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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한영애와 홍태식의 체포 및 석방 기사==
==1932년 한영애와 홍태식의 체포 및 석방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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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932년 7월 동아일보 홍태식-한영애 기사.jpg|[[동아일보]] 1932년 7월 7일자와 15일자의 한영애와 홍태식 체포 및 석방 기사.
파일:1932년 7월 동아일보 홍태식-한영애 기사.jpg|[[동아일보]] 1932년 7월 7일 및 15일자의 한영애와 홍태식 체포 및 석방 기사.
파일:1932년 7월 매일신보 홍태식-한영애 기사.jpg|[[매일신보]] 1932년 7월 6일자의 한영애와 홍태식 체포 및 석방 기사.
파일:1932년 7월 매일신보 홍태식-한영애 기사.jpg|[[매일신보]] 1932년 7월 6일, 7일 및 14일자의 한영애와 홍태식 체포 및 석방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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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2일 (화) 14:13 판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2권 p.79의 한영애(韓英愛, 1915~1951) 사진.

한영애(韓英愛, 1915[1]~1951)는 1930년 무렵 북한 김일성(1912~1994)의 첫 애인이었다.


김일성의 첫 애인 한영애(韓英愛)

  • 1930년 무렵에 김일성의 첫 애인 한영애(韓英愛, 1915~1951)가 있었다.[2][3][4]
    18일 입수된 북한 예술잡지 '조선예술' 9월호에 따르면 이들 형제는 지난해 말 제작된 영화 '고귀한 이름'(2부작)의 시나리오와 감독을 맡았다.

    이 영화는 1920년대 말 고(故) 김일성 주석과 함께 반일지하투쟁을 했던 한영애(여)라는 실제 인물의 일대기를 담고 있다.

    한영애는 김 주석과 함께 반일투쟁을 했던 일부 사람들이 김 주석을 배신하고 일제의 귀순공작에 참여했지만 끝까지 지조를 지켰으며 광복 이후에도 김 주석을 위해 헌신적으로 투쟁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5][6]
    김일성을 찾을 수 없었던 한영애는 서울에서 결혼하였는데 남조선 노동당 당원이었던 그의 남편이 김일성이 일으킨 6.25남침 전쟁에서 희생되었고 한영애도 평양에 왔다가 1951년 8월 14일 밤에 폭격으로 두 아이와 함께 희생되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도 회고록에서 김일성이 “한영애가 남편이 피살된 후에는 나를 찾아간다고 하면서 아이들을 데리고 평양에 들어왔으나 나를 만나지 못하고 1951년 8월 14일 밤 적들의 폭격에 두 아이와 함께 애석하게도 희생되었다”고 한 내용이 기억나실 것입니다.

    김일성은 한영애를 회고하면서 “그가 평양까지 들어왔다가 나를 만나보지 못하고 폭격에 희생된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애석한 심정을 금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나의 청춘 시절에 큰 자국을 남긴 한영애의 아름다운 넋을 사진에서 찾으며 마음속으로 감사를 드리곤 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김일성 회고록의 한영애 기록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2권 4장의 "7절 1930년 여름"에 한영애에 대한 이야기가 자세히 나온다. 사실과 허구가 뒤섞인 내용으로 보이지만 정확한 구분은 어렵다.

1932년 한영애와 홍태식의 체포 및 석방 기사

홍태식 및 홍기문과의 관계

설명

참고 자료


각주

  1. 1932년 체포될 당시 18세였다.
  2. 김일성과 하얼빈의 인연(종합) 연합뉴스 2010-08-29 23:32
  3. 김일성과 하얼빈의 인연 : 첫 애인 한영애와 함께 도피..코민테른 접촉 연합뉴스 2010-08-29 23:03
  4. 하얼빈은 김일성이 첫 애인과 도주한 곳 조선일보 2010.08.30
  5. <주목받는 북 형제 영화인> 연합뉴스 2004.11.18. 오전 6:43
  6. 주목받는 북 형제 영화인 (사진) 연합뉴스 2004.11.18. 오전 8: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