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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월 10일자 서울신문의 김일성 인터뷰 기사. 맹목적인 찬사 외에는 별 내용도 없고, 보천보 사건에 대한 언급조차 없다.

"볼우물"에 띄운 우슴

부드런 눈에 非凡한 불빗
우리의 英雄 金日成 將軍
해방의 해 一九四五년도 저무는 十二월 二十九일 평양시 해방통(平壤市 解放通) 모처 - 아침 햇빗이 밝게 비치는 방 - 지금 기자는 우리민족이 나흔 군사적 천재 천년 영웅아 김일성(三十五歲) 장군과 대하고 잇다. 일즉이 일본 제국주의 압제아래 우리민족이 암담하엿든 경지에 빠져잇슬 때 김일성 장군의 존재는 그 이름과 가치 민족의 태양이엇고 히망이엇다. 얼마나 만흔 청년들이 그 이름아래 용기를 어덧스며 위대한 투쟁에고 궐기하엿든가
「지금 이 사람이 이 청년이 바로 그 사람이다.」
장군의 모습을 똑똑히 뜨더본다. 검붉은 얼굴 짧은 하이카라머리 순하게 쌍까풀진 눈, 웃을 때마다 맨드러지는 볼움물- 완전한 미청년이다.
키는 五척 五촌가량 그다지 뚱뚱한 편은 아니다. 대륙적인 (...) 쾌활한 성격 겸손 명쾌한 태도 여페(옆에)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전날부터의 친지와 가튼 느낌을 준다. 어느 곳에 그 패기와 용담이 숨어잇는지 알기 어려울만하다. 그의 눈은 쏘는듯한 눈은 아닌데 이따금 좌우로 눈초리가 도라갈 때 번적하는 불빗, 양눈섭 근저리에 심상치안케 떠도는 서기 굵고 거새인 목소리- 이러한 것이 이 인물의 독특한 면일가. 평양교외 만경대 농민의 아들로 태여나 十六세 때에 만주에서 비밀단체에 가입하여 징역생활을 하고 一九三一 만주사변 원수 왜적은 고국을 짓발고 다시 또 만주에까지 흉폭한 마수를 뻐치게 되자 이 청년의 피는 고조로 끄러올랐다. 이 해 겨울 十九세의 몸으로 파르치잔부대를 만들어 항일투쟁을 개시하엿다. 이래 장군의 활동은 왜놈의 견딜 수 업는 것이 되여 일본군 十五개 사단을 김장군 부대에 대비시키고 김장군 머리에는 백만원의 상금을 걸엇섯다.
말은 수식이 없고 명쾌한 표현을 한다. 겸손은 비할데 업고 정치가로 출마하느냐는 질문에 자기는 그런 표현에 맛지 안는다고 한다. 청년이나 학생들이 장군장군하고 부르면 「나는 장군이 아니다 여러분의 동무다. 동무라고 불러달라」는 것이다 자신을 선전하거나 화려한 정치무대에 나설 야심은 업고 오직 묵묵히 「머리를 땅에 박고 일만 하면 된다」는 중국 격언을 실천하겟다고 한다. 민중 그중에도 청년들을 몹시 사랑하여 누구하고나 친히 만나고 그들의 말에 열심히 귀를 기우리며 또 그들의 물음에 대하야 친절히 대답해 준다. 가끔 민중대회에 나가서 마이크를 통하야 민주주의를 웨치는데 민중 그 중에도 만흔 청년층의 기대와 신뢰가 노파가고 있다.
이번 싸움이 며칠만 더 계속되엇드면 장군은 그 휘하의 정예를 출동시키어 동만주의 원수 왜적 격멸전을 벌렷스리라고 한다. 전야의 천재아 김장군은 지금은 하나의 시민으로서 민중의 품안에 잇다. 젊은 예지와 용기가 아프로 민족발전에 어떠케 표현될는지 조선의 관심이 아니면 안 된다.

(尹, 徐兩本社特派員記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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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 (1945년8월15일-1950년6월27일) 서울: LG상남언론재단, 2005 [권두표제: 해방공간 4대신문 1945년8월15일-1950년6월27일] (국립중앙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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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2022년 6월 11일 (토) 16:31741 × 2,705 (980 KB)JohnDoe (토론 | 기여)1946년 1월 10일자 서울신문의 김일성 인터뷰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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