빗나갔으며, 14발은 논밭에 떨어져있는 흔적이 있어 실질적인 피해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12월 4일 일본의 교도통신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관계자가 대한민국의 대응 포격으로 인한 사상자와 관련 "4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대한민국보다 몇 배 많았다"고 밝혔다고 보도 함으로써 아직까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피해상황에 대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
2012년 3월 2일에 [[자유아시아방송]]이 연평도 포격에서 [[조선인민군]] 군인 10명이 사망하고 30명이 부상했다는 소식을 대대장으로부터 들었다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황해남도의 한 소식통의 주장을 인용하여 보도했다.

2018년 8월 21일 (화) 16:24 판

연평도 포격사건(延坪島 砲擊)은 2010년 11월 23일 오후 2시 30분 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대한민국 인천광역시 옹진군 연평면대연평도를 향해 포격을 가한 사건이다. 이에 대한민국 해병대는 피격 직후 대응사격을 가하였으며 대한민국 국군서해 5도진돗개 하나를 발령한 뒤, 곧 전군으로 진돗개 하나를 확대 발령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대한민국의 해병대원 전사자 2명, 군인 중경상 16명, 민간인 사망자 2명, 민간인 중경상 3명의 인명 피해와 각종 시설 및 가옥 파괴로 재산 피해를 입었다.

한국 전쟁휴전 협정 이후 조선인민군이 대한민국의 영토를 직접 타격하여 민간인사망한 최초의 사건으로 국제 사회의 큰 관심을 끌었으며, 당시 국제 사회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규탄했으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정당한 군사적 대응이었으며 전적인 책임은 대한민국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천안함 피격사건에 이어 8개월 만에 벌어진 이 사건으로 인해 양측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개요

2010년 11월 23일 8시 20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남북장성급군사회담 북측 단장 명의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측 영해에 대한 포 사격이 이루어질 경우 즉각적인 물리적 조치를 경고한다"는 통지문을 발송했다. 대한민국 국방부에서는 훈련중단 요청을 거절하고 예정대로 훈련을 진행하였다.

10시 15분부터 14시 24분까지 4시간 동안, 연평도 주둔 해병대가 3,657발의 사격 훈련을 했다.

연평도 해병대의 포격 훈련이 종료된지 10분 후인 14시 34분에 조선인민군은 76.2mm 평사포, 122mm 대구경 포, 130mm 대구경 포 등을 이용해 연평도 군부대 및 인근 민가를 향해 개머리 해안부근 해안포기지로부터 무차별 포격을 시작하였다.

조선인민군의 최초 포격이 있자, 해병대 자주포 부대는 K9 자주포들을 대피시설인 포상 내부로 일단 숨기고 나머지 해병들도 대피호로 대피하였다. 이후 적의 1차 포격이 잠잠해지자 K-9다시 이동시켜서 첫 피격이 있은지 13분 후인 14시 47분경부터 대응 포격을 시작해서, 북측의 무도 포진지쪽에 50발, 개머리 포진지쪽에 30발 총 80여발을 발사하였다.

대한민국 공군은 14시 38분에 KF-16 2대를 긴급 출격시키고, 이후 추가로 KF-16 2대와 F-15K 4대를 출격시켰다. 15시 41분, 조선인민군의 공격이 중단되었다. 조선인민군측에서 모두 170여발이 발사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한편, 백령도 부근 조선인민군 해안포 기지에서의 해안포 입구 개방이 확인되기도 하였으나, 공격은 계속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대한민국 정부는 긴급 안보관계장관회의를 소집하였다. 후속조치로 이명박 대통령은 25일 안보경제점검회의에서 "교전수칙을 수정하여 민간인이 공격 받을 시 더욱 강력한 대응방안을 강구함과 동시에 서해 5도의 군전력 증강"을 지시하면서 국방력 강화를 통해 자국민 보호에 만전을 기할 것을 주문하였다.

피해 규모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발사한 포탄중에는 인명살상용으로 사용되는 방사포, 열압력탄이 포함되어 있었다. 열압력탄은 공중에서 터지면서 작은 파편들로 퍼지기 때문에 조선인민군이 의도적으로 인명을 살상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는 분석이 제기되었다.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은 연평도에서 복무하던 해병대원 2명이 전사하고 민간인 2명이 사망하였으며, 민간인 3명과 해병대원 16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밖에도 주택 12동이 대파되었고 25동은 불에 탔으며, 차량 3대와 컨테이너 박스도 여러 채 파괴되었다. 연평도의 가옥들 19채가 파손되고 불에 탔으며, 산불이 발생했다.

2010년 11월 27일 오전 10시 국군수도병원에서 전사한 해병대원의 장례가 해병대장으로 치러졌다. 영결식 이후 성남 시립화장장으로 운구돼 화장된 뒤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며 화랑무공훈장이 추서되었다.

대한민국 경제도 영향을 받았다. 포격 당일 소식이 알려진 것은 거래소 시장이 마감된 이후였기 때문에 주가가 영향을 받지는 않았지만, 미국 현지에서 거래되던 환율은 40원이나 폭등(원화절하)하기도 했다. 다음날 주가가 하락하였으나, 이는 유럽증시의 악재에 의한 이유가 더 큰 것으로, 연평도 포격사건에 의한 주가영향은 막대한 정도는 아닐것으로 분석됐다. 최초 단기적으로 충격은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분석됐으나, 북한 리스크 학습효과로 증시는 포격 이틀만인 25일 상승 마감하면서 경제적으로는 큰 타격은 없이 마무리 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연평도 주둔 대한민국 해병대의 대응 사격으로 조선인민군도 1명이 죽고 2명이 중상을 입었다는 보도와 함께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위원(부총리급)인 다이빙궈는 이명박 대통령과의 면담시 조선인민군이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고 언급하였으나 정확한 피해 상황은 자유아시아 방송과 중국의 CCTV, 4군단 출신 탈북자에 의해 밝혀졌다. 피해 상황에 대한 당국의 공식 입장발표는 없었다. 그러나 평안북도 대북소식통에 따르면 "지난달 23일에 조선인민군의 연평도 포격 도발에 대한 대한민국 국군의 반격으로 군부대 막사는 물론이고 다른 일반인 주택들도 상당히 파괴됐으며, 특히 민간인들을 방패로 세워 군 기지를 보호하고 있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국의 비인도적인 처사로 인해 상당수의 민가가 파괴됐으나, 북한 당국이 포격도발을 하기전에 민간인은 모두 피신시켰기 때문에 인명피해는 없었다"고 말했다.

군 당국 고위관계자는 이명박 대통령에 보고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피해상황이 담긴 위성사진이 있었다고 증언하며 "K-9 자주포의 포격으로 생긴 커다란 웅덩이들과 부서진 시설물 등의 모습이 담겨 있다"며 "무도·개머리 지역에 화재가 발생했고 개머리 진지에는 우리 포탄에 맞은 다수의 흔적이 식별됐으며 무도 지역에서도 교통호(진지와 진지 사이를 오갈 수 있도록 파놓은 좁은 길)가 매몰됐다"고 밝혔으나, 일부 언론에서는 12월 1일 공개된 북측 피해상황이 담긴 위성사진에서 대부분 포격 진지에서 빗나갔으며, 14발은 논밭에 떨어져있는 흔적이 있어 실질적인 피해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12월 4일 일본의 교도통신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관계자가 대한민국의 대응 포격으로 인한 사상자와 관련 "4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대한민국보다 몇 배 많았다"고 밝혔다고 보도 함으로써 아직까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피해상황에 대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

2012년 3월 2일에 자유아시아방송이 연평도 포격에서 조선인민군 군인 10명이 사망하고 30명이 부상했다는 소식을 대대장으로부터 들었다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황해남도의 한 소식통의 주장을 인용하여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