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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search/view?relicId=942 정도사오층석탑조성형지기(淨兜寺五層石塔造成形之記) : 1031년(현종 22)]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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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kostma.korea.ac.kr/dir/list?uci=RIKS+CRMA+KSM-WZ.0000.0000-20180331.KY_W_524 정도사오층석탑조성형지기(淨兜寺五層石塔造成形止記)]
: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1121103570000&pageNo=1_1_2_0 칠곡 정도사지 오층석탑 (漆谷 淨兜寺址 五層石塔)]
: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1121103570000&pageNo=1_1_2_0 칠곡 정도사지 오층석탑 (漆谷 淨兜寺址 五層石塔)]



2021년 10월 10일 (일) 13:00 판

토성분정(土姓分定)은 한국의 성씨 기원설 중의 하나로, 전 영남대 교수 이수건(李樹健, 1935 ~ 2006)이 1984년에 펴낸 저서 "한국중세사회사연구(韓國中世社會史硏究)"에서 처음 제기한 것이다.[1][2][3]

개요

이수건 교수가 1984년에 처음 내놓은 토성분정설(土姓分定說)에 따르면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 940년에 전국의 군현을 개편할 때 지방 호족들의 해당 거주 지역 지배권을 어느 정도 인정해 주면서 그 지역을 본관(本貫)으로 하는 성씨(姓氏)를 가지게 하고, 해당 지역을 떠나 함부로 이동하지 못하도록 하는 통제 정책을 시행한 것이 한국 성씨와 본관(本貫)의 기원이라 한다. 신라 정부가 말기에 지방 호족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여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면서 망국에 이르는 과정을 잘 아는 태조가 호족들의 발호를 통제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이런 정책을 시행했다는 것이다.

중국 남북조시대 북위(北魏)의 효문제(孝文帝, 재위 471~499)가 시행한 성족분정(姓族分定) 정책에 착안하여 이런 명칭의 학설을 내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하는 명문화된 역사 기록도 없고, 실제 각 성씨의 기원도 이런 정책에 기원한다고 볼 수 없는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에 그다지 신빙성이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설을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인용하여 혼란이 야기되고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1454 단종 2년)에 나오는 각 지방의 토성(土姓)이 "옛 문적과 지금의 본도(本道) 관록(關錄)에 의거한 것"이라 한 말을 빌미로 옛 문적이 고려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단정하고 이런 주장을 한 것이지만, 실제로 그렇다는 증거는 없다. 토성분정이 실제로 있었다면 대다수 성본이 940년에 일시에 생겨난 것으로 보아야 하지만, 세종실록 지리지에 나오는 다수 토성의 시조의 시대는 실제로는 고려초부터 고려말까지 긴 기간에 걸쳐있으므로, 토성분정이란 정책이 실제로 시행되어에 대다수 성본이 고려 태조 때 생겨났다는 주장은 아무 설득력이 없다. 토성분정이 정말로 있었던 정책이라면 이런 중요한 정책이 고려사에 한 귀절도 나오지 않을 리가 없고, 실제 성씨의 역사적 사례들과 맞지도 않으므로, 이런 정책은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4] 토성(土姓)이라는 말 자체도 고려사(高麗史) 등 고려시대 문헌에는 어디에도 나오지 않으며, 경상도지리지 (慶尙道地理誌, 1425년, 세종 7)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서만 일시적으로 쓰이다 그 후 간행된 지리지들에서는 사라졌는데, 1984년에 이수건이 되살려낸 것이다.

비판

토성(土姓) 용어가 나오는 실제 기록

토성(土姓)이라는 용어는 고려 시대 기록에는 전혀 나오지 않고, 경상도지리지 (慶尙道地理誌, 1425년, 세종 7)[5]와 세종실록 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1454 단종 2년)에 주로 사용되었는데, 전국 각 지역마다 해당 지역의 성씨들을 토성(土姓), 속성(續姓), 가속성(加屬姓), 망성(亡姓), 내성(來姓) 등으로 분류하여 기록했다. 토성 용어는 이후 간행된 지리지나 군현지에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고려초에 시행되었다는 정책을 고려시대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용어를 써서 토성분정(土姓分定)이라 명명한 것도 적절하지 않은 것같다.

토성(土姓)이란 용어의 정의가 나옴.
토성(土姓)이 3이니, 이(李)·안(安)·김(金)이요, 가속성(加屬姓)이 3이니, 박(朴)·노(盧)·장(張)이요, 【이 6성은 옛 문적과 지금의 본도(本道) 관록(關錄)에 의거한 것이며, 그 가속성(加屬姓)이란 것은 옛 문적에 기록되어 있는 바이니, 뒤에도 모두 이와 같다. 】
망성(亡姓)이 5이니, 윤(尹)·석(石)·한(韓)·지(池)·소(素)이다. 【대개 망성(亡姓)이라 한 것은 옛 문적에만 있고 지금은 없음을 이름이니, 뒤에도 모두 이와 같다. 】

土姓三, 李、安、金; 加屬姓三, 朴、盧、張; 【此六姓, 據古籍及今本道附錄之。 其云加屬者, 古籍所書也。 後皆倣此。】 亡姓五, 尹、石、韓、池、素。 【凡稱亡姓, 謂古籍所有, 而今無者。 後皆倣此。】

이수건은 여기서 말하는 옛 문적은 고려초(940년)부터 전해온 것으로 말하나, 실제로 이때 작성된 문적들이 조선초까지 전해왔다고 믿기 어렵다. 극히 드물게 그런 기록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각 지방에 남아있는 옛 문적들이 모두 고려초에 작성된 것으로 믿을 근거는 없다. 1454년에 작성된 이런 막연한 기록을 근거로 전국 각 지역의 토성(土姓)들이 고려초 940년에 일시에 생겨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억측으로 보인다.

토성분정설과 맞지 않는 성관 기원 사례

세종실록 151권 지리지 / 전라도 / 남원 도호부 / 순창군 (地理志 / 全羅道 / 南原都護府 / 淳昌郡)
토성(土姓)이 5이니, 설(薛)·염(廉)·임(林)·조(趙)·옹(邕)이요, 속성(續姓)이 1이니 김(金)이다. 복흥(福興)의 성이 2이니, 임(林)·조(趙) 【아전[人吏]의 성(姓). 】 이요, 망성(亡姓)이 5이니, 예(芮)·호(扈) 【아전[人吏]의 성(姓). 】 ·이(李)·염(廉)·경(景) 【백성의 성(姓). 】 이요, 적성(赤城)의 성이 5이니 송(宋)·이(李)·정(程)·황(黃)·현(玄)이요, 유등촌(柳等村)의 성이 1이니 이(李)요, 망성(亡姓)이 2이니, 정(丁)·송(宋)이다.

土姓五, 薛、廉、林、趙、邕; 續姓一, 金。 福興姓二, 林、趙; 【人吏姓。】 亡姓五, 芮、扈、 【人吏姓】 李、廉、景。 【百姓姓。】 赤城姓五, 宋、李、程、黃、玄。 柳等村姓一, 李; 亡姓二, 丁、宋。
순창군(淳昌郡)의 토성(土姓)으로 설씨(薛氏)가 있다. 그러나 순창 설씨(淳昌薛氏)는 설총(薛聰)의 후손이며, 통도판서 설계영(薛繼泳)의 아들인 설자승(薛子升)[6]이 1124년(인종 2) 호부시랑(戶部侍郞)으로 재직할 때에 이자겸(李資謙)의 흉모를 미리 알고 몸을 피해 경상남도 하동(河東)으로 물러났다가 다시 전라북도 순창군(淳昌郡) 율북리(栗北里)로 옮겨 정착한 것에 유래하며, 이로부터 설자승(薛子升)은 순창설씨(淳昌薛氏)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즉 세종실록지리지에 순창의 토성으로 기록된 설씨(薛氏)는 실제로는 940년이 아니라 1124년 이후부터 있게된 것이다.


정도사오층석탑조성형지기(淨兜寺五層石塔造成形止記)
칠곡 정도사지 오층석탑 (漆谷 淨兜寺址 五層石塔)

다른 주장

채웅석(蔡雄錫)은 토성분정이 있었다는 것은 인정하면서 그 시행 시기가 940년 아닌 995년 (성종 14년)이라고 주장한다.

김수태(金壽泰)는 토성분정이 있었다는 것을 부인한다. 또 성(姓)과 본관(本貫)을 연결하여 호칭한 것은 고려중기 이후라고 한다.

각주

  1. 이수건(李樹健, 1935 ~ 2006), 한국중세사회사연구(韓國中世社會史硏究), 일조각(一潮閣), 1984년
  2. 한국중세사회사연구(韓國中世社會史硏究)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3. 이수건, 한국의 성씨와 족보,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4. 김수태(金壽泰), 高麗初期의 本貫制度 - 本貫과 姓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국중세사연구 제8호 43~70쪽, 2000) : 김수태는 토성분정설을 부인한다.
  5.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6. 설자승(薛子升)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