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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의 첫 애인 한영애(韓英愛)==
==김일성의 첫 애인 한영애(韓英愛)==
김일성은 간도폭동 후의 검거를 피해 1930년 여름 한영애와 함께 하얼빈으로 도피해 있었다고 한다. 얼마 후 김일성은 한영애만 남겨두고 하얼빈을 떠났고, 이후 두 사람은 다시는 만난 적이 없다고 한다. 한영애는 별 대단한 활동을 한 것도 없고, 김일성과의 관계도 별로 오래 지속되지도 못했지만 북한은 한영애와의 이런 조그만한 인연까지 끌어와 김일성 미화에 이용하고 있다.
* 1930년 무렵에 김일성의 첫 애인으로 한영애(韓英愛, 1915~1951)가 있었다.<ref>[https://www.yna.co.kr/view/AKR20100829082700097 김일성과 하얼빈의 인연(종합)] 연합뉴스 2010-08-29 23:32</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4628937 김일성과 하얼빈의 인연 : 첫 애인 한영애와 함께 도피..코민테른 접촉] 연합뉴스 2010-08-29 23:03</ref><ref>[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8/30/2010083001456.html 하얼빈은 김일성이 첫 애인과 도주한 곳] 조선일보 2010.08.30</ref>
* 1930년 무렵에 김일성의 첫 애인으로 한영애(韓英愛, 1915~1951)가 있었다.<ref>[https://www.yna.co.kr/view/AKR20100829082700097 김일성과 하얼빈의 인연(종합)] 연합뉴스 2010-08-29 23:32</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4628937 김일성과 하얼빈의 인연 : 첫 애인 한영애와 함께 도피..코민테른 접촉] 연합뉴스 2010-08-29 23:03</ref><ref>[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8/30/2010083001456.html 하얼빈은 김일성이 첫 애인과 도주한 곳] 조선일보 2010.08.30</ref>



2024년 4월 3일 (수) 11:26 판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2권 p.79의 한영애(韓英愛, 1915~1951) 사진.

한영애(韓英愛, 1915[1]~1951.08.24[2])는 1930년 무렵 북한 김일성(1912~1994)의 첫 애인이었다. 김일성이 일으킨 6.25 남침 전쟁으로 폭격을 맞아 자녀들과 함께 1951년 8월 사망했다고 한다.


김일성의 첫 애인 한영애(韓英愛)

김일성은 간도폭동 후의 검거를 피해 1930년 여름 한영애와 함께 하얼빈으로 도피해 있었다고 한다. 얼마 후 김일성은 한영애만 남겨두고 하얼빈을 떠났고, 이후 두 사람은 다시는 만난 적이 없다고 한다. 한영애는 별 대단한 활동을 한 것도 없고, 김일성과의 관계도 별로 오래 지속되지도 못했지만 북한은 한영애와의 이런 조그만한 인연까지 끌어와 김일성 미화에 이용하고 있다.

  • 1930년 무렵에 김일성의 첫 애인으로 한영애(韓英愛, 1915~1951)가 있었다.[3][4][5]
주목받는 북 형제 영화인 (사진) 연합뉴스 2004.11.18. 오전 8:33
    18일 입수된 북한 예술잡지 '조선예술' 9월호에 따르면 이들 형제는 지난해 말 제작된 영화 '고귀한 이름'(2부작)의 시나리오와 감독을 맡았다.

    이 영화는 1920년대 말 고(故) 김일성 주석과 함께 반일지하투쟁을 했던 한영애(여)라는 실제 인물의 일대기를 담고 있다.

    한영애는 김 주석과 함께 반일투쟁을 했던 일부 사람들이 김 주석을 배신하고 일제의 귀순공작에 참여했지만 끝까지 지조를 지켰으며 광복 이후에도 김 주석을 위해 헌신적으로 투쟁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김일성을 찾을 수 없었던 한영애는 서울에서 결혼하였는데 남조선 노동당 당원이었던 그의 남편이 김일성이 일으킨 6.25남침 전쟁에서 희생되었고 한영애도 평양에 왔다가 1951년 8월 14일 밤에 폭격으로 두 아이와 함께 희생되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도 회고록에서 김일성이 “한영애가 남편이 피살된 후에는 나를 찾아간다고 하면서 아이들을 데리고 평양에 들어왔으나 나를 만나지 못하고 1951년 8월 14일 밤 적들의 폭격에 두 아이와 함께 애석하게도 희생되었다”고 한 내용이 기억나실 것입니다.

    김일성은 한영애를 회고하면서 “그가 평양까지 들어왔다가 나를 만나보지 못하고 폭격에 희생된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애석한 심정을 금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나의 청춘 시절에 큰 자국을 남긴 한영애의 아름다운 넋을 사진에서 찾으며 마음속으로 감사를 드리곤 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김일성 회고록의 한영애 기록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2권 4장의 "7절 1930년 여름"에 한영애에 대한 이야기가 자세히 나온다. 사실과 허구가 뒤섞인 내용으로 보이지만 정확한 구분은 어렵다.

한영애는 6.25 전쟁중 자녀들을 데리고 김일성을 만나러 가다 1951년 8월 24일 폭격으로 사망했다고 했는데, 그녀는 과거 애인이었던 김일성이 일으킨 전쟁의 희생자가 된 셈이다.

1932년 한영애와 홍태식의 체포 및 석방 기사

1932년 5월 7일 만주 하얼빈(哈爾濱, 哈尔滨)에서 중국공산당원 임무심(林筮心, 22세), 오춘성(吳春成, 20세), 홍태식(洪台植, 33세), 조철구(趙喆九, 24세), 이대우(李大雨, 24세), 한영극(韓永極, 25세)과 여자 한영애(韓英愛, 18세) 등 7명이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6월 27일 안동현(安東縣)[6]을 경유하여 신의주서(新義州署)에 인도되었다. 이들은 이(李) 사법주임의 엄중한 취조를 받아오다 조철구, 이대우, 한영극 및 한영애등 4명은 7월 4일 석방되었고, 임무심, 오춘성 및 홍태식 등 3명은 신의주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어 모리우라(森浦) 사상검사의 심문을 받았으나 이들도 기소되지 않고 7월 12일까지 전후하여 모두 석방되었다. 이들 7명은 모두 징역등 형사처벌은 면했으나 만주에서 이미 재류금지(在留禁止)의 선고를 받았으므로[7] 갈데가 없어 관서여관(關西旅館)에 유숙(留宿) 중이라 하였다.

이런 사실은 아래와 같은 1932년 7월 동아일보매일신보 기사에 나온다.

여기서 주목되는 인물은 하얼빈에서 체포된 한영애(韓英愛, 18세)와 홍태식(洪台植, 33세)이다.

한영애(韓英愛)는 당시 하얼빈에 조선 여자로 다른 사람이 또 있었다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에 김일성의 애인과 동일인이 맞을 것이다. 그녀는 1932년에 18세(한국식 나이)라니 1915년생으로 김일성보다 세살 아래이다. 김일성 회고록에는 그녀가 1930년 여름 일경에 체포되어 신의주 감옥에서 징역형을 살면서, 당시 같은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김일성의 왕년의 상관 이종락(李鐘洛)과도 대화가 있었던 것처럼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한영애는 하얼빈에서 1932년 5월 체포되어 신의주서까지 압송되어 오기는 했으나 검찰로 넘어가지는 않고 바로 석방되었으므로, 1931년 1월에 체포되어 신의주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아직도 1심 재판 중이던 이종락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홍태식(洪台植, 1900~?)은 2019년 광복절에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었는데,[8] 그는 충청북도 괴산 출신으로 1919년 3.1운동홍명희(洪命熹)가 주도하는 괴산의 시위에 참가했다가 검거되었으나 학생신분이라 불기소 처분을 받았고,[9] 홍명희의 가까운 친척이다.(아래 참고)

홍태식과 홍명희 및 홍기문과의 관계

아래 1933년 간행 풍산 홍씨(豊山 洪氏) 족보에 홍태식(洪台植, 1900~?)은 홍승목(洪承穆, 1847~1925)의 막내 아들이자 홍명희(洪命憙, 1888~1968)의 막내 삼촌으로 나오는데, 나이는 조카 홍명희보다 12살 아래이다. 그는 홍명희의 부친 홍범식(洪範植, 1871~1910)의 이복 동생이다. 홍태식의 부인은 조선말의 척족 여흥 민씨(驪興 閔氏) 집안으로 민정식(閔正植, 1848~1914)의 딸이다.[10]

홍명희의 삼촌으로 충북 괴산 출신 1900년생(高宗 庚辰生) 홍태식과 1932년 하얼빈에서 체포된 33세의 홍태식이 동일인지에 대해 의문이 있을 수 있겠으나, 이름 한자가 같고, 나이가 일치하므로 맞을 것이다. 홍태식의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는 3.1운동 때의 괴산의 홍태식과 1932년 하얼빈에서 체포된 홍태식을 같은 사람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추가적인 근거가 더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 회고록에 신의주 감옥에서 징역을 살고 나온 한영애가 서울의 홍명희 아들 집에 한동안 머물렀다고 했다. 이는 뜬금없는 말로 보이기도 하나, 같이 체포되었다 풀려난 홍태식이 홍명희의 삼촌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불가능한 일은 아닌 것 같다. 한영애나 홍태식은 신의주에서 기소되지는 않고 풀려났으나 만주에서 이미 재류금지(在留禁止)[7] 처분을 받았으므로 만주로는 갈 수 없었기 때문에 서울로 가서 한동안 홍명희의 아들 홍기문(洪起文, 1903~1992)의 집에 신세를 졌을 가능성은 있는 것같다. 홍태식에게는 이런 일을 12살이나 위인 조카 홍명희보다는 3살 아래인 종손자 홍기문에게 부탁하는게 더 편했을 것같다.

김일성은 1930년 여름 한영애와 하얼빈으로 도피했다가 한영애만 하얼빈에 남겨둔 채 떠난 이후 그녀를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녀가 신의주 감옥에 있다 석방된 후 서울에서 홍명희의 아들 집에 머물렀고, 남로당 인물과 결혼했으며, 6.25 전쟁중 자녀들을 데리고 김일성을 만나러 가다 1951년 8월 24일 폭격으로 사망했다고 했는데, 이런 말들이 사실이라면 한영애의 후일 소식을 홍기문(洪起文)으로부터 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1932년 하얼빈에서 체포됐다 재류금지 처분을 받고, 신의주에서 석방된 이후 홍태식의 행적은 알려진 것이 없다. 풍산홍씨 족보나 보훈부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도 그 후의 그의 행적은 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다. 홍명희와 아들들은 해방 후 모두 북한으로 갔으므로, 공산주의자였던 홍태식도 생존해 있었다면 북한으로 갔을 가능성이 크다.

1933년에 간행된 풍산 홍씨(豊山 洪氏) 족보에 나오는 홍태식(洪台植)의 가계. 홍태식은 홍승목(洪承穆)의 막내 아들로 홍명희의 삼촌이자 홍기문의 종조부(조부의 형제)이며, 1900년생(高宗 庚辰生)이다.

참고 자료


각주

  1. 1932년 체포될 당시 18세였다.
  2.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2권 4장 "7절 1930년 여름"
  3. 김일성과 하얼빈의 인연(종합) 연합뉴스 2010-08-29 23:32
  4. 김일성과 하얼빈의 인연 : 첫 애인 한영애와 함께 도피..코민테른 접촉 연합뉴스 2010-08-29 23:03
  5. 하얼빈은 김일성이 첫 애인과 도주한 곳 조선일보 2010.08.30
  6. 1965년에 지금의 명칭 단동시(丹東市)로 개칭하였다 : 단동(丹東)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7. 7.0 7.1 일본 ‘재류금지’로 독립운동 탄압 : 간도지역 거주 조선인 사상과 행동 통제 수단으로 사용 2010.10.19 위클리경향 896호
  8. 홍태식(洪台植)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공훈전자사료관
  9. 홍태식(洪台植) :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청주지검 1919.03.31(불기소)
  10. 민정식(閔正植, 1848~1914) 문과방목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