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무개혁은 1896년 고종대한제국 정부의 집권층이 주도한 근대적 개혁이다.[1] 그러나 이영훈 교수는 "고종이 개명군주였고 그가 근대화 노력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주장은, 고종 시대의 방대한 사료에 대한 분석 없이 교수라는 신분적 위세를 이용해서 사회적 명예를 낚기 위한 학문적 사기"라고 단정지었다.[2]

내용

광무개혁은 1896년 아관파천 직후부터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주로 보수파가 주도하였다. 1894년의 갑오개혁과 1895년의 을미개혁은 비록 외세의 종용과 간섭이 있기는 했지만, 1876년 개항 이후에 확산된 개화사상을 정책적으로 구현하고 동학농민운동 이후엔 발생한 과제들을 수습하기 위한 시도로 평가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경장(更張)사업은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성립된 정부에서도 추진하지 않으면 안 될 과제였다.

광무개혁을 주도한 인물은 윤용선(尹容善)·심순택(沈舜澤)·박정양(朴定陽)·민병석(閔丙奭)·심상훈(沈相薰)·박제순(朴齊純)·민영환(閔泳煥)·조병직(趙秉稷)·조병식(趙秉式)·신기선(申箕善)·윤웅렬(尹雄烈)·한규설(韓圭卨)·권재형(權在衡)·이재순(李載純)·이용익(李容翊) 등이었다. 이들 가운데 윤용선은 의정(議政), 이재순은 궁내부대신, 박제순은 외부대신, 윤웅렬은 군부대신, 심상훈은 탁지부대신을 역임하였다. 탁지부의 하급관리로 출발한 이용익은 탁지부대신에 발탁되기도 했다.

이들은 대체로 고종의 측근이며, 박정양·윤웅렬·한규설·권재형 등 몇몇을 제외하면 모두 보수적 성향의 인물이었다. 따라서 윤용선·심순택·이재순·심상훈·이용익 등은 한때 독립협회로부터 규탄의 대상으로 지목받기도 하였다. 일부 연구자들은 보수적인 인물들이 광무개혁을 추진하였다는 점을 들어 광무개혁의 개혁성을 부인하기도 한다.

광무개혁은 ‘구본신참(舊本新參)’ 즉, 구식을 근본으로 삼고 신식을 참고한다는 정책이념을 추구한 데에서 나타나듯이 복고주의적인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특히 1896년의 개혁에서 향사제도(享祀制度)가 구식 및 음력으로 복구되고 단발령이 취소되었으며 23부(府)가 13도(道)로, 내각이 의정부로 환원되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련의 조치가 1894년 갑오개혁 이전으로 완전히 복구된 것은 아니었다. 구식 및 음력이 복구되었지만 이것은 향사제도에 국한되었고, 모든 의식이 복구된 것도, 양력이 모두 음력으로 복구된 것도 아니었다. 단발령도 일시적으로 취소되었다가 다시 복구되었다. 도제(道制)도 복구되었지만 갑오경장 이전의 8도와 이후의 23부를 절충한 1부(한성부) 13도 체제였다. 관리의 구성도 23부 당시와 비슷했다. 복구된 의정부제도도 내각제도의 취지와 내용을 살리는 것이었다.

광무개혁의 복고적 경향은 왕권 강화의 측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갑오·을미개혁에서 왕의 지위는 개혁 이전에 비해 상당 부분 제한되었으나 아관파천 직후 새 정부는 왕권을 강화하는 데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1899년 「대한국제(大韓國制)」가 제정, 반포되었다. 대한국제에 의하면, 국왕(또는 황제)은 무한불가침의 군권(君權)을 향유하며, 입법·사법·행정·사전(赦典)·강화·계엄·해엄에 관한 권한을 가진다고 규정하였다. 이는 격하된 왕권의 지위를 복고시키는 한편 구미국가의 절대왕정체제를 모방하여 왕권의 전제화를 법제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왕권의 강화를 위해 왕실 재정도 확대되었다. 갑오·을미개혁은 국왕의 정치적인 권한뿐만 아니라 이를 뒷받침하는 왕실 재정까지도 통제하였다. 아관파천 이후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왕실 재정을 개선하기 위한 여러 움직임이 있었다. 각종 잡세가 부활되었고, 홍삼의 제조, 백동화(白銅貨) 주조의 특허, 수리·관개 및 광산사업을 통해 왕실 재정의 수입원이 확대되었다. 왕실 재정은 탁지부(度支部)에 정부 관원의 봉급 자금을 빌려줄 만큼 호전되었다.

대한제국이 건립된 이후에는 더욱 주목할 만한 개혁이 이루어졌다. 우선 국가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대외에 천명하고자 하였다. 대한국제 제1조에서 “대한제국은 세계 만국의 공인되어 온바 자주독립하는 제국이니라.”고 천명하고 있는 것이 그 단적인 예이다.

자주독립을 지키고 근대국가로서의 위상을 정립하려는 시도가 진행되었다. 우선 군사력이 증강되어 갔다. 서울의 친위대(親衛隊)가 개편되어 2개 연대로 증강되고, 2개 연대의 시위대(侍衛隊)가 창설되었으며, 호위군(扈衛軍)도 호위대로 개편, 증강되었다. 지방군도 증강되어 을미개혁까지는 평양·전주에 진위대(鎭衛隊)가 있었을 뿐이지만, 그 뒤 2개 진위대, 14개 지방대대로 확대되고, 다시 6개 연대의 진위대로 통합, 개편되었다.

자주독립을 지켜나가기 위한 노력은 외교적인 면에서도 발휘되었다. 해삼위(海蔘威)·간도지방으로 이주한 교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해삼위통상사무·북간도관리(北墾島管理)가 설치되었다. 또 북간도의 영토 편입을 시도하였다. 또 1899년에는 오랫동안 한국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해 온 국과 통상 조약을 체결하여 공사의 교환이 이루어졌다.

갑오개혁부터 중요한 과제로 대두되었던 양전사업(量田事業)도 추진되었다. 전후 두 차례에 걸쳐서 전국 토지의 약 3분의 2에 달하는 218군(郡)에 대한 토지 측량을 완료하였다. 양전사업이 시작되면서 지계(地契) 발급 사무도 이루어졌다. 지계는 입안제도(立案制度)를 근대적 소유권 제도로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이후 양전사업이 중단되면서 지계 발급도 중단되고 말았다.

상공업진흥정책도 당시의 여론을 수용하여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정부 스스로가 제조공장을 설립하거나 민간 제조회사의 설립을 지원하였다. 또 유학생을 해외에 파견하거나 기술교육기관을 설립하여 근대적 기술을 습득하게 했다. 민간 제조회사의 근대적 기술 습득을 장려하거나 기술자 장려책을 강구하기도 했다. 이러한 정책에 따라 각 부면에 걸쳐 이미 특권적 성격을 벗어난 근대적 회사와 실업학교들이 설립되었고, 과학기술을 응용한 각종 기계나 윤선(輪船) 등이 제조되었다.

경제생활의 기준이 되는 도량형제도(度量衡制度)도 새로 제정, 실시되었다. 각 지역간의 거리를 단축시켜 장벽을 무너뜨리는 통신·교통시설도 개선되어 갔다. 우편·전보망이 전국적으로 확충되었고, 서울·인천·평양·개성 등지에 전화가 개설되었다. 외국인에게 특허되어 그 자본과 기술에 의존하기는 했지만, 경인선·경부선·경의선의 철도가 개통되었다. 서울에 발전소가 건설되어 전등이 켜지고 전차가 운행되었다.

사회적인 면에서도 주목할 만한 개혁이 있었다. 호적제가 시행되고 순회재판소가 설치되었으며, 종합병원인 제중원(濟衆院), 구휼기관인 혜민원(惠民院) 등이 설립되었다. 또 관리들은 복장으로 양복을 입었고, 1902년에는 재차 단발령이 내려져 관리·군인·경찰이 상투를 자르게 되었다.

참고문헌

  • 『한말근대법령자료집』 Ⅰ·Ⅱ·Ⅲ( 송병기 외,국회도서관,1970·1971)
  • 「대한제국의 수립과 정치 변동」 ( 주진오 ,『새로운 한국사 길잡이(한국사연구입문)』하,한국사연구회,2008)
  • 「광무개혁론의 문제점」 ( 신용하 ,『창작과 비평』,1978 여름호)
  • 「광무연간의 개혁」 ( 송병기 ,『한국사』19,국사편찬위원회,1976)
  • 「광무개혁연구」 ( 송병기 ,『사학지』10,1976)
  • 「대한제국시기의 상공업문제」 ( 강만길 ,『아세아연구』50,1973)
  • 「광무연간의 양전사업에 관한 일연구」 ( 김용섭 ,『아세아연구』31,1968)

같이보기

대한국국제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