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사건은 1948년 4월 3일부터 1952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 공산주의자의 무장폭동 촉발된 비극.

제주4․3사건의 정의(定義)

'제주4․3사건은 공산당의 폭동이다'

제주4․3사건은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을 받은 남로당 제주도당 공산주의자들이 대한민국 건국을 저지하고 인민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하여 일으킨 폭동 및 반란으로서, 남로당 인민해방군은 남한을 북한 김일성 정권 통치영역에 포함시키기 위하여 무장 폭력을 사용하였고 또한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도민이 무고하게 희생되었으며, 1957년 4월 2일 마지막 빨치산이 체포되어 사건을 완전히 종결될 때까지 만 9년 동안 공산주의자들이 살인 납치 방화를 자행하여 제주 사회를 혼란에 빠트렸던 사건이다.

출처 : 제주4.3진실도민보고서

원인

남조선노동당의 활동

남한의 단독선거를 둘러싸고 사회 전반에 갈등이 발생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1948년 4월 3일, 남조선노동당에서 무장대를 조직하여 제주도로 들어와 동조자들과 함께 반미, 반정부 무력투쟁을 시작했다.

제주4․3사건의 대강(大綱)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공산주의자들은 한반도에 공산주의 국가 수립을 기도하였으나, 한반도 남부에 공산국가 건설이 불확실해짐에 따라 남로당 중앙당은 남로당 제주도당에 무장폭동 지령을 내려 4․3폭동이 발발되었다. 1948년 4월 3일 제주도 공산주의자들은 도내 경찰지서 12개를 동시에 습격하여 지서를 불태우고 경찰과 양민을 학살하였으며, 5월 10일에는 도내 각 선거사무소를 습격하여 선거 명부를 탈취하고 선거관리위원들을 살해하며 선거사무소를 불태우는 등 대한민국 건국 선거를 방해하여 제주도 3개 선거구 중 2개 선거구의 선거를 파탄시켰다. 그 후에도 남로당 제주인민해방군은 살인과 납치를 자행하면서 도내 사회를 공포로 몰아넣었고, 1948년 7~8월에는 도민들을 협박하여 북한 정부 수립에 찬성하는 투표를 강제했고, 제주인민해방군 1대 사령관 김달삼 등은 이 투표지를 가지고 월북하여 북조선 창건에 앞장섰으며, 1948년 10월 24일에는 이덕구 제주인민해방군 2대 사령관이 대한민국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여 신생 대한민국의 국군과 전면전을 벌이는 사태로 발전하였다. 군경의 진압과 귀순 공작으로 1949년 봄에 이르자 제주인민해방군 주력부대는 병력이 감소하고, 1949년 6월에는 이덕구가 사살되는 등 폭동의 기운은 일부 진정되었으나, 전투와 진압의 와중에 많은 양민들이 희생당하였으며, 제주인민해방군 패잔병들은 끝끝내 저항하다가 1957년 4월 2일 마지막 빨치산 오원권이 체포됨으로서 만 9년간에 걸친 폭동이 끝나는 비극적 사건이 제주4․3사건이다.

출처 : 제주4.3진실도민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