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석현(洪錫炫, 1949년 10월 20일 ~ )은 한국의 기업가 겸 언론인으로, 중앙일보, JTBC의 사주이다.
홍석현은 이승만 정부 시절 법무부 장관을 지낸 홍진기(洪璡基, 1917 ~ 1986)의 장남이다.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손아래 처남이며, 부회장 이재용의 외삼촌이다. 광주고등검찰청 검사장을 지낸 홍석조(洪錫肇, 1953~ )는 동생이다.[2]
노무현 정권 때 주미대사를 지냈으며, 유엔사무총장에 뜻을 두고 활동하다 삼성그룹 관련 사건이 터져 물러났다.[3][4] 이후 반기문이 유엔사무총장이 되었다.
추 장관이 밝힌 윤 총장의 비위 사실은 ▲ 언론사주와의 부적절한 접촉 ▲ 조국 전 장관 사건 등 주요 사건 재판부 불법 사찰 ▲ 채널A 사건·한명숙 전 총리 사건 관련 감찰·수사 방해 ▲ 채널A 사건 감찰 정보 외부 유출 ▲ 총장 대면조사 과정에서 감찰 방해 ▲ 정치적 중립 훼손 등 모두 6개다.우선 윤 총장이 중앙일보 사주인 홍석현 중앙 홀딩스 회장과 부적절하게 만나 검사윤리강령을 위반했다는 혐의다.
추 장관은 "2018년 11월께 당시 서울중앙지검장으로 재직 중이던 윤 총장이 사건 관계자이자 JTBC의 실질 사주 홍 회장을 만나 공정성을 훼손할 우려가 있는 부적절한 교류를 했다"고 주장했다.검찰 윤리강령은 `검사는 사건 관계인과 정당한 이유 없이 사적으로 접촉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홍석현의 최근 행보는 구동교동 세력과 연합하여 2020년 총선에서 생애 마지막 대권도전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사면 복권된 이광재 여시재 원장은 정치적 야심이 큰 홍석현과 행보를 같이 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더불어민주당으로 가는 것이 확정적이다. 홍석현을 민주당과 연결시켜 대선후보가 될 길을 터기 위한 것일까? 아니면 결별하는 것일까?
황교안은 이미 지난 6월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박근혜를 버렸다고 말했는데, 또 버리라고 요구하는 이하경의 뻔뻔함....
저는 당연히 태블릿PC 1심 판결을 존중합니다. 다만 당시 답변 과정에서 태블릿PC가 조작된 것처럼 비치는 발언을 해 불필요한 논란을 야기한 건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정리할 필요가 있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는 정치권 인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일찍부터 대통령이 되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 많으며, 여시재는 그 목적을 위해 설립한 싱크탱크라는 설이 있다.
홍석현은 JTBC가 보도한 최서원의 태블릿PC 논란과 관련하여 핵심인물로 떠오르고 있다.
조한규는 기자 출신으로 세계일보 사장을 지낸 사람인데, JTBC가 태블릿 조작 보도를 하기 직전인 2016년 9월 뜬금없이 홍석현을 대권후보로 띄우는 책을 냈다.
조한규는 세계일보 사장 재직 시절인 2014년 11월 ‘정윤회 문건’을 보도해 큰 파장을 일으켰으나 대부분 실체가 없는 허위 내용인 것으로 밝혀졌다. 탄핵 정국에서도 마치 대단한 청와대 문건을 입수한 것처럼 허세를 부려 사기 탄핵 바람을 일으키는데 일조하였다. 홍석현과 사전 교감이 있었는지 의심되는 대목이다.
조한규 전 세계일보 사장은 재직 시절인 2014년 11월, 박근혜 정부 ‘비선 실세’의 국정 농단을 담은 ‘정윤회 문건’을 보도해 큰 파장을 일으켰다.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 작성한 이 문건은 지금 와서 보면, ‘최순실 게이트’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러나 조 전 사장은 정윤회 문건이 보도된 지 3개월 뒤인 지난해 2월27일 해임됐다. 그로부터 1년9개월이 지난 지금, 조 전 사장은 “당시 세계일보에는 정윤회 문건의 내용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파급력을 가진 8개의 청와대 특급 정보가 함께 들어왔다”고 주장해 파문이 일고 있다.
만약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탄핵 정국으로 치닫고 있는 박근혜 정부에는 치명타일 수 있다. 아울러 조 전 사장은 “정윤회 문건을 공개했다는 이유로 통일교 산하 기업에 대한 특별세무조사가 있었으며, 문건에 담긴 국세청 관련 내용을 더 이상 보도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세무조사를 무마시켰다”고 주장했다.
김일성 사망 직후인 1996년에는 남한 인사들의 대북 접촉이 쉽지 않을 때였는데, 홍석현은 김정일에게 거액의 달러 현금을 두번이나 건넸다고 한다. 당시의 김영삼 정권은 몰랐을 수도 있으나, 그후의 김대중 정권은 알았지만 아무 처벌도 하지 않고 묵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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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현은 누나 홍라희(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부인)와 함께 1998년 8월 21일 북경으로 갔다가 8월 22일 북한에 들어가서 머물다 8월 29일에 돌아왔다. 언론인으로서는 최초의 방북이나 왜 그 시점에 방북을 했는지는 의문이다.[5]
국내 언론사 대표 중 제일 먼저 방북...극진한 대접[6]
홍석현 회장은 중앙일보의 4번째 방북인 1998년 8월 22일 오후 중국 베이징 발 고려항공편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언론사 대표로는 분단 이후 처음 북한을 찾은 순간이다. 명분은 남북간 화해협력과 교류에 관한 논의였다.중앙일보와 홍석현 회장은 김대중 정권때 여러 차례 방북을 하면서 관련 논조가 친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위 중앙일보 게재 사진은 금창태 중앙일보 사장과 김정일 위원장과의 만남 사진이다.
홍 회장 일행은 방북 기간 중 북측으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7박8일의 전 기간 동안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이종혁 부위원장이 동행하는 이례적인 환대를 받은 것이다. 홍석현 회장이 김정일을 만났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북한의 묘향산에 위치한 ‘국제친선전람관’에는 중앙일보와 한겨레 등 남한 언론사가 북한에 보낸 선물이 전시돼 있는데, 여기에 홍석현 회장의 선물도 있다. 홍 회장은 1998년 9월15일 김정일에게 보석이 박힌 고급 손목시계를 선물했다.
방북기간 중 북한의 최고위층과의 만남이 이어졌다. 홍석현 회장은 8월 27일 노동신문사 최고책임자 강덕서 주필대리와 만나 면담했다. 이어 28일에는 윤이상 음악연구소 접견실 및 서재동 초대소에서 진행된 '남북 언론인의 밤' 행사에 참석했다. 이 행사에서 홍석현 회장은 ▷박형규 조선중앙통신사 부사장 ▷조정호 통일신보사 부사장 ▷이의민 중앙TV 시사논평원 등 북한 언론계 인사들을 두루 만났다. 김일성종합대학을 방문해선 부총장과 교직원, 학생들을 만나 좌담회도 가졌다.
홍석현 회장을 수행한 이종혁 부위원장이 이끄는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는 1994년 5월 설치된 조선노동당 외곽단체이며 대남공작기구인 통일전선부 산하 단체이다. 1990년대 후반 현대의 대북사업을 중개하는 역할을 맡으면서 대남사업 주력기관이 됐다. 홍석현 회장은 방북기간동안 노동신문사, 김일성종합대학, 중앙역사박물관, 미술박물관, 인민대학습당, 만수대창작사, 대동문, 연광정, 을밀대, 금강산, 묘향산 등을 둘러봤다.
방북 이후 홍석현 회장은 북한과의 교류와 협력을 주도하는 단체의 장을 맡고, 남북간 교류를 강조하는 등 친북적인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2000년 8월에는 당시 문광부 장관 박지원이 언론사 사장단 46명을 데리고 방북했는데, 중앙일보는 금창태 사장이 방북했다.
정기열과 홍석현의 관계가 처음 드러난 행사는 뉴욕서 열린 '세계문화오픈(WCO) 2004'이다.
아버지 홍진기는 국무위원으로 법무부장관, 내무부장관으로 입신양명하였으나 4.19혁명으로 사형선고후 박정희대통령의 사면으로 말그대로 구사일생하였다. 그리고 이병철회장과의 사돈관계로 집안에 부를 일구었다.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열전편찬위)가 16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열전 수록 가능성이 큰 집중검토 대상자 405명에 대해 발표했는데 이 중 언론자유 침해 관련자 20명을 발표했다. 해당 명단에는 독재자 박정희·전두환, 홍진기 중앙일보 초대회장, ‘5공실세’ 허문도 전 국토통일부 장관 등이 포함됐다.'
'지난 1958년 국가보안법 3차 개정, 이른바 ‘2.4 보안법 파동’은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을 비판하는 언론의 저항으로 점철됐다. 12월24일 한의석 국회부의장의 경위권 발동으로 무술경위 300여명이 의사당에 난입해 새 국가보안법을 통과한 것을 두고 신문들은 ‘국캄, ‘민주주의의 종언’을 선언하기도 했다. 신문들의 이런 태도는 58년 11월7일 자유당 간부와 홍진기 법무부장관(중앙일보 창립자)이 합의한 새 국가보안법에 느닷없이 언론조항이 포함되면서 이미 예견됐던 일이었다. 11월10일 공개된 새 개정안 17조(약속, 협의, 선동, 선전 등) 5항에 “공연히 허위 사실을 허위인줄 알면서 적시 또는 유포하거나 사실을 고의로 왜곡하여 적시 또는 유포함으로써 인심을 혹란케하여 적을 이롭게 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
' 돈만 내면 국가폭력의 장본인도 기념해 줄 것인가. 법대 15동 건물 1층에 최근 새로이 로비가 개관했다. 로비에는 기부자인 홍석규 보광그룹 사장의 선친인 「중앙일보」 창업주 홍진기의 호를 따 ‘유민홀’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러나 홍진기가 생전에 범한 역사적 과오들에 비춰볼 때 ‘유민홀’이라는 명칭은 부적절하다. 홍진기는 이승만 정권에 부역해 국가폭력에 일조한 ‘헌법의 적’이었기 때문이다. '
홍석현의 아버지 홍진기는 서울 토박이 중인계급의 집안으로서 아버지의 쌀가게가 어려워진후 어머니가 거리에서 야채장사로 학비를 벌어 경성제국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였다 한다. [7]그리고 일제시대동안 판사로서 경력을 쌓아 친일파로 몰렸다. 전형적인 중인계급에서 조선시대에서는 절대 개천에서 용날 수 없었다. 그러나 일제시대에서 그는 자신의 머리좋음으로 노력으로 판사까지 올라갔다. 즉, 일제시대이지만 개인의 노력으로 출세할수 있었다. 대한민국 건국후 법무부 공무원으로 새출발하고 이승만 집권 12년의 마지막 3년에 법무부 장관과 내무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그로서는 개인의 노력으로 성공할 수 있는 사회는 과거 조선시대가 아닌 자유민주주의의 대한민국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이승만 정권의 마지막을 앞당기는데에 가장 큰 공을 세웠다.[8]
아버지를 살려준 박정희 대통령의 딸은 탄핵으로[9],사돈으로 부를 일구게 해준 이병철 회장의 손자는 구속[10] 그리고 중앙일보를 통해 좌파에게는 보험을 들었다. [11]. 그러나 보수 길들이기는 잊지 않았다. [12],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