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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의 조선인 지도자급 인사 2천여명을 처형하고, 17만 여명을 강제로 중앙아시아로 실어가 허허벌판에 내팽개쳐 첫해 겨울에 추위와 굶주림으로 1/3 이 숨졌다.<ref>[http://news.donga.com/3/all/20061231/8390974/1 고려인 강제이주 70년<1>50만 고려인의 어제와 오늘] 동아일보 2006-12-31</ref><ref>[http://koreilbo.com/index.php/novosti-obshchestvo-kor/698-80-2 고려인 강제이주 80년… “아리랑은 고향의 노래였다”] 카자흐스탄 고려일보</ref> 이로인해 연해주에서의 조선독립운동은 완전히 말살되었다.
연해주의 조선인 지도자급 인사 2천여명을 처형하고, 17만 여명을 강제로 중앙아시아로 실어가 허허벌판에 내팽개쳐 첫해 겨울에 추위와 굶주림으로 1/3 이 숨졌다.<ref>[http://news.donga.com/3/all/20061231/8390974/1 고려인 강제이주 70년<1>50만 고려인의 어제와 오늘] 동아일보 2006-12-31</ref><ref>[http://koreilbo.com/index.php/novosti-obshchestvo-kor/698-80-2 고려인 강제이주 80년… “아리랑은 고향의 노래였다”] 카자흐스탄 고려일보</ref> 이로인해 연해주에서의 조선독립운동은 완전히 말살되었다.
저명한 [https://ko.wikipedia.org/wiki/%ED%99%8D%EB%B2%94%EB%8F%84 홍범도(洪範圖, 1868~1943)] 장군과 진짜 김일성 장군으로 불리는 [https://ko.wikipedia.org/wiki/김경천_(1888년) 김광서(金光瑞, 1888~1942)] 장군도 그 대표적 피해자이다.
저명한 [https://ko.wikipedia.org/wiki/%ED%99%8D%EB%B2%94%EB%8F%84 홍범도(洪範圖, 1868~1943)] 장군과 진짜 김일성 장군으로 불리는 [https://ko.wikipedia.org/wiki/김경천_(1888년) 김광서(金光瑞, 1888~1942)] 장군도 그 대표적 피해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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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강제이주 피해 당사자의 한 명인, 북한 문화선전성 부상을 지낸 소련의 고려인 [https://ko.wikipedia.org/wiki/정상진 정상진(鄭尙進, 1918~2013)]의 당시 일에 대한 증언이다.<ref>[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0708100063&ctcd=&cpage=1 前 북한 문화선전성 제1副相 鄭尙進 - 현대史 증언] 월간조선 2007년 8월호</ref>
아래는 강제이주 피해 당사자의 한 명인, 북한 문화선전성 부상을 지낸 소련의 고려인 [https://ko.wikipedia.org/wiki/정상진 정상진(鄭尙進, 1918~2013)]의 당시 일에 대한 증언이다.<ref>[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0708100063&ctcd=&cpage=1 前 북한 문화선전성 제1副相 鄭尙進 - 현대史 증언] 월간조선 2007년 8월호</ref>
{{인용문| 1937년은 그 꿈이 박살난 해였다. 그해 8월부터 소련 NKVD(내무인민위원부·KGB의 前身)는 연해주 조선인 인텔리들을 무차별 체포, 처형하기 시작했다. 한 달 뒤에 시작될 강제이주의 事前(사전) 포석이었다. 소련작가동맹의 유일한 조선인 문학가이면서 소련 국적 취득을 한사코 거부했던 소설가 趙明熙도, 어린 鄭尙進에게 항일정신을 일깨워 줬던 아버지 정치문도 체포돼 총살당했다. 조선인 인텔리 2800여 명이 재판 없이 처형됐다.  
{{인용문| 1937년은 그 꿈이 박살난 해였다. 그해 8월부터 소련 NKVD(내무인민위원부·KGB의 前身)는 연해주 조선인 인텔리들을 무차별 체포, 처형하기 시작했다. 한 달 뒤에 시작될 강제이주의 事前(사전) 포석이었다. 소련작가동맹의 유일한 조선인 문학가이면서 소련 국적 취득을 한사코 거부했던 소설가 조명희(趙明熙)도, 어린 정상진(鄭尙進)에게 항일정신을 일깨워 줬던 아버지 정치문도 체포돼 총살당했다. 조선인 인텔리 2800여 명이 재판 없이 처형됐다.  
    
    
   그가 아버지의 처형 사실을 확인한 것은 1955년 북한에 있을 때였다. 부친의 묘소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NKVD가 처형자들을 한꺼번에 묻었다는 소문만 들었을 뿐이다.  
   그가 아버지의 처형 사실을 확인한 것은 1955년 북한에 있을 때였다. 부친의 묘소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NKVD가 처형자들을 한꺼번에 묻었다는 소문만 들었을 뿐이다.  

2018년 9월 3일 (월) 08:01 판

치스차코프 포고문은 북한을 점령한 소련 제25군 사령관 이반 치스차코프(Ivan Mikhailovich Chistyakov, 1900~1979)가 북한 점령 후인 1945년 8월 25일 북한 주민을 대상으로 발표한 첫 포고문이다.

치스차코프 포고문


우리역사넷의 위 링크에 올라 있는 포고문 해설은 한국 역사학자들이 얼마나 종북화 되어 있는지 알수 있는 표본이다.


포고문은 실제로 이행되었는가?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동을 보고 판단하라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저런 빛 좋은 개살구같은 포고문을 발동해 놓고, 소련군이 북한에서 저지른 만행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소련군이 저지른 만행 중에 가장 큰 것은 북한을 공산화시켰다는 것도 있지만, 자신들이 소련에서 5년간 교육시킨 만주 마적 출신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Jing Zhichen, 金日成) 대위를 '전설의 김일성 장군'인양 조작해서 자신들의 꼭두각시 대리인으로 내세워 최고 권력을 쥐어 준 것이다. 그 때문에 북한 주민들이 오늘날과 같은 처지로 전락해 있다.

북한은 해방된 적이 있는가?

치스차코프는 소련군이 점령군이 아니라 해방군으로 왔다고 했지만, 과연 민심도 그렇게 인정했을까? 평양 출신 월남민들은 아래와 같이 말한다.[1]

평양 천지에서는 八월 二十五·六일 경까지의 해방 十일간이 자유의 黃金時代(황금시대)였다. 그러나 열흘 동안을 「시대」라고 부르기엔 너무도 짧고, 허무한 기간이었다.
...

그러나 평온한 거리에도 때때로 정체불명의 정치적 벽보가 나붙어서 자극을 주기 시작했다. 그 대부분은 혼란된 정치정세를 의미하는 오보(誤報)였다.
「김일성 장군이 평양에 입성한다」
「동진공화국(東震共和國) 내각 명단」

그런 종류의 오보가 흥분된 민심을 자극했다.

평양이 해방되고, 주민들이 자유를 만끽한 것은 것은 일본 항복 후 소련군이 진주하기 직전까지 단 10일간이었다. 그 이후 소련군정기나 김일성 일족 치하는 일제시대보다 못했으면 못했지 전혀 나을 바가 없었다.

위에서 말하는 평양에 입성한다는 '김일성 장군'은 동진공화국 조각명단에 국방장관으로 나오는 전설의 김일성 장군이지 소련군 진지첸 대위가 아니다. 해방 후 나돈 저런 풍문을 소련군이 놓지지 않고, 무명의 진지첸 대위를 김일성 장군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소련은 조선독립운동을 일본보다 더 잔인하게 탄압한 국가

북한을 점령하고 해방군이라 자처하던 소련은 사실은 조선독립운동을 일본보다 더 잔인하게 박해한 나라이다.

  • 자유시 참변(自由市慘變) 1921년 6월
    민족계열 조선인 항일무장투사들을 자유시로 유인하여 1천여명 가까이 몰살시켜 만주와 연해주에서의 무장투쟁의 맥이 끊어지다시피 했다.

  • 고려인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1937년 가을
    연해주의 조선인 지도자급 인사 2천여명을 처형하고, 17만 여명을 강제로 중앙아시아로 실어가 허허벌판에 내팽개쳐 첫해 겨울에 추위와 굶주림으로 1/3 이 숨졌다.[2][3] 이로인해 연해주에서의 조선독립운동은 완전히 말살되었다. 저명한 홍범도(洪範圖, 1868~1943) 장군과 진짜 김일성 장군으로 불리는 김광서(金光瑞, 1888~1942) 장군도 그 대표적 피해자이다.

    아래는 강제이주 피해 당사자의 한 명인, 북한 문화선전성 부상을 지낸 소련의 고려인 정상진(鄭尙進, 1918~2013)의 당시 일에 대한 증언이다.[4]
    1937년은 그 꿈이 박살난 해였다. 그해 8월부터 소련 NKVD(내무인민위원부·KGB의 前身)는 연해주 조선인 인텔리들을 무차별 체포, 처형하기 시작했다. 한 달 뒤에 시작될 강제이주의 事前(사전) 포석이었다. 소련작가동맹의 유일한 조선인 문학가이면서 소련 국적 취득을 한사코 거부했던 소설가 조명희(趙明熙)도, 어린 정상진(鄭尙進)에게 항일정신을 일깨워 줬던 아버지 정치문도 체포돼 총살당했다. 조선인 인텔리 2800여 명이 재판 없이 처형됐다.
     그가 아버지의 처형 사실을 확인한 것은 1955년 북한에 있을 때였다. 부친의 묘소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NKVD가 처형자들을 한꺼번에 묻었다는 소문만 들었을 뿐이다. 
     
     
     카자흐人들의 친절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 고려인들이 살던 半지하 오두막집.

     1937년 9월25일, 연해주 페르바야 레츠카驛(역)에서 조선인 강제이주가 시작됐다. 「연해주 거주 고려인(러시아 시절부터 그곳에 거주하는 韓人들을 일컫던 말)들이 日帝와 내통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조선사범大, 조선사범전문학교, 사범노동학원, 사범기술학교, 4개의 고급중학교(고등학교), 8개 초급중학교(중학교), 23개 인민학교(초등학교) 학생들, 교직원 및 그 가족들이 첫 이주대상자였다. 조선극장, 조선어라디오방송국, 선봉신문사 등 문화기관 직원과 가족들도 함께였다. 
     
     이들은 열차 32량에 가축처럼 실려 한 달 뒤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에 도착했다. 鄭옹은 『그래도 우리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고 말한다. 그들보다 나중에 연해주를 출발한 열차에 탄 사람들은 열차사고와 추위 등으로 수없이 죽었는데, 그들이 탄 열차에서는 인명피해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내던져진 땅은 불모의 땅이었다. 鄭尙進의 회고다.
     
     『열차에서 내린 여자들은 주저앉아 통곡했어요.「죽으라고, 우리보고 죽으라고 이런 땅으로 보낸 거야」라면서….
     
     그때 나귀에 빵을 가득 싣고서 카자흐 여인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이름 모를 민족이 황야에 버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빵을 구워서 식을세라 모포에 덮어 가지고 달려온 것입니다. 그 빵을 아이들에게 먹이며 조선 어머니들은 다시 통곡했고, 카자흐 아낙들도 그 모습을 보면서 울었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젖어들었다.
     
     『카자흐 사람들, 참 마음씨가 고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아니었으면 우리들은 다 죽었을 겁니다. 우리 민족은 그 고마움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주 첫해에 추위와 굶주림, 풍토병으로 2만~3만 명이 죽었다. 청년 鄭尙進은 잃어버린 친척들을 찾으러 고려인 마을들을 돌아다니면서 매일같이 장례가 치러지는 것을 보았다.


소련이 대우한 유일한 조선인 그룹은 1940~1941년간 만주에서 소련으로 도피한 김일성을 비롯한 동북항일연군의 조선인 빨치산들 뿐이다. 이들은 장차 일본과 전쟁이 벌어지고 조선을 점령할 경우에 이용하기 위한 용도로 수용한 것이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각주

  1. 《고당 조만식(古堂 曺晩植)》, 고당전·평양지간행회(古堂傳·平壤誌刊行會), 평남민보사(平南民報社), 서울, 1966 : pp.170~171
  2. 고려인 강제이주 70년<1>50만 고려인의 어제와 오늘 동아일보 2006-12-31
  3. 고려인 강제이주 80년… “아리랑은 고향의 노래였다” 카자흐스탄 고려일보
  4. 前 북한 문화선전성 제1副相 鄭尙進 - 현대史 증언 월간조선 2007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