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라는 나라를 완전히 만가트린 사람은 고종이다. 그런 나라를 다시 살린 사람은 이승만대통령이다. 그는 1885년 태어났는데, 양녕대순의 16대 후손이다.

이승만의 아버지는 왕족이었지만, 5년안에 과거 시험에 합격하는 사람이 집안에 없으면 평민으로 돌아간다. 안그러면 황실에서 다 관리해 준다. 그래서 이승만의 아버지가 과거에 합격하지 못해서 평민의 신분으로 돌아가 살았단다.

그는 한성을 떠나 황해도 평산 골자기에서 살며 말타고 다니면서 명심보감 주역 등등을 하며 살아갔다. 그런 이승만의 모습에 어머니가 똑독하다 왕족이 숨어서 사느냐. 이승만을 낳은 후 5살때 황해도에서 남편 이경선(이승만의 부)이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울역 앞쪽 남산밑에 양녕대군 사당옆에 살면서 바느질하며 이승만을 서당에 보내면서, 7살때 과거시험을 보게했다. 계속해서 12살까지 과거시험을 보게 했는데 떨어졌다. 당시 조선 시대 탐관오리의 부패가 심해서 돈을 줘야만 합격시켰던 부패 만연의 사회였다.

이승만은 이런 부패가 만연한 사회에 열 받아서 "조선은 망한다. 고종 이 멍청한 임금이 양자로 들어가서 나라가 부패했다."

그때 일본의 영향으로 과거시험을 패지하였다. 그래서 자살하려고도 하였다. 당시 과거시험만이 유일한 신분 회복의 길이었는데.. 그 때 친구 형이 만류하며 배제학교에 가자고 하였다. 당시는 한문을 배우기 보다 영어를 배워야 한는것이 세상의 흐름을 바꾼다는 것을 알았다.


역사는 여러사람에 의하여 이루어지지 않는다.
― 아놀드 토인비

이승만은 20세 때인 1895년 4월 2일 헨리 아펜젤러의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당시 이승만은 뛰어난 웅변으로 유명하였으며 서재필 등과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원래는 영어를 배우러 입학했으나 이곳에서 그는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것에 대해 처음 배우게 된다. 당시 동학의난(1894년 ~ 1895년)이 한참인 때 였다. 이를 해결하고자 민비가 일본군을 불러 동학의난을 막았는데 일본군은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번에 민비는 다시 청나라를 불러 일본군을 내쫓으려 하였다. [1] 그러나 일본군에 발각되어 그들에게 살해되었다. 고종은 민비가 살해될 줄 알았다. [2] 그러나 고종은 일본군이 무서워 아무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

결국 조선이라는 나라를 놓고 청나라과 일본이 전쟁이 붙었다. 강화도에서 청나라가 져서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이다. 이를 지켜 본 이승만은 의로운 분노가 일어났다. 왜 남의 나라에서 서로 나라를 차지하려고 싸움을 하느냐.

1898년, 23세의 이승만은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공화정의 개념을 가르치게 되었다. 이는 한국 최초의 대중집회 성격의 만민공동회의이다. 종각옆에 6개의 상점이 있는데 다른 장에는 없는 물건들이 있는데 장 보러 오는 사람이 한 만명이다. 만민공동회의가 장보러 오는 사람들이 만명이 모였다는 말이다. 이승만은 연단을 만든 후 고종이 나라를 일본에 판다고 비난하였다. (이승만의 독설을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승만은 미국 트루만 대통령에게도 독설을 퍼부었다.)

1903년 한성감옥에 수감된 당시 죄수복을 입은 28세의 우남(왼쪽)의 모습, 이승만은 사형수로 가슴과 목을 쇠사슬로 묶여져 있다.

당시 최초의 시위를 벌이며 고종 사퇴를 벌이게 되었는데, 이승만은 포졸들에게 잡혀서 서대문 형무소(한성감옥)에 갖혔다. 결국 이승만은 사형선고를 받아서 부친에게 통보가 되었다. 내일 사형집행이 되는데 그 시체를 찾아가라는 내용이다...

시형집행을 앞둔 이승만은 사형수로서 간수에게 마지막 소원이 있다며 성경책을 읽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영어성경책 마태복음 27장을 펴달라 한 후 영어성경책을 읽는데 (마태복은 27장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되는 상황이다.)


"성경책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시여 정말로 부활하시어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다면, 저를 살려주세요. 저를 살려주신다면 내 일생 모두를 당신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사형집행이 있던 다음날 헐버트 선교사가 이승만의 시체를 찾으러 갔는데 이승만은 살아왔었다.

1898년 4월에는 양홍묵, 유영석과 함께 한국 최초의 순한글 민간 일간신문인 매일신문을 창간했다. 이 후 매일신문의 자금난으로 갈등이 일어 유영석과 이승만은 이 곳으 떠나서 제국신문을 창간하였으며 제국신문의 주필로서 민중계몽과 항일을 하였다.

독립협회의 남궁억과 이상재 등이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하려한다는 익명서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자 밤샘농성을 벌여 그들을 석방시켰다.

이승만은 헌의 6조의 실시를 약속한 고종에 의해 남궁억 등과 함께 중추원 의원에 임명되었으나 한달만에 고종 퇴위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어, 1899년 1월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이승만이 전단지를 돌리다가 체포되었는데, 그 전단지 내용 중에 "광무황제는 연령이 높으시니 황태자에게 자리를 내 주셔야 한다."라고 적힌 문구 때문이다. 또한 독립협회 시기 박영효 계파와 연결고리 때문에 이것이 '박영효 내란 음모 사건'에 연결되었다. 이승만 투옥 당시 같은 독립협회 동지였던 주시경이 몰래 넣어준 육혈포로 탈옥을 시도했다가 붙잡혀 종신형이 내려졌다. [3]

그는 감옥에서 학문연마 및 저술활동에 몰두했다. 선교사들을 통해 성경을 들여와 읽으면서 간수 및 동료 죄수들에게 기독교를 전도했고, 많은 책들을 읽으며 새로운 사상을 학습하고 발전시켰다.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감옥 내 도서관을 만들 정도였다. 또한 옥중에서 최초의 영한사전을 만들기까지 했다.


러일전쟁 이후 이승만은 영어에 능통하고 국제정세에 밝았는데 이를 알고 민영환과 한규설의 끈질긴 주청으로 29살이었던 1904년 8월에 5년 7개월의 감옥생활을 끝내고 특별사면되었다. 그리고 대한제국의 독립 보전 요청이라는 임무와 함께 미국 유학의 뜻을 품고 미국으로 떠난다.



여담

이승만이 미국 유학시절 우드로 윌슨이 프리스톤대학교 총장을 처음 만났을 때 이승만은 직관적으로 이분은 총장으로 끝날 사람이 아니라 미국의 대통령이 될 사람임을 인지하였다.

이승만은 우드로 윌슨의 마음을 사기 위하여 딸 젝시가 주로 다니는 길목에서 연설을 하였다. 흰옷입기를 좋아하는 나라이며, 5천년 동안 한번도 다른 나라를 침략하지 않은 나라를 일본놈들이 침략하였다라며 연설하였으며 이에 젝시가 물어보며 가까워 졌다고 한다.



학사 석사 박사를 4년 5개월만에 수행한 유일한 사람이다.

이승만을 모르면 인간이라 생각하면 안된다.

기독교인은 의무적으로 애국자가 되야하는 것이다.
― 전광훈 목사


3.1독립운동은 이승만이 일으켰다는 말을 수년간 외쳐왔는데 조선일보 기자는 증거가 있냐고 하면서 전광훈 목사를 취재 하게되었다.


각주

  1. 민비의 이런 행동이 후에 청일전쟁을 발발하게 만들었다.
  2. 민비살해도 못 막은 자들이, 블러그, 조갑제
  3. 당시의 호된 고문으로 안면근육경련이 생겼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