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Battle of Stalingrad

러시아어: Сталинградская битва

독일어: Schlacht von Stalingrad

개요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1942년 8월 21일부터 1943년 2월 2일까지 스탈린그라드 시내와 근방에서 유럽 추축군소련군 간에 벌어진 전투를 말한다.

이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약 200만 명이 죽거나 다쳐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낳은 참혹한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독소전쟁 자체가 처절했지만, 스탈린 그라드 전투는 이후에도 처절한 시가전의 대명사처럼 화자 되고 있다. 예를 들자면 바흐문트 전투가 현시대의 스탈린그라드 전투다, 북한이 쳐들어오면 일산 같이 서울시를 둘러 쌓고 있는 신도시 때문에 제2의 스탈린그라드를 찍어야 한다 뭐 이런 식으로,

시가전은 도시를 완전 초토화 하지 않는이상, 건물 숲 자체가 요새나 마찬가지이기에 공격측에서도 막대한 출혈이 강요되는 편이다. 또 방어자 입장에서는 도시 자체가 거의 순소비를 하는 곳이기에 포위 될 경우 물자가 급속히 고갈되어 또 방어하는 쪽에서도 고통스러운 처지가 될 수 있다.


스탈린 그라드라는 지명은 스탈린의 도시라는 뜻으로 스탈린을 개인 우상화 하는 과정에서 붙인 지명이다. 흐루초프 때 스탈린을 격하하면서 다시 지명이 환원 되었다.

러시아제국의 수도이기도 했던 지금도 제2의 도시인 샹테르부르크도 한 때 지명이 레닌의 도시라는 뜻의 레닌그라드 였다. 쌍테르부르크는 다시 한원이라도 됐지 상테르부르크를 주위를 에워싼 레닌그라드주는 환원이 안돼어서 지금도 레닌그라드주라고 한다.

날짜
1942년 8월 21일 ~ 1943년 2월 2일
장소
소련 스탈린그라드(현 볼고그라드)
교전국 소비에트 연방 나치 독일

루마니아 왕국

헝가리 왕국

이탈리아 왕국

크로아티아 독립국

지휘관 니키타 흐루쇼프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게오르기 주코프

하지 아슬라노프

바실리 추이코프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안드레이 예료멘코

세묜 티모셴코

로디온 말리놉스키

파벨 바토프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헤르만 호트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에리히 폰 만슈타인

페트레 두미트레스쿠

콘스탄틴 콘스탄티네스쿠

구스타브 제니

이탈리 가리볼디

결과
소련의 결정적 역전승
영향
동부전선 전세의 전환점, 나치 독일의 소련 정복 계획 사실상 포기
병력
총 병력 215만 명 이상

-  스탈린그라드 전선군

-  남서 전선군

-  돈 전선군

독일군 56만여 명 + 지원군 73만여 명

-  독일 제6군

-  독일 제4기갑군

-  루마니아 제3군

-  루마니아 제4군

-  헝가리 제2군

-  이탈리아 제8군

피해규모
군인 손실 1,129,619명

-  전사, 실종, 포로 478,741명

-  부상 650,878명

민간인 사망자 최소 4만 명

군인 손실 80만여 명(포로 91,000명 포함)

-  독일군 40만 명

-  루마니아 왕국군 109,000명

-  헝가리 왕국군 143,000명

-  이탈리아 왕국군 114,000명

- 독일 부역 소련군 3만 명 이상

진행

1941년 6월 22일 독일 제3제국이 소련의 유럽 영토를 점령하고자 시작한 바르바로사 작전모스크바 공방전의 실패와 함께 끝나자, 방어 대비가 되지 않은 약점에 공격을 집중하는 독일군의 전통적인 정책에 따라 히틀러는 소련 중서부 정면인 모스크바나 이미 포위를 진행중인 소련 북서부 레닌그라드 대신 소련 남서부의 바쿠, 마이코프, 그로즈니 등의 소련 최대 유전들이 밀집된 카프카스 유전지대를 점령함으로서 중동에서 소련으로 올라오는 미국산 렌드리스 보급로까지 차단하기 위한 작전을 계획하고 결정하였으며 이는 청색 작전으로 명명된다.

독일 국방군 남부집단군의 청색 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남북으로 길게 뻗은 볼가 강을 낀 스탈린그라드가 당시 남아 있었던 유일한 소련 남서부 운수의 중심지이자 핵심 도시였으므로 독일 제6군에 스탈린그라드의 점령 명령 역시 하달된다.

이쯤되니 이를 눈치챈 스탈린이 스탈린그라드 결사 사수를 명령하며 독소전쟁 개전 당시 내렸던 후퇴 금지령에 더해 스탈린그라드 인민 피난 금지령과 소련 최초의 형벌부대 창설 명령까지 내리며 말 그대로 후퇴하는 자들은 모조리 사살하는 독전대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독일 국방군은 막대한 양의 폭격이 끝나자마자 스탈린그라드 시가지 점령을 위해 진입하나 무장한 주민들과 소련군 모두를 상대해야 했고 도망갈 곳이 없는 소련인들은 좀비 떼처럼 달려들며 진격이 예상보다 지연되기 시작했다.

소련군은 미국산 렌드리스로 고가치 전투식량을 대량으로 공급받으며 안정적인 지구전이 가능한 상태가 되었고, 동원 가능한 모든 병력을 스탈린그라드로 보내기 시작했다. 곧 전투는 거대한 규모의 소모전으로 돌입했고 독일 국방군 측도 사상자 수가 누적되며 투자한 비용을 회수하기 위해 물러서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으므로 독일 제6군은 모든 가용 가능한 모든 병력을 스탈린그라드로 투입하기 시작했으며 독일 제6군에 엄청난 양의 병력 증강이 이루어지기 시작되며 양측의 사상자 수는 눈덩이가 설산을 구르듯 불어났다.

독일 국방군은 무장도, 전술도 이러한 대규모 시가전에 최적화되지 않았으며 시가전 경험도 소련군보다 유의미하게 많다고 할 수는 없었을 뿐만 아니라 공격측임에도 수적으로 2배 가량 불리한 스탈린그라드 시가전의 악조건 속에서도 불구하고 겨우 독일 1 : 소련 1.8의 사상자 비율로 스탈린그라드 시가지의 90% 이상을 점령하였다. 이는 과연 전성기이자 당시 세계 최강이었던 독일 국방군의 놀라운 시가전 전투력을 보여준 것이지만 외부 위키들에서는 독일군이 이 악조건 속에서 이룬 놀라운 교환비를 따로 언급하지도 않고 넘어가고 있다.

그러나 독일 국방군의 전략적 정찰 능력과 정보력의 한계로 미국의 렌드리스 능력을 과소평가했고 이것이 변수가 되어 예상보다 훨씬 많이 동원된 소련군 100만 대군이 길게 노출된 독일 제6군 측면을 지키던 루마니아, 헝가리, 이탈리아군의 부실한 방어선을 뚫고 진격하기 시작하자 포위 위기에 놓였고[1] 스탈린그라드 시가지를 버리고 긴급히 후퇴하거나 포위된 스탈린그라드 시가지에 남거나 둘 중 하나의 선택을 해야만 했고, 독일 제6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상급대장은 시가지에 남는 선택을 하고 만다.

독일 제6군을 구하기 위해 항공보급을 진행하였으나 목표한 보급량을 채우는 것은 불가능했고, 제6군은 점점 더 심각하게 굶주리며 동사자와 아사자 수가 점점 더 가파르게 늘어나고 있었다. 제6군을 구출하기 위한 겨울폭풍 작전을 진행했으나 병력이 너무 적었고 소련군의 인해전술에 이것마저 실패하자 히틀러는 파울루스가 최후까지 싸우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프로이센의 (야전)원수는 항복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라는 암묵적인 뜻으로 야전원수로 진급시키지만 파울루스에게 전달되지 못했고 독일 제6군 휘하의 제51보병군단장 발터 폰 자이틀리츠-쿠르츠바흐 포병대장이 항복을 주장하자 파울루스가 소련군에 항복해버리며 결국 91,000명의 독일 국방군이 항복하고 말았다. 히틀러는 파울루스의 항복 소식을 듣고 격노하였다.

스탈린그라드에 포위된 독일 B집단군에 이어 카프카스 유전지대로 향하던 독일 A집단군까지 포위당할 뻔 했으나 다행히도 A집단군은 로스토프 근방에서 닫히려는 포위망을 강제로 열어젖히고 성공적으로 퇴각하여 독일 남부집단군의 붕괴를 막았다. 이들은 곧이어 벌어진 제3차 하리코프 공방전에서 소련 선봉 추격 기갑군단들에 역습을 가해 포위하고 소련군 10만명을 섬멸하며 동부전선의 주도권을 되찾아오며 전선을 안정화시켰다. 이후 독일군은 하리코프 북부에 남은 쿠르스크 돌출부에 거대한 반격을 준비하는데, 이는 쿠르스크 전투라고 불리며 이는 단일 규모로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규모의 기갑전투가 된다.

독일 제6군 사령관 파울루스가 소련군에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11,000명의 B집단군 및 제6군 잔존 병력은 항복을 거부하고 파울루스의 항복 이후 한 달이 지난 1943년 3월까지 지하실과 하수도 등에 은신하며 소련군을 계속해서 괴롭히며 저항전을 펼쳤는데 이들 중 2,500여 명의 독일군은 1943년 3월 이후에도 항복을 거부하며 본국에 "우리는 의무를 다했다."는 무전을 보내고 나서야 전사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련군은 독일군의 약 3배에 달하는 인명을 손실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독일 국방군 최대의 비극이 되었다. 또한 소련의 승리로 스탈린 체재만 공고해지며 한반도 분단과 냉전이라는 재앙만 보며 지금 와서 봐도 인류 모두에게 풀리지 않는 비극적인 결과만을 계속해서 초래하고 있다.

참고 자료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Stalingrad#CITEREFFrieser_et_al.2017

Frieser, Karl-Heinz; Schmider, Klaus; Schönherr, Klaus; Schreiber, Gerhard; Ungváry, Kristián; Wegner, Bernd (2017). "German Conduct of the War after Stalingrad". Das Deutsche Reich in der Defensive: Die Ostfront 1943/44 Der Krieg im Osten und an den Nebenfronten [The Eastern Front 1943-1944: The War in the East and on the Neighbouring Fronts]. Das Deutsche Reich und der Zweite Weltkrieg (Germany and the Second World War) (in German). Vol. VIII.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ISBN 978-0-19-822886-8.

Frieser et al. 2017, p. 14.

  1. 1941년 독일의 바르바로사 작전에 의해 소련의 곡창이라고 불리던 우크라이나를 순식간에 상실한 소련은 극심한 식량 위기에 놓였었는데, 전체 렌드리스로 보면 적어 보이지만 소련이 더할 나위 없이 긴급히 필요로 했던 고가치 전투식량을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양으로 원조받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모할 식량 부족 위기를 넘겨 천왕성 작전까지 버티는 게 가능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