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헌영 외신 인터뷰 사건과 관련하여 존스턴 기자와 미군정이 음모를 꾸몄다는 음모론자들을 침묵시킬 결정적 자료는 존스턴 기자가 쓴 1945년 1월 10일자 뉴욕타임즈 기사인데, 소장처는 알지만 아직 원문 입수를 못했습니다. 뉴욕타임즈 본사의 과거 기사검색에도 나오지 않습니다만, 국내 국사편찬위원회에 원문 자료가 있습니다.

  • Richard J. H. Johnston, "Communist leader favors Russian control over Korea", New York Times 1946.01.10,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http://archive.history.go.kr/id/AUS064_01_00C0006_243

이 기사는 뉴욕타임즈 과거 기사 검색에도 잡히지 않아 일부 한정된 판에만 실렸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승만 건국 대통령의 정치 고문이었던 Robert T. Oliver(1909 – 2000) 박사의 한국 관련 기사 스크랩 철에 들어 있습니다.

이 기사는 온라인 이미지 서비스는 안 되고 국사편찬위원회 방문 열람과 복사만 가능합니다.

제가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기 때문에, 송구스럽지만 혹시 과천 근처에 사시는 분이 있다면 국사편찬위를 방문해서 자료를 복사하여 좀 올려 주시기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이미지를 박헌영 외신 인터뷰 사건 문서에 직접 삽입해 주셔도 좋겠습니다.


과천 국사편찬위원회의 정확한 위치와 자료 열람 가능시간은 http://archive.history.go.kr/usage.do 에 나와 있습니다. 대개 평일 일과시간에만 열람 가능합니다.


아래 존스턴 기자의 뉴욕타임즈 기사는 박헌영 외신 발언 보도로 국내에서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쓴 것인데 역시 이 사건과 관련이 있습니다. 혹시 국사편찬위 방문이 가능한 분이 계시다면 함께 올려 주신다면 더욱 좋겠습니다.

Richard J. H. Johnston, "Party rift widens in Korean dispute", New York Times 1946.01.18, (국사편찬위원회) http://archive.history.go.kr/id/AUS064_01_00C0006_267


JohnDoe (토론) 2018년 9월 16일 (일) 08:26 (KST)


1. 위 두번째 사료 Richard J. H. Johnston, "Party rift widens in Korean dispute", New York Times 1946.01.18에서 'rift' 철자가 맞나요. 네이버 사전에 없던데요.

2. 제가 9월내에 틈나는대로 과천에 가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국사편찬위의 복사조건에 < 복제 가능하나 학술적 이용에 한정되며 허락없이 발간 불가 자료 >라고 되어 있는데
  제가 학자신분이 아닌데 가능한가 모르겠네요.
rift 는 네이버 영어사전에도 "1. (사람들 사이의) 균열 2. (지면·암석·구름 사이로) 갈라진 틈"라고 나옵니다.
자료를 학술적으로 이용한다는 건 꼭 전문학자들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반인도 관심이 있어 연구하는 것도 해당된다고 봅니다. 저런 걸 전문학자들에게만 공개할 이유는 없습니다. 일반인도 열람, 복사는 가능할 것입니다. 허락없이 발간불가라고 한 부분이 문제인데, 아마 상업적 용도로 책에 이미지를 포함시켜 간행하는 것을 금한다는 말로 보입니다. 그런데 저 기사의 저작권은 국사편찬위원회가 아니라 뉴욕타임즈가 가지고 있습니다. 저 기사에 대해 국사편찬위원회가 무슨 권리를 가지고 있는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미군정청이 미국 신문 기사 스크랩해놓은 것은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에 원문 이미지를 올려놓은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신문기사의 저작권 유효기간은 국내는 70년으로 해방당시 기사들은 유효기간이 만료되었습니다. 미국은 유효기간이 100년 가까이 되는 것 같은데, 저 기사도 아직 기간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짤막한 기사인데다 연구용으로 쓰는데는 뉴욕타임즈도 시비 걸지는 않을 겁니다.
두번째 기사 1월 18일자 것은 국내정치에 관한 것으로 찬탁 반탁으로 나뉘어져 분쟁이 심한 상황을 보도한 것이 아닌가합니다. 그 내용 중에 박헌영과 관련된 부분은
In the latest break the parties on the Right have refused to attend further parleys and the Rightists continue to hurl the accusation of "traitor” at Pak Huenyung, Secretary General of the Communist party. Yesterday in a conference with the American press, Mr. Pak expressed himself as “having no objection to a single nation Soviet trusteeship" for Korea. In his defense Mr. Pak is quoted in the Leftist press as saying that he was misunderstood and that he was the victim of "language difficulties."
라고 나와 있다고 합니다. 저 내용이 기사에 정말 포함되어 있는지, 다른 관련된 내용은 더 나오는 것이 없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어서입니다.
관심가져주신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JohnDoe (토론) 2018년 9월 21일 (금) 05:40 (KST)

1. 선생님의 이 글은 감동적입니다. 제가 이제 시작하는 우남 위키를 무덤덤하게 보다가 나름 본격적으로 참여할 생각을 굳힌 것은 바로 이 글을 보고 나서 이었습니다. 좌파들의 글을 보고 그동안 답답해했었는데 그 어디에도 댕으된 글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손세일의 글에서도 짤게 거론했을 뿐.

2. 혹시 선생님이 본건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를 알려주실 수 있으신지요?

시원찮은 제 글을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특별한 계기는 없습니다만, 이 건을 알게 된건 올해 초쯤인가 인데, 저 사람들이 뭔가 그럴듯해 보이는 자료들은 제시하지만 결정적인 자료는 없고, 샌프란시스코 방송이 없는 기사를 가지고 거짓 방송을 했을 것 같지도 않고, 미군정청이 저런 황당한 음모를 꾸몄을 것 같지도 않아 원천 자료들을 좀 찾아 봤습니다. 다행히 근래에 옛날 자료들 DB가 많이 구축되어 저 사람들이 보지 못한 자료도 많아 찾아냈고, 일이 왜 저런 식으로 흘러갔는지 윤곽을 대충 파악할 수 있게 되더군요. 뉴욕타임즈 기사 원문을 보면 좀더 확실해질 것 같습니다.
JohnDoe (토론) 2018년 9월 21일 (금) 19:04 (KST)

오늘 말씀하신 자료를 찾아 왔습니다. 원본 자료가 오래되어 거의 부숴지기 직전이었습니다. 휴대폰 촬영한 것을 올려보겠습니다. 제가 컴퓨터를 잘 못해서 여러가지 시행착오를 해야될 것 같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기사 스크랩인 줄로 알았는데, 내용을 다시 타이핑해 놓은 것이군요. 결국 Johnston 기자가 최초에 송고한 기사는 송신문제로 실리지 않았고, 박헌영이 1월 8일에 존스턴을 찾아가 기사 취소를 요구하다 안 된다고 하니까 재인터뷰하는 형식으로 먼저 발언을 고쳐서 새로운 발언을 했다는 것까지 밝혀졌군요. 두번째 송고한 기사가 실린 날이 1월 10일이니 1월 15일자 샌프란시스코 방송도 저 기사를 보고 한 것이 틀림없는 것입니다. 박헌영 본인은 1월 12일엔가 존스턴을 찾아가 기사 취소를 요구했다고 주장했을 겁니다. 실제로는 1월 8일에 찾아간 것이니 거짓말을 한 것인지, 착각을 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 일일이 타이핑을 하신 모양이군요.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너무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문자인식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영문 이미지의 경우는 거의 완벽하게 읽어냅니다. 제가 애용하는 것은 구글 드라이브입니다. 구글 계정만 있으면 드라이브는 자동적으로 그냥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미 쓰시는 지도 모르겠네요. 이미지를 구글 드라이브에 끌어다 올려 놓고, 거기에 오른쪽 마우를 클릭하면 나오는 메뉴중에 "Open with"에 마우스를 놓으면 무슨 프로그램으로 파일을 열기를 원하는지 메뉴들을 또 보여주는데 맨위 "Google Docs"를 선택하면 순식간에 문자를 인식해서 보여줍니다. 영문 뿐만 아니라, 한글 등 어지간한 언어는 다 되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여러가지로 수고를 아끼시지 않은데 대해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JohnDoe (토론) 2018년 9월 21일 (금) 23:26 (KST)

1. 구글 드라이브를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2. 본 토론문 위에서 말씀하신 "Party rift widens in Korean dispute", New York Times 1946.01.18 기사는 찾아봤으나 원본을 확인하지 못하고 복사본만 찍어왔습니다. 박헌영 관련 부분은 님께서 언급한 "In the latest break the parties on the Right have refused to 부터 the victim of "language difficulties."까지가 다 입니다. 더 이상 박헌영 관련 언급은 없습니다.

  본문에 적당한 위치를 말씀하시면 두번째 기사의 복사본 사진도 본문에 올려 놓겠습니다.  

3. 사실 저는 흥미로운 것이 각주 [19]번 자료입니다. 인터뷰 다음날 베닝호프가 박헌영과 존스톤을 만났으며, 그제서야 박헌영이 자기실언의 심각성을 깨달았다는 것이 아닌가요. 그렇다면 미군정이 오히려 박헌영의 정치적 위험성을 걱정해서 주의를 환기시키고 대응할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는 것인데, 대체 왜 하지가 그런 친절을 베풀었는지 궁금하고, 미 국무성과 주한미대사관은 왜 3년이 지난 1948.12월 시점에서 이것을 이슈화하여 사건을 재조사하게 되었는지...

  혹시 좀 더 아시는 것 있으면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베닝호프가 왜 인터뷰 다음날 박헌영을 만났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 장군이 1월 6일날 참모회의에서 저 사안을 거론하며 흥미롭다고 했고, 뉴먼 대령은 존스턴 기사에 의심을 가지고 에드가 스노우에게 물어봤더니 스노우는 인터뷰 전날 저녁 박헌영과 만나 장시간 얘기했는데 전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며, 존스턴 기사에 나오는 그런 발언을 하지 않았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런 저런 사정으로 미군정청에서 박헌영 본인에게 진짜 그런 발언을 했는지 확인차 만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존스턴도 포함해서요. 올려주신 기사에서 존스턴은 박헌영이 1월 8일날 자기를 찾아와 기사 취소를 요구하다 그런 발언을 했다는 것 자체는 인정하고, 언어 문제에 애로가 있어 자신의 본래 의도가 잘못 표현된 것처럼 말하며 수정 발언을 실어달라고 하지요.
존스턴은 박헌영의 영어실력이 상당해서 잘못 전달된 것은 없지만, 수정발언을 하겠다니 그것을 기사화 해 주면서 원래 발언도 빠뜨리지 않고 같이 실었습니다. 그러면서 박헌영이 자신의 원래 기사 내용을 어떻게 알고 자신을 찾아왔는지 궁금해 하는데, 베닝호프가 이튿날 박헌영을 만나 얘기한 것 때문일 가능성이 크겠습니다. 말씀하신대로 베닝호프가 박헌영을 만난 것이 그에게 일찍 대응할 필요성을 알게 해 줬을 가능성이 있군요. 아니면 에드가 스노우가 존스턴의 기사 내용을 얘기해줬을 가능성도 있는 것 같습니다.
무초 대사가 저 사안을 다시 보고할 때는 북한 정권이 막 출범하고 박헌영이 부수상이 되었을 때니, 북한과 소련과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 등을 예측하는데 박헌영의 저런 발언도 참고가 될 수 있기에 다시 조사해 보고 국무장관에게 보고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1946년 2월 18일의 미군정 공식조사발표문에도 없는 내용이 들어 있어서 상당히 도움이 됩니다. 외신회견 참석자 7명의 신원도 대체로 확인이 되고요.


미군정청이 저 사안에 대해 최종 정리한 기록은 주한미군사에 나옵니다. 1946년 6월 쯤 기록이 아닌가 합니다. 참고할만합니다.

http://db.history.go.kr/id/husa_002r_0010_0020

이것도 참고문헌으로 올렸어야 하는데 잊어먹었습니다.
1월 18일자 기사는 특별히 새로운 말은 없으니, 이미 문서에는 박헌영 발언 관련부분만 뽑아서 올리고, 원문 이미지는 전체를 본문에 삽입하는 것보다 링크로 대체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본문 폭이 넓을 때는 이미지를 많이 올려도 괜찮았었는데 스마트폰에 맞취 폭을 좁혀 놓으니 이미지를 올리면 본문 글의 폭이 너무 좁아지는 문제가 있습니다. 아니면 갤러리 형태로 주요 자료 원문이미지를 모아서 보여주는 것도 생각해 보겠습니다. 관련 원문 이미지 대부분을 위키미디어 공용에 올려 놓았는데, 이쪽으로 또 옮기는 것이 귀찮기도 하고 해서....
https://commons.wikimedia.org/wiki/Category:Richard_Johnston
우선은 여길 참고하시지요. 저 사람들이 말하는 자료 중에 주한미군 기록 두세건의 이미지를 아직 못 구했는데 소장처는 알고 있고, 제가 구할 수도 있는데, 크게 중요성은 없는 것 같아 미루고 있습니다.

1. 제가 님의 요청을 받아 올린 존스톤의 1.10일 기사가 미군정의 진상조사결과, 주한미군사 그리고 1948.12월 무초의 보고서가 서로서로 보완하면서 수미일관하여, 아귀가 딱딱 들어 맞는군요. 하던 일 팽게치고 비맞으면서 갖다 온 보람이 있습니다. 2. 다시한번 느끼지만 알면 알수록, 공산주의자들의 행태가 가증스럽습니다. ^^ 3. 그런데 한가지 거슬리는 것은 주한미군사에 나오는 [1월 1일의 하지 장군과의 면담에서 박헌영은 신탁통치에 강하게 반대한다고 밝혔으며, 몇몇 공산 노선의 신문들도 신탁통치를 반대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박헌영은 공식적인 의견 제시를 망설이며 침묵을 지켰다.]라는 대목입니다. 4. 좌우 모두에 그 신뢰성을 인정받고 있는 박병엽의 증언을 담은 책 [김일성,박헌영,여운형]을 보면, (손세일이 인용했다시피) 박헌영의 일정은 "...이처럼 좌우익정파들이 일매지게 신탁통치 반대를 표명하는데도 공산당은 확실한 당론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책임비서 박헌영이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헌영은 3국외무장관회의 결정에 관한 이러저러한 뉴스에 혼란을 느꼈다. 소련영사 폴리얀스키(Aleksandre S. Polianskii)는 모스크바에 가 서울에 없었고, 소련영사관은 본국 훈령이 없다는 말만 했다. 타스통신은 보도도 하지 않았다. 박헌영 자신도 답답한 데다가 당간부들이 그의 평양방문을 제의했다. 그리하여 박헌영은 12월 28일 밤에 38선을 넘었다.51).....이 회의는 모스크바에 갔다가 30일에 돌아온 민정담당 부사령관 로마넨코(Andrei A. Romanenko) 소장과 함께 3국외무장관회의 결정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를 토론하기 위하여 열린 중요한 회의였다.모스크바에 갔던 서울총영사 폴리얀스키도 로마넨코와 함께 평양에 돌아와 있었다.....임시정부 수립에서 전체적인 세력관계를 2대1로 한다는 것이 중요한 사안으로 논의되었다. 북한의 통합된 세력 하나와 남한의 좌익세력을 합하여 두 세력을 형성하고 남한의 나머지 세력을 하나로 다룬다는 것이었다. 박헌영은 회의에서 여러 문제를 토의한 뒤에 김일성을 단독으로 만나 협의했다. 그는 1월 1일에 열린 신년회에 참석하고 평양을 떠나 그날 밤으로 38선을 넘었다.60)"

이상에서 볼 때. 1) 박헌영은 이미 1월1일 이전에 소련의 지시를 받고 찬탁방침을 이행해야하는 입장이었고 2) 1월1일 밤에 서울로 돌아왔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박헌영이 1월1일 하지를 만나 반탁입장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 주한미군사 글의 오류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그때까지도 뭔가 소련과 이북의 세부적인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일까...

아무래도 설명이 안됩니다.

저도 손세일이 박헌영이 12월 28일 평양에 갔다 1월 1일 밤 돌아왔다는 글(박병엽 증언)을 보고 그 부분을 상당히 체크해 봤습니다. 서울의 소련 부영사 아나톨리 샤브신의 부인 파냐가 후일 쓴 책에는 46년 1월 초에 평양에 갔다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기록을 살펴보니 박헌영은 12월 30일 반탁모임에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박헌영이 김구와 임정세력이 주도하여 1945년 12월 30일 결성한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信託統治反對國民總動員委員會)」에 참여하여 중앙위원(상임위원)이 되었다고 당시 국내 언론이 보도하고 있습니다.
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dh_001_1945_12_30_0100
http://db.history.go.kr/id/dh_001_1945_12_31_0150

이런 기록에다가 1월 1일 하지 중장을 만났다는 기록도 있으니 저는 박헌영이 당시 평양에 가지는 않았다고 봅니다. 서울서도 지령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많이 있었을 겁니다. 후일의 증언보다는 당시 기록이 정확하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박헌영의 회견 이튿날 미군정 정치고문 베닝호프가 박헌영을 만났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미군정이 음모를 꾸민 것이 아니라는 강력한 증거도 될 수 있기에 좋은 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주한미군사는 번역이 정확하지 않은 부분도 있으므로 정확을 기하기 위해서는 번역문에 링크되어 있는 영문 원문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번역에는 존스턴의 목에 30만원 현상금을 건 것으로 했는데, 원문에는 사람들이 박헌영의 목에 건 현상금입니다. 박헌영에게 현상금을 걸었다는 것은 미군의 다른 기록에도 나옵니다. 사람들이 그만큼 분개했다는 뜻이겠지요. JohnDoe (토론) 2018년 9월 22일 (토) 09:07 (KST)

아나톨리 샤브신의 부인 파냐 샤브시나 (쿨리코바)가 박헌영이 1월 초 평양에 갔다왔다고 하는 증언 출처입니다. 1월 초에 박헌영은 분명히 서울에 있었으니 맞지 않는 증언 같습니다.
https://news.joins.com/article/2685191

1. 저는 반대로 박병엽의 증언을 믿는 편입니다. 박병엽은 걸어다니는 북한의 건국사 사관입니다.

  북한이 만든, 사실과 조작이 섞인, 북한판 正史 사관으로서, 그 중대한 시국에서 박헌영의 월북 일정을 오판할리도 없고, 조작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의 기억과 당시 남한 사정 그리고 스티코프의 일기 등이 서로 아귀가 딱딱 맞아 떨어집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북한 현대사의 내용은 그야말로 엄청난 양입니다.(남북을 오고간 사람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일성,박헌영,여운형...) 

2. 반면에 사브시나의 기억은 특히 날자 감각이 우선 우리와 전혀 틀리는데, 제가 얼핏 읽다 말았지만, 제 기억으로는 책속에 나온 연중 기념일 또는 몇 가지 사건상황이 한국에서 실제 벌어진 것과 최대 보름정도의 시간격차가 있더군요. 러시아의 달력과 서방의 서기 달력이 차이가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녀의 책을 보면 남한에서 좌우대립이 격화된 것이 12월 이라고 나와있습니다만, 한국에서 "뜨거운, 뜨거운" 상황은 분명히 45년12월이 아니고 신탁통치 정국이던 46년1월이었습니다. 

[1945년 남한에서. 어느 러시아 지성이 쓴 역사현장기록] 저자 파냐 이사악꼬브나|역자 김명호|한울 |1996.03.01

목차......012. 뜨거운,뜨거운 12월 013. 모스끄바 3상회의 이후의 남한

3. 그리고 님이 지적하신 반탁위원회에 등록은 본인이 아닌 대리인이라도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을까요.


4. 제가 박헌영의 46년 1월1일 일정을 마음에 두고 있는 이유는 서중석에게 있습니다.

이 작자가 프레시안인가에 연재하는 글에서 "박헌영의 찬탁표변은 소련의 지시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은 허무맹랑한 주장이다. 내가 아무리 자료를 샅샅이 뒤져봤지만, 박헌영이 월북하기전 김일성과 만났다는 어떠한 단서도 찾지 못했다"는 헛소리를 자신만만하게 지껄이는 걸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그 글을 보기 1년전쯤 보았던 박병엽의 책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전 노동당 고위간부가 본 비밀회동)]의 목차에는 떡하니 제1차 회동 (1945년 10월 8일~9일), 제2차 회동 (1945년 12월 29일~ 46년 1월 1일) 제3차 회동 (1946년 4월 3일~ 6일), 제4차 회동 (1946년 6월 27일~ 7월 12일경), 제5차 회동 (1946년 7월 16일경~ 22일경), 6차 회동 (1946년 10월 11일과 그 이후) 로 나옵니다.

서중석. 구타유발자. 옆에 있으면 한대 쥐어박고 싶은....


일단 토론을 마쳐야겠지요. 정말 님의 글을 읽고, 대화를 나누고, 존스톤기사를 올린 지난 몇일 동안 너무 즐거웠습니다. 하여튼 이 글은 영원히 저의 주시문서로 지정해 놓겠습니다.

저는 일제시대 친일파 문제와 해방 전후의 분단과정 및 6.25전쟁에서의 스탈린 역할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사실 풀리지 않는 의문이 생길 때, 님과 같은 분들과 의견 교환을 하고 싶은데, 온라인 운영 체제상 허락되지 않는 것이 유감입니다.

이상.

상충하는 기록들과 증언 중에 누구나 납득할 수 있게 어느 쪽이 옳다고 설명하기는 어려운 일 같습니다. 1945년말의 상황을 보면 대부분 단체와 사람들이 반탁 의견을 표명하는데, 공산당은 당 차원의 공식 의견은 표명하지 않고, 당내의 반탁 분위기를 반영하여 대변인(?) 정태식이 개인 의견이라면서 반탁의사를 표명합니다. 이런 상황이니 공산당에서 대리인을 내세워 반탁연대에 참가하면서 박헌영의 이름이 나가도록 했을 것 같지는 않군요. 누군가가 박헌영의 명의를 도용할 상황도 아니었던 것 같고, 그랬다면 공산당측이 가만있지도 않았겠지요.
강원룡 목사도 12월 29일 경교장 모임에 박헌영이 참석했다고 증언한 것 같습니다.
경교장 모임에도 참석했던 강원용 목사는 올해 초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12월 29일 경교장에서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결성됐다. 각계 인사로 구성된 중앙위원 76명 중엔 박헌영 홍남표 이극로 김세용 같은 좌익 지도자들도 다수 포함됐다.

http://news.donga.com/Series/70070000000600/3/all/20041212/8138197/1 다만 이 동아일보 기사에는 그 시점에 박헌영이 평양을 다녀왔다는 믿을만한 증언이 있다고 하여 모순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박병엽의 증언도 김-박 제2차 회동이라 하면서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으니 가볍게 무시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 이 문제는 쉽게 답이 나올 것 같지 않으니 그만 잊기로 하겠습니다. 다만 김-박 제1차 회동이라는 10월 8~9일에는 공산당 북조선 분국 설치가 합의되었다고 다들 역사적 사실로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서중석은 이 마저도 부정하는 모양이군요.

저는 역사와는 거리가 먼 이공계 전공인데다 역사에 대해 아는 것도 별로 없는 사람인데 토론하는 동안 저도 많이 배웠고, 중요한 자료를 올려주시느라 수고해 주신데 대해서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JohnDoe (토론) 2018년 9월 22일 (토) 19:22 (KST)

1. 역사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니 겸손이 심하십니다. 지금 거론하신 갖가지 정보들은 일반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어 님께서 해방공간의 분단과정에 대해 폭넓은 조사와 각별한 관심을 가진 결과로 보입니다. 저 역시 전공이 이공계쪽입니다.

2. 음. 왜 미국무성과 주한미대사관이 박헌영 외신 인터뷰 사건을 재조사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단순한 정보수집 차원이 아니라, 1948년12월 대한민국 건국에 대한 승인문제가 유엔총회에 상정된 것과 관련있을 것 같군요.
  손세일. 105. “大韓民國은 韓國의 유일한 합법정부”
    
    ....유엔정치위원회 한국문제 토의에는 먼저 두 개의 동의가 제기되어 논란을 벌였다. 하나는 체코슬로바키아가 제의한 동의로서 북한대표를 초청하여 유엔정치위원회의 한국문제 토의에 참석시키자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중국이 제의한 동의로서 의장의 직권으로 대한민국 정부대표를 이 위원회에 초청하여 투표권을 부여하지 않는 조건으로 한국문제 토의에 참가시키자는 것이었다.
    북한은 10월7일에 박헌영(朴憲永), 홍명희(洪命憙), 이용(李龍), 홍기주(洪基疇), 박정애(朴正愛) 5명을 파리 유엔총회에 참석할 대표단으로 임명하고 외무상 박헌영 명의로 10월8일과 9일 두 번에 걸쳐 유엔사무총장 리와 제3차 유엔총회 의장 에벗(H. V. Evatt)에게 한국문제 토의에 참석시킬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고, 또 프랑스 외무상 쉬망(Robert Schuman)에게 프랑스 입국 사증을 발급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유엔총회는 이들의 총회 참석 요구를 거부했고, 프랑스 정부도 이들의 입국을 허가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들은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까지 가서 3개월 가까이 대기하고 있었다고 한다.49) 박헌영의 유엔총회 참석 요구에 관한 뉴스는 남한 신문에도 보도되고 있었다.50)    두 동의에 대한 표결 결과 체코슬로바키아 동의는 찬성 6표, 반대 34표, 기권 8표로 부결되고, 중국의 동의는 찬성 39표, 반대 6표, 기권 1표로 가결되었다. 그것은 이승만이 노심초사하며 기다린 축복의 첫 단계였다.
    주)49) 이정박헌영전집편집위원회 편,《이정 박헌영 전집(7)》, 역사비평사, 2004, pp.54~58 ; 趙炳玉,《特使유엔紀行》 50) 《朝鮮日報》1948년 10월13일자, <巴里에 北韓代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