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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Wales
웨일스어: Cymru[1] 사이트 : http://www.wales.com

개요

웨일스는 영국의 구성국(잉글랜드, 북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중 하나이다. 수도는 카디프이다.

북아일랜드의 면적은 20,779 km²이고, 인구는 3,125,000 명이다. (인구밀도는 148 명/km²). [2]


지리

그레이트브리튼 섬 서부에 위치한다. 동쪽으로는 잉글랜드와 접하고 서쪽으로는 아일랜드 해에 접하며, 남쪽으로는 브리스톨 채널과 접한다. 2017년 기준 추정 인구는 3,125,000명이고, 총 면적은 20,779 km2(8,023 sq mi)이다. 웨일스는 2,700 km(1,680 마일)의 해안선을 보유하고 있으며 대부분 산악 지형이다. 북부 및 중부 지역의 높은 봉우리는 스노든 산(Snowdon, Yr Wyddfa)이 최고봉이다. 웨일스는 북쪽 온대 지역에 속해 있으며 변화하는 해양 환경을 가지고 있다

문화

웨일스의 국가적 정체성은 5세기 경 로마인이 그레이트 브리튼 섬에서 철수한 이후 켈트계 브리튼인으로부터 수립되었으며 웨일스는 현대 켈트계 국가 중 하나로 간주된다. 1282년 르웰린 압 그리피드가 사망하면서 잉글랜드의 국왕 에드워드 1세가 웨일스를 정복하였고, 15세기 초 오와인 글린두르가 웨일스의 독립을 단기간 회복한 바 있다. 1536년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8세가 제정한 웨일스법(1535-1542)에 의해 웨일스는 잉글랜드에 의해 영국으로 완전히 합병되었고 사법체계도 잉글랜드 중앙정부 치하에 통합되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잉글랜드와 차별화된 웨일스의 정치가 발달하게 된다. 20세기 초, 로이드 조지가 웨일스 진보주의를 제창하였고, 이는 사회주의의 신장과 노동당의 성장으로 이어진다. 웨일스인들의 국민적 감정이 1세기가 넘게 성장하며 1925년에는 웨일스당, 1962년에는 웨일스어 위원회가 창설된다. 1998년에는 웨일스 정부법에 의해 웨일스 의회가 설립되어 현재 다양한 위임 책무에 대한 권한을 수행하고 있다.

언어

영어

웨일스는 영국의 다른 지역과 정치적, 사회적 역사를 긴밀하게 공유하고 있지만 인구의 대다수는 영어를 구사한다. 웨일스는 독특한 문화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공식적으로 이중 언어 체제이다. 웨일스 내에는 560,000명 이상의 웨일스어 사용자가 거주하고 있으며 이들은 주로 웨일스의 북부와 서부에 거주한다. 19세기 후반부터는 노래, 춤, 시 낭송, 문학, 악기, 작곡, 뮤지컬, 연극 등을 겨루는 대회인 이스테드보드를 통해, 웨일스는 '노래의 나라'의 이미지로 널리 알려지게 된다. 이스테드보드는 1176년에 최초 대회가 개최되어 현재에 이르는 유구한 전통을 지니고 있다. 전통적으로 웨일스인들은 매우 활발하고 경쾌한 사람들로 알려져 왔으며, 그들은 이웃과 어울려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즐겼다. 또한 하프 음악문화가 매우 발달했고 음유시인들은 웨일스어로 시를 썼다. 정기적으로 음유시인 경연대회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웨일스 고유의 문화는 17세기 후반부터 잉글랜드의 문화가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사라졌다. 특히 18세기 초반에는 엄청난 속도로 웨일스의 전통문화가 퇴색되었다. 18세기 초반 웨일스어로 된 서적은 자취를 감추었고 하프 가락에 맞춰 노래하는 것은 저질스런 것으로 인식이 만연해졌다. 현대의 웨일스 문화는 18세기 초반 이후 잉글랜드 문화와 섞임에 따라 잉글랜드 문화와 큰 차이가 없어졌다.

웨일스어

웨일스어는 오래전부터 웨일스 지역에서 사용되었으나 16세기부터 급속히 몰락하기 시작했다. 17세기 중반에 웨일스어는 영어에 밀려 시골 노인들이나 쓰는 방언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 잠깐동안 웨일스 문화 복고 열풍이 붐에 따라 웨일스어는 웨일스 출신의 몇몇 학자들에게 '가장 멋진 언어'로 신격화되어 숭배되기도 했다. 19세기 초반에는 웨일스어의 우수성을 찬양하는 많은 수의 서적과 논문들이 출판되었으나 이는 10년도 가지 못하고 다시 쇠퇴의 길을 걸어 현재 웨일스어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전 세계적으로 70만 명이 있다.


각주

  1. 컴리
  2. 2017년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