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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 설씨|순창 설씨(淳昌薛氏)]]
*[[순창 설씨|순창 설씨(淳昌薛氏)]]
: [http://sillok.history.go.kr/id/kda_40007003_001 세종실록 151권 지리지 / 전라도 / 남원 도호부 / 순창군 (地理志 / 全羅道 / 南原都護府 / 淳昌郡)]
: [http://sillok.history.go.kr/id/kda_40007003_001 세종실록 151권 지리지 / 전라도 / 남원 도호부 / 순창군 (地理志 / 全羅道 / 南原都護府 / 淳昌郡)]
{{인용문|토성(土姓)이 5이니, 설(薛)·염(廉)·임(林)·조(趙)·옹(邕)이요, 속성(續姓)이 1이니 김(金)이다. 복흥(福興)의 성이 2이니, 임(林)·조(趙) 【아전[人吏]의 성(姓). 】 이요, 망성(亡姓)이 5이니, 예(芮)·호(扈) 【아전[人吏]의 성(姓). 】 ·이(李)·염(廉)·경(景) 【백성의 성(姓). 】 이요, 적성(赤城)의 성이 5이니 송(宋)·이(李)·정(程)·황(黃)·현(玄)이요, 유등촌(柳等村)의 성이 1이니 이(李)요, 망성(亡姓)이 2이니, 정(丁)·송(宋)이다.<br>
{{인용문|토성(土姓)이 5이니, <u>설(薛)</u>·염(廉)·임(林)·조(趙)·옹(邕)이요, 속성(續姓)이 1이니 김(金)이다. 복흥(福興)의 성이 2이니, 임(林)·조(趙) 【아전[人吏]의 성(姓). 】 이요, 망성(亡姓)이 5이니, 예(芮)·호(扈) 【아전[人吏]의 성(姓). 】 ·이(李)·염(廉)·경(景) 【백성의 성(姓). 】 이요, 적성(赤城)의 성이 5이니 송(宋)·이(李)·정(程)·황(黃)·현(玄)이요, 유등촌(柳等村)의 성이 1이니 이(李)요, 망성(亡姓)이 2이니, 정(丁)·송(宋)이다.<br>
土姓五, 薛、廉、林、趙、邕; 續姓一, 金。 福興姓二, 林、趙; 【人吏姓。】 亡姓五, 芮、扈、 【人吏姓】 李、廉、景。 【百姓姓。】 赤城姓五, 宋、李、程、黃、玄。 柳等村姓一, 李; 亡姓二, 丁、宋。}}
土姓五, 薛、廉、林、趙、邕; 續姓一, 金。 福興姓二, 林、趙; 【人吏姓。】 亡姓五, 芮、扈、 【人吏姓】 李、廉、景。 【百姓姓。】 赤城姓五, 宋、李、程、黃、玄。 柳等村姓一, 李; 亡姓二, 丁、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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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원 윤씨|남원 윤씨(南原尹氏)]]와 [[함안 윤씨|함안 윤씨(咸安尹氏)]]
* [[남원 윤씨|남원 윤씨(南原尹氏)]]와 [[함안 윤씨|함안 윤씨(咸安尹氏)]]
: [http://sillok.history.go.kr/id/kda_40007003 세종실록 151권, 지리지 전라도(全羅道) 남원 도호부(南原都護府)]
: [http://sillok.history.go.kr/id/kda_40007003 세종실록 151권, 지리지 전라도(全羅道) 남원 도호부(南原都護府)]
{{인용문|토성(土姓)이 11이니, 양(梁)·정(鄭)·진(晉) 【아전[人吏]의 성이 되었다. 】 ·윤(尹)·양(楊)·견(甄)·황보(皇甫)·염(廉)·배(裵)·유(柳)·황(黃)이요, 【백성(百姓)의 성(姓)이다. 】 속성(續姓)이 3이니, 이(李)·임(林)·송(宋)이다. 【모두 향리(鄕吏)이다. 】 거령(居寧)의 성이 5이니, 백(白)·장(張)·한(韓)·이(李)·황(黃)이다.<br>
{{인용문|토성(土姓)이 11이니, 양(梁)·정(鄭)·진(晉) 【아전[人吏]의 성이 되었다. 】 ·<u>윤(尹)</u>·양(楊)·견(甄)·황보(皇甫)·염(廉)·배(裵)·유(柳)·황(黃)이요, 【백성(百姓)의 성(姓)이다. 】 속성(續姓)이 3이니, 이(李)·임(林)·송(宋)이다. 【모두 향리(鄕吏)이다. 】 거령(居寧)의 성이 5이니, 백(白)·장(張)·한(韓)·이(李)·황(黃)이다.<br>
土姓十一, 梁、鄭、晋、 【爲人吏姓。】 尹、楊、甄、皇甫、廉、裵、柳、黃; 【百姓姓。】 續姓三, 李、林、宋。 【皆鄕吏。】 居寧姓五, 白、張、韓、李、黃。}}
土姓十一, 梁、鄭、晋、 【爲人吏姓。】 尹、楊、甄、皇甫、廉、裵、柳、黃; 【百姓姓。】 續姓三, 李、林、宋。 【皆鄕吏。】 居寧姓五, 白、張、韓、李、黃。}}
: [http://sillok.history.go.kr/id/kda_40006004_003 세종실록 150권, 지리지 경상도(慶尙道) 진주목(晉州牧) 함안군(咸安郡)]
: [http://sillok.history.go.kr/id/kda_40006004_003 세종실록 150권, 지리지 경상도(慶尙道) 진주목(晉州牧) 함안군(咸安郡)]
{{인용문|토성(土姓)이 6이니, 이(李)·조(趙)·채(蔡)·윤(尹)·유(劉)·정(鄭)이요, 내성(來姓)이 2이니, 최(崔) 【죽산(竹山)에서 왔다. 】 ·김(金) 【금주(金州)에서 왔다. 】 이며, 속성(續姓)이 1이니, 강(姜)이다. 【근본은 자세히 알 수 없다. 지금 향리가 되었다. 】<br>
{{인용문|토성(土姓)이 6이니, 이(李)·조(趙)·채(蔡)·<u>윤(尹)</u>·유(劉)·정(鄭)이요, 내성(來姓)이 2이니, 최(崔) 【죽산(竹山)에서 왔다. 】 ·김(金) 【금주(金州)에서 왔다. 】 이며, 속성(續姓)이 1이니, 강(姜)이다. 【근본은 자세히 알 수 없다. 지금 향리가 되었다. 】<br>
土姓六, 李、趙、蔡、尹、劉、鄭; 來姓二, 崔、 【竹山來。】 金; 【金州來。】 續姓一, 姜。 【本未詳, 今爲鄕吏。】}}
土姓六, 李、趙、蔡、尹、劉、鄭; 來姓二, 崔、 【竹山來。】 金; 【金州來。】 續姓一, 姜。 【本未詳, 今爲鄕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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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ko.wikipedia.org/wiki/%EB%82%A8%EC%9B%90_%EC%9C%A4%EC%94%A8 남원 윤씨(南原 尹氏) 시조 윤위(尹威)] : 1176년(고려 명종 6년) 문과에 급제<ref>[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KM_5COb_1176_000401&curSetPos=1&curSPos=0&category=dirSer&isEQ=true&kristalSearchArea=P 윤위(尹威) 문과방목]  : 명종(明宗) 6년(1176) 문과 급제</ref>
: [https://ko.wikipedia.org/wiki/%EB%82%A8%EC%9B%90_%EC%9C%A4%EC%94%A8 남원 윤씨(南原 尹氏) 시조 윤위(尹威)] : 1176년(고려 명종 6년) 문과에 급제<ref>[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KM_5COb_1176_000401&curSetPos=1&curSPos=0&category=dirSer&isEQ=true&kristalSearchArea=P 윤위(尹威) 문과방목]  : 명종(明宗) 6년(1176) 문과 급제</ref>
: [https://ko.wikipedia.org/wiki/%ED%95%A8%EC%95%88_%EC%9C%A4%EC%94%A8 함안 윤씨(咸安 尹氏) 시조 윤돈(尹敦)] : 고려 원종(元宗) 때 문과에 급제
: [https://ko.wikipedia.org/wiki/%ED%95%A8%EC%95%88_%EC%9C%A4%EC%94%A8 함안 윤씨(咸安 尹氏) 시조 윤돈(尹敦)] : 고려 원종(元宗) 때 문과에 급제
 
===고려 초에 사용된 "본관"의 의미===
===고려 초에 사용된 "본관"의 의미===
* [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search/view?relicId=942 정도사오층석탑조성형지기(淨兜寺五層石塔造成形止記) : 1031년(현종 22)] 국립중앙박물관
* [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search/view?relicId=942 정도사오층석탑조성형지기(淨兜寺五層石塔造成形止記) : 1031년(현종 22)] 국립중앙박물관

2021년 10월 12일 (화) 09:20 판

토성분정(土姓分定)은 고려 태조가 후삼국 통일 직후인 940년에 전국의 군현을 개편하면서 시행했다는 정책으로, 각 지방의 유력자들을 통제하기 위해 그들에게 성씨와 본관을 가지게 하며 기득권을 어느 정도 인정해 주는 대신, 타 지역으로의 이동과 세력 확장을 억제한 것이 한국 각 성씨 본관의 기원이라 한다. 전 영남대 교수 이수건(李樹健)이 1984년에 처음 내놓은 학설로, 이에 따르면 각 성씨 본관이 대부분 940년에 일시에 생겨난 것이 되어야 하나, 실제 각 성씨의 유래는 다양하고 제각각이므로 사실과는 거리가 먼 주장으로 보인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설이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인용하여 혼란이 초래되고 있다.

개요

토성분정설(土姓分定說)은 전 영남대 교수 이수건(李樹健, 1935 ~ 2006)이 1984년에 펴낸 저서 "한국중세사회사연구(韓國中世社會史硏究)"에서 처음 제기한 것이다.[1][2][3] 이에 따르면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 940년(태조 23년)에 전국의 군현을 개편할 때 지방 호족들의 해당 거주 지역 지배권을 어느 정도 인정해 주면서 그 지역을 본관(本貫)으로 하는 성씨(姓氏)를 가지게 하고, 해당 지역을 떠나 함부로 이동하며 세력확장을 하지 못하도록 통제한 것이 한국 성씨와 본관(本貫)의 기원이라 한다. 신라 정부가 말기에 지방 호족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여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면서 망국에 이르는 과정을 잘 아는 태조가 호족들의 발호를 통제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이런 정책을 시행했다는 것이다.

중국 남북조시대 북위(北魏)의 효문제(孝文帝, 재위 471~499)가 시행한 성족분정(姓族分定) 정책에 착안하여 이런 명칭의 학설을 내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하는 명문화된 역사 기록도 없고, 실제 각 성씨의 기원도 이런 정책에 기원한다고 볼 수 없는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에 그다지 신빙성이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설을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인용하여 혼란이 야기되고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1454 단종 2년)에 나오는 2000여개나 되는 각 지방의 토성(土姓)들이 그 지역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라고 했지만, 과연 그런 성관(姓貫)이 모두 실존했는지도 의문이다. 나아가 토성이 "옛 문적과 지금의 본도(本道) 관록(關錄)에 의거한 것"이라는 말을 근거로 옛 문적이 고려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단정하고 940년에 토성분정이 있었다는 주장을 했지만, 실제로 그렇다는 증거는 없다. 또 고려 중기 이후 이미 많은 성관의 사람들이 본관지 밖으로도 이주해 가서 살고 있었는데,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이런 사람들의 성씨도 거주 지역의 토성으로 기록된 경우가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성씨의 실제 본관은 토성으로 기록된 지역과는 다를 수 밖에 없다.

토성분정이 실제로 있었다면 대다수 성본이 940년에 일시에 생겨난 것으로 보아야 하지만, 세종실록 지리지에 나오는 다수 토성의 시조의 시대는 실제로는 신라 때부터 고려말까지 긴 기간에 걸쳐있으므로, 토성분정이란 정책이 실제로 시행되어 대다수 성본이 고려 태조 때 생겨났다는 주장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토성분정이 정말로 있었던 정책이라면 이런 중요한 정책이 고려사에 한 구절도 나오지 않을 리가 없고, 실제 성씨의 역사적 사례들과 맞지도 않으므로, 이런 정책은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4]

토성(土姓)이라는 말 자체도 고려사(高麗史) 등 고려시대 문헌에는 어디에도 나오지 않으며, 경상도지리지 (慶尙道地理誌, 1425년, 세종 7)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서만 일시적으로 쓰이다 그 후 간행된 지리지들에서는 사라졌는데, 1984년에 이수건이 되살려낸 것이다.

비판

토성(土姓) 용어가 나오는 실제 기록

토성(土姓)이라는 용어는 고려 시대 기록에는 전혀 나오지 않고, 경상도지리지 (慶尙道地理誌, 1425년, 세종 7)[5]와 세종실록 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1454 단종 2년)에 주로 사용되었는데, 전국 각 지역마다 해당 지역의 성씨들을 토성(土姓), 속성(續姓), 가속성(加屬姓), 망성(亡姓), 내성(來姓) 등으로 분류하여 기록했다. 토성 용어는 이후 간행된 지리지나 군현지에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고려초에 시행되었다는 정책을 고려시대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용어를 써서 토성분정(土姓分定)이라 명명한 것도 적절하지 않은 것같다.

토성(土姓)이란 용어의 정의가 나옴.
토성(土姓)이 3이니, 이(李)·안(安)·김(金)이요, 가속성(加屬姓)이 3이니, 박(朴)·노(盧)·장(張)이요, 【이 6성은 옛 문적과 지금의 본도(本道) 관록(關錄)에 의거한 것이며, 그 가속성(加屬姓)이란 것은 옛 문적에 기록되어 있는 바이니, 뒤에도 모두 이와 같다. 】
망성(亡姓)이 5이니, 윤(尹)·석(石)·한(韓)·지(池)·소(素)이다. 【대개 망성(亡姓)이라 한 것은 옛 문적에만 있고 지금은 없음을 이름이니, 뒤에도 모두 이와 같다. 】

土姓三, 李、安、金; 加屬姓三, 朴、盧、張; 【此六姓, 據古籍及今本道附錄之。 其云加屬者, 古籍所書也。 後皆倣此。】 亡姓五, 尹、石、韓、池、素。 【凡稱亡姓, 謂古籍所有, 而今無者。 後皆倣此。】

이수건은 여기서 말하는 옛 문적은 고려초(940년)부터 전해온 것으로 말하나, 실제로 이때 작성된 문적들이 조선초까지 전해왔다고 믿기 어렵다. 극히 드물게 그런 기록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1454년에 각 지방에 남아있던 옛 문적들이 모두 고려초에 작성된 것으로 믿을 근거는 없다. 1454년에 작성된 이런 막연한 기록을 근거로 전국 각 지역의 토성(土姓)들이 고려초 940년에 일시에 생겨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억측으로 보인다.

토성분정설과 맞지 않는 성관 기원 사례

세종실록 지리지에 나오는 토성들이 모두 940년에 처음 생겼다는 주장이 해당 지역을 본관으로 하는 실제 성씨 시조의 연대와 맞지 않는 경우가 다수 발견된다. 일일이 다 찾아내기는 어렵지만 우선 아래와 같은 경우가 눈에 띈다. 이런 사례들은 각 지역의 토성이 940년에 처음 생겨났다는 토성분정설이 실제와 맞지 않는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세종실록 151권 지리지 / 전라도 / 남원 도호부 / 순창군 (地理志 / 全羅道 / 南原都護府 / 淳昌郡)
토성(土姓)이 5이니, 설(薛)·염(廉)·임(林)·조(趙)·옹(邕)이요, 속성(續姓)이 1이니 김(金)이다. 복흥(福興)의 성이 2이니, 임(林)·조(趙) 【아전[人吏]의 성(姓). 】 이요, 망성(亡姓)이 5이니, 예(芮)·호(扈) 【아전[人吏]의 성(姓). 】 ·이(李)·염(廉)·경(景) 【백성의 성(姓). 】 이요, 적성(赤城)의 성이 5이니 송(宋)·이(李)·정(程)·황(黃)·현(玄)이요, 유등촌(柳等村)의 성이 1이니 이(李)요, 망성(亡姓)이 2이니, 정(丁)·송(宋)이다.
土姓五, 薛、廉、林、趙、邕; 續姓一, 金。 福興姓二, 林、趙; 【人吏姓。】 亡姓五, 芮、扈、 【人吏姓】 李、廉、景。 【百姓姓。】 赤城姓五, 宋、李、程、黃、玄。 柳等村姓一, 李; 亡姓二, 丁、宋。
순창군(淳昌郡)의 토성(土姓)으로 설씨(薛氏)가 있다. 그러나 순창 설씨(淳昌薛氏)는 설총(薛聰)의 후손이며, 통도판서 설계영(薛繼泳)의 아들인 설자승(薛子升)[6]이 1124년(인종 2) 호부시랑(戶部侍郞)으로 재직할 때에 이자겸(李資謙)의 흉모를 미리 알고 몸을 피해 경상남도 하동(河東)으로 물러났다가 다시 전라북도 순창군(淳昌郡) 율북리(栗北里)로 옮겨 정착한 것에 유래하며, 이로부터 설자승(薛子升)은 순창설씨(淳昌薛氏)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즉 세종실록지리지에 순창의 토성으로 기록된 설씨(薛氏)는 실제로는 940년이 아니라 1124년 이후부터 있게된 것이다.
세종실록 151권, 지리지 전라도(全羅道) 남원 도호부(南原都護府)
토성(土姓)이 11이니, 양(梁)·정(鄭)·진(晉) 【아전[人吏]의 성이 되었다. 】 ·윤(尹)·양(楊)·견(甄)·황보(皇甫)·염(廉)·배(裵)·유(柳)·황(黃)이요, 【백성(百姓)의 성(姓)이다. 】 속성(續姓)이 3이니, 이(李)·임(林)·송(宋)이다. 【모두 향리(鄕吏)이다. 】 거령(居寧)의 성이 5이니, 백(白)·장(張)·한(韓)·이(李)·황(黃)이다.
土姓十一, 梁、鄭、晋、 【爲人吏姓。】 尹、楊、甄、皇甫、廉、裵、柳、黃; 【百姓姓。】 續姓三, 李、林、宋。 【皆鄕吏。】 居寧姓五, 白、張、韓、李、黃。
세종실록 150권, 지리지 경상도(慶尙道) 진주목(晉州牧) 함안군(咸安郡)
토성(土姓)이 6이니, 이(李)·조(趙)·채(蔡)·윤(尹)·유(劉)·정(鄭)이요, 내성(來姓)이 2이니, 최(崔) 【죽산(竹山)에서 왔다. 】 ·김(金) 【금주(金州)에서 왔다. 】 이며, 속성(續姓)이 1이니, 강(姜)이다. 【근본은 자세히 알 수 없다. 지금 향리가 되었다. 】
土姓六, 李、趙、蔡、尹、劉、鄭; 來姓二, 崔、 【竹山來。】 金; 【金州來。】 續姓一, 姜。 【本未詳, 今爲鄕吏。】
전라도 남원(南原)과 경상도 함안군(咸安)의 토성으로 윤씨(尹氏)가 있지만, 실제의 남원 윤씨 시조 윤위(尹威)와 함안 윤씨 시조 윤돈(尹敦)은 파평 윤씨(坡平尹氏) 윤관(尹瓘, 1040~1111)의 후손으로 고려 태조 때보다 훨씬 후대의 사람이며, 940년에 있었다는 토성분정과 어떤 관련도 있기 어렵다.
윤관(尹瓘) - 윤언인(尹彦仁) - 윤덕첨(尹德瞻) - 윤위(尹威, 남원 윤씨 시조) - 윤극민(尹克敏) - 윤돈(尹敦, 함안 윤씨 시조)
남원 윤씨(南原 尹氏) 시조 윤위(尹威) : 1176년(고려 명종 6년) 문과에 급제[7]
함안 윤씨(咸安 尹氏) 시조 윤돈(尹敦) : 고려 원종(元宗) 때 문과에 급제

고려 초에 사용된 "본관"의 의미

정도사오층석탑조성형지기(淨兜寺五層石塔造成形止記) 고려대 해외한국학자료센터
칠곡 정도사지 오층석탑 (漆谷 淨兜寺址 五層石塔)

석탑 조성 참여자들 대다수가 성(姓)이 없고, '본관(本貫)'이라는 말이 성(姓)과 무관하게 출신지 정도의 의미로 쓰임.

맨 끝에 성이 없는 승려 이름 다음에 본관이 어디라고 적어놓은 것은 성씨 본관이 아닌 출신 지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봐야할 것이다. 1031년에 본관이라는 말이 오늘날의 성씨의 본관과는 다른 의미로 쓰였다면, 각 성씨와 본관이 태조 때인 940년에 일시에 생겨났다는 주장과 배치된다.

다른 주장

채웅석(蔡雄錫)은 토성분정이 있었다는 것은 인정하면서 그 시행 시기가 940년 아닌 995년 (성종 14년)이라고 주장한다.


김수태(金壽泰)는 토성분정이 있었다는 것을 부인한다. 또 성(姓)과 본관(本貫)을 연결하여 호칭한 것은 고려중기 이후라고 한다.


안광호(安光鎬, 한국고전번역원)는 토성분정은 역사적으로 실체를 확인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현재의 본관 제도와는 이질적이라고 반박한다.

역사학을 전공해 중국 난카이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안광호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이 혈연 제도 일종인 중국 군망(郡望)과 한국 본관(本貫)을 분석했다. 저자가 쓴 다양한 논문을 종합하고 보완해 단행본으로 펴냈다.

그는 중국 청하최씨(淸河崔氏)와 한국 남양홍씨(南陽洪氏)를 표본으로 살펴 두 씨족이 청하와 남양 지역을 떠난 뒤에도 근거지를 잃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이어 본관과 유사한 중국 군망 제도를 대부분의 한자어 사전이 '한 군 단위 내의 망족(望族)'이라고 정의하지만, 역사적으로는 '원조의 본적지'라는 의미로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한국 본관 제도가 고려 초기에 시행한 토성분정(土姓分定) 제도에서 비롯됐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국가가 지방 통치를 위해 분배한 토성에서 본관이 나왔다는 설은 역사적으로 실체를 확인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현재의 본관 제도와는 이질적이다"라고 반박한다.
안광호 지음, 중국의 군망제도와 한국의 본관제도 연구 - 한중 전통기 사회의 성격 비교 솔벗한국학총서 23 (지식산업사, 2019-10-29)

토성분정을 역사적 사실로 간주한 사례

토성분정설은 이수건이 1984년에 처음 내놓은 학설로 역사기록에는 전혀 나오지 않지만, 이를 역사 기록에 나오는 사실로 잘못 알고 성씨 본관의 기원으로 설명하는 사례는 부지기수로 많다.

박종기 저, 고려사의 재발견: 한반도 역사상 가장 개방적이고 역동적인 500년 고려 역사를 만나다 휴머니스트 2015년 05월 11일
박종기 【고려사의 재발견】 : 요약(60) 중앙선데이 2016.09.04
안양시사 2 : 이야기와 인물로 보는 안양 / 제4편 성씨와 인물 / 제1장 성씨와 집성촌 / 제1절 성씨 안양시사편찬위원회 2008-10-27
본관 제도 확산

세력이 있는 가문에게 본관과 성을 부여하는 제도는 통일 신라 때도 존재했다.
그러나 일반 서민, 호족들에게도 본관과 성을 부여하는 제도가 확산된 것은 고려 때의 일이다. 후삼국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협조한 세력들에게 거주지를 본관으로 하는 새로운 성을 부여했다.

'토성분정‘ 제도라고 한다. 한 예로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할 때 옛 신라지역의 지배 세력이었던 김행이 안동 지역에서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건국 후 930년에 태조 왕건은 김행에게 안동을 본관으로 하는 권씨라는 성을 부여했다. 지금 남아있는 안동 권씨, 안동 장씨, 안동 김씨가 그 때 부여받은 본관과 성에서 이어지는 것이다.
지금은 누구나 다 성씨를 가지고 있지만 적어도 성씨가 일반적으로 보편화된 건 고려시대에 접어들어서입니다.

고려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나서 각 지역에 토착하고 있는 호족세력들에게 성씨와 본관을 지정해줬죠. 그것을 토성분정이라고 합니다.

토성이라는 것은 지연적인 의미의 토자와 그다음에 혈연적인 의미의 성자 두 개가 합쳐진 의미입니다. 지연과 혈연이 합쳐진 토성.

그러니까 태조 왕건이 토성을 전부 나눠줬다는 것은 뭐냐하면 골품제도가 붕괴되고 새로운 사회 질서를 마련하기 위해서 각 지역에 있는 세력들을 자기의 품 안에 넣기 위해서 사회통합 차원에서 너는 어디에 무슨 성씨다, 너는 어디에 무슨 성씨다 이런 의미입니다.

참고 자료

각주

  1. 이수건(李樹健, 1935 ~ 2006), 한국중세사회사연구(韓國中世社會史硏究), 일조각(一潮閣), 1984년
  2. 한국중세사회사연구(韓國中世社會史硏究)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3. 이수건, 한국의 성씨와 족보,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4. 김수태(金壽泰), 高麗初期의 本貫制度 - 本貫과 姓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국중세사연구 제8호 43~70쪽, 2000) : 김수태는 토성분정설을 부인한다.
  5.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6. 설자승(薛子升)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7. 윤위(尹威) 문과방목  : 명종(明宗) 6년(1176) 문과 급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