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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 중앙일보 대기자[1]


박근혜 사칭


친애하는 동지 여러분.

하 수상한 시절에 두루 평안하십니까. 박근혜입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모질었던 지난 두 해 겨울에 비하면 이번 겨울은 그저 봄날 같아서 견디기 수월합니다.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불편이 한둘이 아니지만, 첫해에 비해서는 익숙해졌습니다. 이 모든 것이 여러분의 염려 덕분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7년 3월 31일 이곳에 왔으니 3년이 다 되어가는군요. 작년 가을 어깨 수술을 받고 병원에 입원했던 두 달 여를 뺀다 해도 2년 6개월이 넘었습니다. 누구는 벌써 그렇게 됐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제 마음속 시계로는 26년 같다고 할 만큼 더디게 흐른 시간들입니다.

사랑하는 동지 여러분.

이렇게 편지를 쓰려고 앉으니 만감이 교차합니다. 분노고통, 절망, 회한의 감정들이 차례로 스쳐 갑니다. 처음에는 제가 처한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탄핵에 구속이라니… 내가 뭘 잘못했나, 내가 그리 죽을죄를 졌나, 이러려고 휴일 없이 일했나 하는 마음에 몸을 떨었습니다.

특히나세월호를 생각하면 지금도 몸서리가 쳐집니다. 저라고 왜 그 많은 목숨을 앗아간 사고가 가슴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그 죄 없는 어린 생명들을 왜 구하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제 임기 중 그런 비극이 벌어진 데는 일언반구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마치 모든 것이 저의 잘못인 양 몰아가는 비난에는 한없이 야속하고 서운했습니다.

소통 부재와 독단, 비밀주의로 수식되던 저에 대한 비판은 국정농단이란 말로 정점을 찍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대통령으로서 흐트러짐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을 뿐입니다. 헛되이 혀를 놀려 가볍게 보이지 않도록 말을 아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제 뜻을 잘 알아채는 비서들에게 일을 맡겼고, 그것을 질시한 사람들 입에서 문고리 권력이니 뭐니 하는 말이 나왔을 뿐입니다.

최순실도 제 뜻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가족들조차도 믿지 못했던 시절부터 저를 도왔던 사람입니다. 제게 많은 조언을 했고 그에게 많은 것을 의지했습니다. 비서들조차 잡아내지 못하는 연설문의 하자까지 고쳐주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저 때문에 옥고를 치르고 있는 것 같아 미안할 따름입니다.


동지 여러분.

18대 총선 때가 생각납니다. 어찌 잊겠어요. 그때의 감동을. 저를 따른다는 이유만으로 여러분들은 공천 학살을 당하셨지요. 국민도 속고 나도 속았던 그때, 여러분들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친박연대친박무소속연대를 만들어 싸우셨습니다. 저는 살아서 돌아오라는 말로 성원하는 수밖에 없었고, 여러분들은 정말 살아서 돌아오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장합니다.

그런 여러분들이 저를 따른다는 이유로 또 한 번 낭패를 겪으셨습니다. 저 때문에 여러분들이 태극기를 들고 광장으로 뛰쳐나가거나, 폐족 아닌 폐족이 되어 큰소리로 숨도 못 쉬고 있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러면서도 여러분들은 저를 지켜주지 못했다고 미안하게 생각하고 계십니다(물론 여러분 중에는 탄핵에 찬성한 분들도 계십니다만). 다시 한번 고맙습니다.


경애하는 동지 여러분.

이제 처음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안하다는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20대 총선 때 저는 야당에 승리하기보다 당내 비박 무리로부터 당권을 지켜내는데 몰두했습니다. 레임덕을 막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여러분 중에서 제 후임자를 만들려는 생각이었습니다. 유권자들에게 배신의 정치를 심판해달라, 진실한 사람을 선택해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선택을 쉽게 해주기 위해 진박감별사까지 등장시켰습니다.

하지만 유권자들은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결국 국민의 신뢰를 잃고 말았습니다. 돌이켜보니 그때가 제 몰락의 시작이었습니다. 그것이 보수정치의 궤멸이라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지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저의 아버지와 함께 대한민국이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 우뚝 설 토대를 만든 보수세력은 이후 분열과 반목해왔습니다. 예전엔 제 편만 건재하면 될 줄 알았는데, 여기서 보니 결코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말만 앞서는 이 정부의 위선이 구치소 담장 너머 이곳까지 들려옵니다. 나도 놀랄 행동을 하면서 자기들은 옳다는 오만무도가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결국 이 땅의 보수세력이 사분오열됐기 때문입니다.


존경하는 친박 동지 여러분.

지금은 무엇보다 힘을 합쳐야 할 때입니다. 통합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희생이 필요합니다. 억울하지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 희생할 사람들은 우리 같은 애국자밖에 없습니다. 미워도 할 수 없습니다. 보기 싫은 얼굴도 끌어안아야 합니다.


은혜로운 친박 동지 여러분.

이제 저를 잊으십시오. 저와 함께 무대에서 내려옵시다. 제 이름을 다시 부르는 것은 여러분에게도 제게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국민들의 용서 가능성이 점점 희미해질 뿐입니다. 여러분들이 훗날을 도모할 기회 또한 따라 멀어질 것입니다. 이제 저를 놓으십시오. 끝까지 챙겨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참 나쁜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때, 건강 유념하십시오.

2020년 2월 22일

박근혜

추신: 저를 석방하려는 노력은 안 하셔도 됩니다. 이곳에서 곧 새로 들어올 사람들을 맞겠습니다.

이훈범 대기자/중앙콘텐트랩


각주

  1. 기자면 그냥 기자지 뭔 대기자인가? 소학교 중학교 대학교로 나뉘는 기자들인가?
  2. 이훈범 기자의 박근혜 '옥중서신' 기사의 날짜에 중앙일보에서 나온 박근혜의 옥중메시지 기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