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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으로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 쓰여졌던 그 당시 유럽의 상황. 히틀러의 나치즘이 1930년대 중반에 출현하고 점점 국가와 사회를 장악한다. 그것도 철저하게 민주적인 방법으로 히틀러는 정권을 잡았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파시즘. 그리고 공산주의. 물론 공산주의와 나치즘은 대척점이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나치즘을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는 나치즘을 방관했는데 그 이유는 공산주의자들은 나치즘은 결국 망하게 되어있고 오히려 공산주의의 필요성을 더욱 보여주는 그런 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 쓰여졌던 그 당시 유럽의 상황. 히틀러의 나치즘이 1930년대 중반에 출현하고 점점 국가와 사회를 장악한다. 그것도 철저하게 민주적인 방법으로 히틀러는 정권을 잡았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파시즘. 그리고 공산주의. 물론 공산주의와 나치즘은 대척점이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나치즘을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는 나치즘을 방관했는데 그 이유는 공산주의자들은 나치즘은 결국 망하게 되어있고 오히려 공산주의의 필요성을 더욱 보여주는 그런 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퍼는 그 당시에 준동하고 있던 히틀러의 나치즘이나 파시즘이나 공산주의가 유럽의 암흑기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이건 나쁜 것이다. 이 2~3가지 조류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은 전체주의라고 하는 것이다. 전체주의가 정치적으로 표현된 것이 나치즘, 파시즘, 공산주의라는 것이고 그것을 포퍼는 닫힌 사회라고 불렀다.
포퍼는 그 당시에 준동하고 있던 히틀러의 나치즘이나 파시즘이나 공산주의가 모두 유럽의 암흑기를 초래하고 있다고 보고 1938년 열린사회와 그 적들을 쓰기 시작한다. 이건 나쁜 것이다. 이 조류들의 가장 기본적인 공통적 특징은 전체주의라고 하는 것이다. 전체주의가 정치적으로 표현된 것이 바로 나치즘, 파시즘, 공산주의라는 것이고 그것을 포퍼는 닫힌 사회라고 불렀다.


여기서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은 말도안되는 나치즘, 파시즘, 공산주의 전체주의가 어떻게 많은 사람의 공감을 받았느냐는 것이다. 이것이 참 재미있는 데...그러나 이런 문제의식을 그 당시 사람들은 별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뒤에 봤더니 히틀러의 나치즘에 대해서 독일 국민들의 95%가 찬성했다는 것. 극소수의 사람만이 반대 저항운동을 벌이고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두손을 들어서 환영을 했다. 도대체 이런일이 왜 일어나느냐. 공산주의도 똑같지요. 명백하게 이론적으로 보면 전체주의의 철학적 표현이라고 하는 이런 체제들이 나쁘다고 생각할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거기에 공감하고 찬성하고 박수를 보낸다. 그것 왜 그럴까. 달리 애기하면 전체주의의 정치적 표현인 나치즘,파시즘,공산주의에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다른말로 하면 전체주의의 매력이 무엇인가. 에리히 프롬도 이런 주제를 가지고 '자유에서의 도피'라는 책을 썼다. 그게 무엇인고 하면 1930년대와 40년대의 유럽의 시민들은 자기의 조상들이 피를 흘리면서,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얻은 소중한 자유를 왜 버리느냐는 것이다. 여기에 에리히 프롬이나 포퍼가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이런 주제는 우리가 오늘날 우리사회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기본적으로는 인간의 약점하고 관련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유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
여기서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은 말도안되는 나치즘, 파시즘, 공산주의 전체주의가 어떻게 많은 사람의 공감을 받았느냐는 것이다. 이것이 참 재미있는 데...그러나 이런 문제의식을 그 당시 사람들은 별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뒤에 봤더니 히틀러의 나치즘에 대해서 독일 국민들의 95%가 찬성했다는 것. 극소수의 사람만이 반대 저항운동을 벌이고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두손을 들어서 환영을 했다. 도대체 이런일이 왜 일어나느냐. 공산주의도 똑같지요. 명백하게 이론적으로 보면 전체주의의 철학적 표현이라고 하는 이런 체제들이 나쁘다고 생각할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거기에 공감하고 찬성하고 박수를 보낸다. 그것 왜 그럴까. 달리 애기하면 전체주의의 정치적 표현인 나치즘,파시즘,공산주의에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다른말로 하면 전체주의의 매력이 무엇인가. 에리히 프롬도 이런 주제를 가지고 '자유에서의 도피'라는 책을 썼다. 그게 무엇인고 하면 1930년대와 40년대의 유럽의 시민들은 자기의 조상들이 피를 흘리면서,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얻은 소중한 자유를 왜 버리느냐는 것이다. 여기에 에리히 프롬이나 포퍼가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이런 주제는 우리가 오늘날 우리사회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기본적으로는 인간의 약점하고 관련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유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
나 자유에는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유가 주어줬을 때 공포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고등학교와는 달리 대학에 오면 자기 스스로 판단하여 수강 과목을 선택, 신청하고 결과를 책임지는데 그것에 적응하기가 두렵다. 그래서 인간은 한편으로는 자기가 선태을 원하고 선택한 삶을 살고 싶어하지만, 그 선택 자체를 두려워 하고 선택을 피하고 싶어하는 마음도 있다. 특히 선택이 초래하는 책임에 대해서는 도망가고 싶어한다는 거다.  
나 자유에는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유가 주어줬을 때 공포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고등학교와는 달리 대학에 오면 자기 스스로 판단하여 수강 과목을 선택, 신청하고 결과를 책임지는데 그것에 적응하기가 두렵다. 그래서 인간은 한편으로는 자기가 선태을 원하고 선택한 삶을 살고 싶어하지만, 그 선택 자체를 두려워 하고 선택을 피하고 싶어하는 마음도 있다. 특히 선택이 초래하는 책임에 대해서는 도망가고 싶어한다는 거다.  


이런 심리가 인간에게는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전체주의는 바로 그것을 공략한 것이다. 그리고 또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이상한 속성이 있어가지고 자기보다 큰 존재, 중세의 신 같은. 그런 것에 자기를 무조건 맡기고 무조건 따르고 싶어하는 욕망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다. 내가 선택하고, 찬단하고, 책임지는 것 보다는 나 보다 월등하게 우월하고 강한 존재가 있으면 거기에다 나를 위탁하고 자기를 동일시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이 나의 모든 것을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나와 그 지도자를 동일시 시키는 것, 이게 일종의  원시사회의 특징이라 할까...원시사회에서는 지도자를 따라가면 모든게 해결되는 것이다.  
이런 심리가 인간에게는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체주의는 바로 그것을 공략한 것이다. 그리고 또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이상한 속성이 있어가지고 자기보다 큰 존재, 중세의 신 같은. 그런 것에 자기를 무조건 맡기고 무조건 따르고 싶어하는 욕망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다. 내가 선택하고, 찬단하고, 책임지는 것 보다는 나 보다 월등하게 우월하고 강한 존재가 있으면 거기에다 나를 위탁하고 자기를 동일시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이 나의 모든 것을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나와 그 지도자를 동일시 시키는 것, 이게 일종의  원시사회의 특징이라 할까...원시사회에서는 지도자를 따라가면 모든게 해결되는 것이다.  


지도자를 따라서 살아가면서 그 지도자와 나를 동일시 하는 것ㅇ;다. 그 당시 독일사람들의 대부분은 히틀러를 자기와 동일시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히틀러가 나타나면 환호하고, 막 박수치고, 요즘 연예인 보고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것처럼 독일국민들이 그랬다는 거죠. 이걸 포퍼는 원시사회가 그랬다는 것이다. 원시사회는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지도자만 따라가면 되는 거에요. 그것이 현대에와서 나타난 것이 바로 나치즘이다. 바고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근대라고 하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근대를 중세와 비교해서 개인이 출현하고 자유가 출현했다 라고 이야기하지만 결국 근대에 새로운 세기가 열렸다고 하는 것은, 개인이 등장했다고 하는 것은 그 개인을 보호해 주던 큰 안전망으로 부터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떻게 보면 중세때 사람들이 대단히 펴하게 살았다. 심리적으로. 그래서 근대 개인의 탄생을 안전을 버리고 자유를 선택했다고 이야기 하는 사람이 있고, 그 다음 자존심(계급이 주는 자존심) 댓가로 평등을 택했다는 사람이 있고, ...중세는 계급사회. 평등을 택하면 자기의 자존심을 보장해 주던 계급사회, 계층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마음의 평화를 댓가(버리는 대신에)로 비판적 자기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오늘날 말하는 자유란 근대적 개인의 출현과 맥을 같이 하는데 결국 그것은 고독한 개인의 탄생이다.  
지도자를 따라서 살아가면서 그 지도자와 나를 동일시 하는 것ㅇ;다. 그 당시 독일사람들의 대부분은 히틀러를 자기와 동일시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히틀러가 나타나면 환호하고, 막 박수치고, 요즘 연예인 보고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것처럼 독일국민들이 그랬다는 거죠. 이걸 포퍼는 원시사회가 그랬다는 것이다. 원시사회는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지도자만 따라가면 되는 거에요. 그것이 현대에와서 나타난 것이 바로 나치즘이다. 바고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근대라고 하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근대를 중세와 비교해서 개인이 출현하고 자유가 출현했다 라고 이야기하지만 결국 근대에 새로운 세기가 열렸다고 하는 것은, 개인이 등장했다고 하는 것은 그 개인을 보호해 주던 큰 안전망으로 부터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떻게 보면 중세때 사람들이 대단히 펴하게 살았다. 심리적으로. 그래서 근대 개인의 탄생을 안전을 버리고 자유를 선택했다고 이야기 하는 사람이 있고, 그 다음 자존심(계급이 주는 자존심) 댓가로 평등을 택했다는 사람이 있고, ...중세는 계급사회. 평등을 택하면 자기의 자존심을 보장해 주던 계급사회, 계층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마음의 평화를 댓가(버리는 대신에)로 비판적 자기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오늘날 말하는 자유란 근대적 개인의 출현과 맥을 같이 하는데 결국 그것은 고독한 개인의 탄생이다.  

2018년 9월 23일 (일) 21:46 판

전체주의(Totalitarismo, totalitarianism)는 국가나 집단의 전체를 개인보다도 우위에 두고, 개인은 전체의 존립과 발전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사상이며, 극우와 권위적 극좌의 정치 성향에서 공통분모로 나타나는 성향이다.

이들이 지배하는 사회는 독단주의가 발달되고, 회의주의가 부정된다. 전체주의는 야당을 금지하고 국가의 정책에 대한 개인의 반대를 제한하며 공공 및 사생활을 극도로 통제할 수 있는 정부 형태를 정의하는 정치 개념이다. 가장 극단적이고 완전한 형태의 권위주의라고 할 수 있다. 전체주의 국가의 정치 권력은 보통 한사람의 지도자의 통치, 국가가 통제하는 대중 매체를 통한 모든 선전 운동, 정치적 억압, 1인 숭배, 경제활동의 통제 및 언론의 제한, 대규모 감시와 광범위한 테러 등을 포함한다. 전체주의 국가는 공적 또는 사적 삶의 영역에서 권위에 대한 어떠한 제한도 허용하지 않는다. 전체주의 정권은 권위주의 정권과는 차이가 있다. 후자는 하나의 권력 보유자—한 사람의 "독재자", 위원회 또는 집단 또는 작은 규모의 정치 엘리트 집단—가 정치 권력을 독점하는 국가를 의미한다. 권위주의 국가는 정치 권력에 도전하지 않으면 사회에 일정한 자유를 부여한다. 권위주의는 “세계와 인간 본성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는다." 반면에, 전체주의 정권은 경제, 교육, 예술, 과학, 사생활 및 시민의 도덕을 포함하여 사회 생활의 거의 모든 측면을 통제하려고 시도한다. 또한 정부의 목표를 추구하는 데 전 국민을 동원한다.


한나 아렌트

"조직되지 않고 구조화되지 않은 대중, 절망적이고 증오로 가득 찬 대중은 지도자들에게서 구원을 기대한다."


벤자멩 콩스탕은 “사회계약론은 모든 종류의 전체주의의 가장 끔찍한 보조자가 되었다”고 꼬집었다. 루소는 결코 전체주의 정권을 찬성하지 않았지만, 일반의지라는 이념이 많은 문제의 소지를 담고 있어 애초 취지와 다른 파장을 일으킨 것이다. - 신동아. [세상을 바꾼 책 이야기] 2013.07.19 / 647호 김학순. 장 자크 루소 사회계약론. 민주주의의 교과서인가 전체주의의 보조자인가.


칼 포퍼. 열린사회와 그 적들. 신중섭 설명

열린사회를 정의하면, 비판과 토론이 자유롭게 허용이 되고, 그 비판과 토론이 정부의 정책에 영향을 미쳐서 정책이 수정될 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를 포퍼는 열린사회라고 봤다.

열린사회의 적들은 누구냐? 비판과 토론이 허용되지 않을 뿐 아니라 비판과 토론이 허용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정책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사회이다. 구체적으로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 쓰여졌던 그 당시 유럽의 상황. 히틀러의 나치즘이 1930년대 중반에 출현하고 점점 국가와 사회를 장악한다. 그것도 철저하게 민주적인 방법으로 히틀러는 정권을 잡았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파시즘. 그리고 공산주의. 물론 공산주의와 나치즘은 대척점이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나치즘을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는 나치즘을 방관했는데 그 이유는 공산주의자들은 나치즘은 결국 망하게 되어있고 오히려 공산주의의 필요성을 더욱 보여주는 그런 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다.

포퍼는 그 당시에 준동하고 있던 히틀러의 나치즘이나 파시즘이나 공산주의가 모두 유럽의 암흑기를 초래하고 있다고 보고 1938년 열린사회와 그 적들을 쓰기 시작한다. 이건 나쁜 것이다. 이 조류들의 가장 기본적인 공통적 특징은 전체주의라고 하는 것이다. 전체주의가 정치적으로 표현된 것이 바로 나치즘, 파시즘, 공산주의라는 것이고 그것을 포퍼는 닫힌 사회라고 불렀다.

여기서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은 말도안되는 나치즘, 파시즘, 공산주의 전체주의가 어떻게 많은 사람의 공감을 받았느냐는 것이다. 이것이 참 재미있는 데...그러나 이런 문제의식을 그 당시 사람들은 별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뒤에 봤더니 히틀러의 나치즘에 대해서 독일 국민들의 95%가 찬성했다는 것. 극소수의 사람만이 반대 저항운동을 벌이고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두손을 들어서 환영을 했다. 도대체 이런일이 왜 일어나느냐. 공산주의도 똑같지요. 명백하게 이론적으로 보면 전체주의의 철학적 표현이라고 하는 이런 체제들이 나쁘다고 생각할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거기에 공감하고 찬성하고 박수를 보낸다. 그것 왜 그럴까. 달리 애기하면 전체주의의 정치적 표현인 나치즘,파시즘,공산주의에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다른말로 하면 전체주의의 매력이 무엇인가. 에리히 프롬도 이런 주제를 가지고 '자유에서의 도피'라는 책을 썼다. 그게 무엇인고 하면 1930년대와 40년대의 유럽의 시민들은 자기의 조상들이 피를 흘리면서,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얻은 소중한 자유를 왜 버리느냐는 것이다. 여기에 에리히 프롬이나 포퍼가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이런 주제는 우리가 오늘날 우리사회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기본적으로는 인간의 약점하고 관련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유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 나 자유에는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유가 주어줬을 때 공포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고등학교와는 달리 대학에 오면 자기 스스로 판단하여 수강 과목을 선택, 신청하고 결과를 책임지는데 그것에 적응하기가 두렵다. 그래서 인간은 한편으로는 자기가 선태을 원하고 선택한 삶을 살고 싶어하지만, 그 선택 자체를 두려워 하고 선택을 피하고 싶어하는 마음도 있다. 특히 선택이 초래하는 책임에 대해서는 도망가고 싶어한다는 거다.

이런 심리가 인간에게는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체주의는 바로 그것을 공략한 것이다. 그리고 또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이상한 속성이 있어가지고 자기보다 큰 존재, 중세의 신 같은. 그런 것에 자기를 무조건 맡기고 무조건 따르고 싶어하는 욕망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다. 내가 선택하고, 찬단하고, 책임지는 것 보다는 나 보다 월등하게 우월하고 강한 존재가 있으면 거기에다 나를 위탁하고 자기를 동일시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이 나의 모든 것을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나와 그 지도자를 동일시 시키는 것, 이게 일종의 원시사회의 특징이라 할까...원시사회에서는 지도자를 따라가면 모든게 해결되는 것이다.

지도자를 따라서 살아가면서 그 지도자와 나를 동일시 하는 것ㅇ;다. 그 당시 독일사람들의 대부분은 히틀러를 자기와 동일시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히틀러가 나타나면 환호하고, 막 박수치고, 요즘 연예인 보고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것처럼 독일국민들이 그랬다는 거죠. 이걸 포퍼는 원시사회가 그랬다는 것이다. 원시사회는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지도자만 따라가면 되는 거에요. 그것이 현대에와서 나타난 것이 바로 나치즘이다. 바고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근대라고 하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근대를 중세와 비교해서 개인이 출현하고 자유가 출현했다 라고 이야기하지만 결국 근대에 새로운 세기가 열렸다고 하는 것은, 개인이 등장했다고 하는 것은 그 개인을 보호해 주던 큰 안전망으로 부터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떻게 보면 중세때 사람들이 대단히 펴하게 살았다. 심리적으로. 그래서 근대 개인의 탄생을 안전을 버리고 자유를 선택했다고 이야기 하는 사람이 있고, 그 다음 자존심(계급이 주는 자존심) 댓가로 평등을 택했다는 사람이 있고, ...중세는 계급사회. 평등을 택하면 자기의 자존심을 보장해 주던 계급사회, 계층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마음의 평화를 댓가(버리는 대신에)로 비판적 자기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오늘날 말하는 자유란 근대적 개인의 출현과 맥을 같이 하는데 결국 그것은 고독한 개인의 탄생이다.

자기가 선택하고 자기가 책임지는. 이것을 사람들은 부담으로 느꼈다는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사람들은 일종의 과거로 회귀하고 싶은, 프로이드의 용어를 빌리면 엄마의 자궁으로 되돌라가고 싶은, 보호받으면서 편안하게 살고 싶은 욕망이 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정치적 지도자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거라고 기대하고 그 사람을 열광하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열린사회가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개인 스스로가 자신의 삶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스스로 선택하고 거기에 책임을 지고 살아가야되는데 사람들은 그것으로 부터 불안을 느끼고 고독을 느끼니까 거기서 도망가려고 한다. 이런 마음의 잠재적 의식이 우리속에 있다는 것이다. 어느 사회든지 대중들의 그런 의식정서에 호소하여 정치적 지지를 얻으려고 하는 잘못된 정치가들이 있으니 그걸 경계 해야한다.

달리 이야기 하면, 정치가들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닫힌사회를 원하지만, 시민들은 자신의 불안을 피하기 위해 닫힌사회를 동경하고 있다.

그래서 엄마의 자궁과 같은 안정감과 무비판 상태로 나가고 싶어서, 완전한 사회에 대한 동경, 그것이 과거지향이라면 씨족사회로의 복귀이고, 미래를 꿈구면 유토피아 세계로 전진하고 싶어하는, 결국 그런 사람들의 심성이 전체주의를 동경하게 하고, 전체주의 사회에 힘을 실어주게 된다.


피터 드러커 [경제인의 종말] 서문

우리시대의 문제들은 1920~30년대의 그것과 매우 다르고, 또한 우리들의 현실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문제들에 대해 대중들이 보인 반응들 중 일부는 불길하게도, 유럽을 히틀러 전체주의로 그리고 2차대전으로 몰고 간 '대중의 절망'을 반영하고 있다. 일부 집단들, 예컨데 인종차별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소위 좌파 '행동주의' 학생들의 일부는 그 행동이 놀라울 정도로 히틀러의 돌격대와 닮았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에게 발언의 자유를 포함하여 어떤 권리도 허용하지 않거나, 인격 말살 운동을 벌이거나, 그리고 파괴와 야만적인 행동을 즐기거나 하는 것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집단들이 사용하는 수사학을 보면, 히틀러의 연설과 가증스러울 정도로 닮았고, 마오쩌둥에서 부터 마르쿠제에 이르는 증오의 예언자들에게 공통적인 음산한 허무주의도 히틀러와 유사하다.

그들의 직계 조상은 1910~1930년 사이에 일어난 독일의 '청년운동'이다. 긴 머리에 기타를 치며 민속음악 등을 즐기는 것도 닮았다. 그리고 독일의 청년운동은 이상적인 '사회주의'로 출발했으나 히틀러에게 가장 광신적인 핵심 추종자들을 공급하는 것으로 끝났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런 집단들이 우익 혹은 좌익이든 간에, 30년전 전체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아니요'라고 말하는 것이 적극적인 정책이라고 믿고 있으며, 동정심을 갖는 것을 약한 사람이나 할 짓으로 여기고 있고, 권력추구를 위해 이상주의를 조작하는 것을 '이상적'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우리의 가까운 과거로 부터 경험한 바로부터 하나의 커다란 교훈을 배우지 못했다. <증오가 절망에 대한 해답이 아니>라는 사실을 배우지 못했다는 말이다.

이 책을 나는 1933년, 그러니까 히틀러가 (1933년 1월30일) 독일의 권좌에 앉은지 몇 주뒤에 쓰기 시작했다. 이 책의 일부인 [나치 악마학에 있어 반유대주의가 차지하는 역할과 그것이 호소력을 지닌 이유에 관한 연구]는 1935년인지 1936년인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오스트리아 가톨릭계 반나치 출판사에 의해 소책자로 출판되었다...


노명식 [자유주의의 역사]

제11장 20세기의 자유주의

자유주의자들을 몸서리치게한 것은 공격적이고 호전적인 이데올로기들의 주의, 주장들의 내용만 아니라 그 정신과 기질에 있었다. 즉 그 이데올로기들은 한결같이 전투적이고 자신에 넘쳐 자기들의 신념과 비전을 누구에게나 강요하려고 했는데, 그러한 자세와 정신은 자유주의자들의 비위에 전혀 맞지 않는 것이었다.

자유주의자의 눈에는 그러한 정신자세는 일찌기 계몽사상적 자유주의자가 싸워 승리를 거둔 바 있는 종교적 광신주의와 교조주의가 이제 아주 흉악한 세속적 형태로 다시 나타난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20세기의 이 세속적 광신주의는 18세기의 종교적 광신주의 보다 훨씬 더 위헙했다. 그 까닭은 자기들의 사상과 체제에 대한 지지를 강요하고 반대파들을 탄압하는 수단이 과학기술과 정치조직의 엄청난 발달에 의해 그 전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20세기는 버트란트 러셀의 말대로 "종교들의 전쟁 시대이고 그 종교는 이제 이데올로기라고 불리우는 종교이다."

자유주의자들은 그러한 종교가 역겨웠다. 자유주의자들도 제각기 자신의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그 의견을 절대로 진리라고 우겨대지 않았다. 모든 진리는 과학적 실험에 따라 달라질 수있는 것이고 따라서 그것은 일정한 가설하에서만 진리일 뿐이었다. 자유주의자는 회의적 태도를 유지해야한다.

3. 냉전자유주의(2) 전체주의에 대한 분석

냉전이 열전으로 화한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에 열린 한 심포지엄에서 대체적으로 합의된 보고서에 의하면 현대 세계의 모든 전체주의 사회에 기본적으로 공통된 요소를 다음 5가지로 지적하고 있다.

1) 인간 존재의 모든면을 지배하는 어용 이데올로기
   이 이데올로기의 특성은 천년왕국적인 관점에서 인류전체의 최후의 완전한 사회를 강조하고 있다.
2) 거대한 일당 독재정치
3) 거의 완전한 무력독점
4) 거의 완전한 매스컴 독점
5) 비밀경찰에 의한 공포정치

여기에

6) 경제 전체의 중앙통제
7) 대중 동원 내지  대중 열광

좌익 전체주의의 본질을 파헤치려는 자유주의 학자들은 전체주의의 기원을 프랑스 혁명이래의 혁명적 자유주의에서 찾았다.

혁명적 사회주의 전통에는 일관해서 흐르는 중요한 전체주의적 요소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인류 역사의 마지막 단게에서 실현되는, 역사의 궁극적 목표인 천년왕국적 유토피아 사상이었다.

이 유토피아 사상이 전체주의로 하여금 사회의 개조뿐만 아니라 인간성 자체의 개조를 향해 전력을 기울이게 한다는 것이었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가 거창하게 설계한 이 사상이 가져올 이 무서운 결과에 관해 "강제수용소는 인간성 변화를 실험하는 실험실"이라고 단언했다.

그러면 왜 좌익적 유토피아 사상이 그렇게 끔찍한 결과로 가게 마련일까? 유토피아 사상가들은 완전한 미래라는 사회적 비전에 집착하고 지나치게 열중하다 보니까, 현재의 개인들의 권리와 사람들의 고통에 무관심하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A.까뮈는 이를 두고 "한 사람의 희생이 전 인류의 구원에 공헌하는데 그까짓 개인들의 희생 따위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며 마르크스를 빗대어 빈정대기도 했다.

자유주의 학자들 가운데는 좌익 전체주의의 세속적 유토피아 사상의 뿌리는 기독교의 천년왕국사상에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스도의 재림후 인류역사는 1,000년동안 에덴의 낙원과 같은 시대가 온다는 기독교 사관에 공산주의 유토피아 사상의 뿌리가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 유물사관에 의하면 인류역사는 원시 공산사회에서 출발하여 노예제 사회, 봉건제 사회, 자본제 사회를 거쳐 일체의 사회적 모순도 계급투쟁도 없는 지상낙원의 사회주의 사회로 발전한다.

이 역사의 발전단계설은 마르크스가 헤겔에서 배운 것이고 헤겔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독교 사관에서 배운 것이다.

좌익 유토피아 사상이 메시아주의적, 광신적 종교사상의 세속판이라면 그것은 자유주의의 합리주의와 관용정신에 전혀 맞지 않음은 말할 나위 없다. 공산주의에 대한 자유주의자들의 가장 유력한 비판은 그들의 유토피아 사상이 비과학적이라는 점인데, 비판의 두 기수는 칼 포퍼와 이사야 벌린이었다.

포퍼는 어떤 고상한 목표를 정해놓고 그 목표에 따라 사회 전체를 변경시키거나 재건하려는 시도를 <유토피아적 사회공학>이라고 부르면서, 그러한 시도는 목표달성에 필요한 모든 사실을 미리 다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데, 그런 전제야말로 무엇보다도 비과학적이라고 했다.

"사회실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행착오에서 배운 과학적 지식을 현실의 사회에 적용시켜 나가는 것인데 유토피아적 사회공학은 과학의 그러한 기본 룰을 무시하는 것이다"

앞서 본 바와 같이 포퍼는 유토피아적 사회공학을 '홀리즘'이라고 했는데, 벌린은 이를 모니즘이라고 불렀다. 인간의 경험과 사회와 역사적 사실들은 한없이 다양하고 복잡해서 궁극적 진실은 누구도 미리 알 수 없는 것인데도 그 다양하고 복잡한 사실들은 하나의 체계나 하나의 사회질서에 통합하여 인간과 사회와 역사의 궁극적 본질을 하나의 체계로 설명할 수 있다는 단호한 태도가 '모니즘'이다.

벌린은 모니스트들은 사회적 진실을 사실 그대로 보지 못하는 오류로 말미암아 결국 정치를 생체해부로 만들고 사람들을 끔찍한 불구로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