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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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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중친미]]: 1950년대부터 화교를 억압하기는 했지만 당시의 반공(反共)기조와 결합하여 본격적으로 화교 네트워크의 고착과 성장을 억제했다. 지금 동남아에서 화교가 막강한 힘을 쥐고있음을 보면 뜻하지 않은 효과를 본것이다. 문재인 때 거래 자체를 막는 부동산 정책이 외국인이 중국인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제주도에 토지를 사면 영주권을 주는 제도로 중국인들이 제주도 땅을 몇배로 올리거 차이나 타운등의 베타적 울타리를 치기도 했다.
*[[반중친미]]: 1950년대부터 화교를 억압하기는 했지만 당시의 반공(反共)기조와 결합하여 본격적으로 화교 네트워크의 고착과 성장을 억제했다. 지금 동남아에서 화교가 막강한 힘을 쥐고있음을 보면 뜻하지 않은 효과를 본것이다. 문재인 때 거래 자체를 막는 부동산 정책이 외국인이 중국인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제주도에 토지를 사면 영주권을 주는 제도로 중국인들이 제주도 땅을 몇배로 올리거 차이나 타운등의 베타적 울타리를 치기도 했다. 지금도 금싸라기 땅인 명동이 당시에는 대부분 화교소유였다.  지금의 한국 식 짜장면이 탄생 한것도 화교탄압, 쌀이 부족해서 혼본 장려, 짜장면 가격통제등 박정희 정부 때 추진한 정책이 영향을 많이 미쳤다. 미국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닉슨은 닉슨독트린으로 동아시아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 선언했고 당사국인 한국과 전혀 혐의 없이 한국에 주둔하던 미7사단을 빼갔다. 도저히 미국을 신뢰해서 안보문제가 해결 되지 않을 것이다 판단한 박정희는 자체 핵개발을 추진한다. 카터가 표면적으로는 인권문제를 시비걸었지만, 사실 실상은 한국의 독자 핵개발이 문제였다. 카터는 아예 주한미군을 빼 버리겠다고 결정했고 박정희가 아무리 미국 대통령을 만나서 한국의 안보문제를 호소해도 마이동풍이었다.  
*유신의 용어가 말해주듯이 메이지 유신에서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유신헌법은 메이지 헌법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메이지 헌법은 독일 영국 등은 당대 서구의 법체계를 많이 참고해서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법체계이다. 박정희도 일본 지배에서 성장했고(태어났을 때 이미 한일볍합 이후였다. ) 교육을 받았기에 그 영향이 없을 수 없다.  박정희가 일본 육군 주도로 만들어진 만주국의 제도를 가져온 것도 많다. 두발단속 등은 실험장이었던 만주국에서 했던 것등이드. 새마을 운동 또한 일제의 아타라시이 무라 츠쿠리 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용어 부터 아타라시이 무라 츠쿠리가 새 마을 만들기 운동이다. 혹자는 교육헌장이 일제시대 때 교육칙어를 베꼈다는 데 그건 사실이 아니다 교육헌장은 교육칙어보다는 독일의 것과 훨씬 많이 비슷하며 실제로도 독일의 것을 참고했다고 이야기 했다.
*유신의 용어가 말해주듯이 메이지 유신에서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유신헌법은 메이지 헌법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메이지 헌법은 독일 영국 등은 당대 서구의 법체계를 많이 참고해서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법체계이다. 박정희도 일본 지배에서 성장했고(태어났을 때 이미 한일볍합 이후였다. ) 교육을 받았기에 그 영향이 없을 수 없다.  박정희가 일본 육군 주도로 만들어진 만주국의 제도를 가져온 것도 많다. 두발단속 등은 실험장이었던 만주국에서 했던 것등이드. 새마을 운동 또한 일제의 아타라시이 무라 츠쿠리 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용어 부터 아타라시이 무라 츠쿠리가 새 마을 만들기 운동이다. 혹자는 교육헌장이 일제시대 때 교육칙어를 베꼈다는 데 그건 사실이 아니다 교육헌장은 교육칙어보다는 독일의 것과 훨씬 많이 비슷하며 실제로도 독일의 것을 참고했다고 이야기 했다.





2024년 5월 21일 (화) 15:30 판

維新體制
10월 유신(十月維新)

"유신 체제는 공산 침략자들로부터 우리의 자유를 지키자는 체제입니다. 큰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적은 자유는 일시적으로 이를 희생할 줄도 알고, 또는 절제할 줄도 아는 슬기를 가져야만 우리는 보다 큰 자유를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를 노리고 있는 침략자들은 우리의 내부에 어떤 허점만 생기기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이런 판국인데, 우리도 남과 같이 주어진 자유라고 해서 이를 다 누리고 싶고, 또 남이 하는 짓은 다 하고 싶고, 그러고도 자유는 자유대로 지키겠다고 한다면, 또 지킬 수 있다고 생각을 한다면, 이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는 환상적인 낭만주의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그렇게도 많은 도전을 받아왔고, 그렇게도 엄청난 피해를 입고도, 또 지금 이 시각에도 그들의 도전이 계속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악몽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벌써 2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국제 사회에는 많은 변동이 생겼습니다. 우리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정세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변천 속에서도 하나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대남 적화 야욕입니다. 이것만은 하나도 변화한 것이 없습니다. 6.25 당시나, 또는 6.25 전이나, 또는 지금이나,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이 엄연한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 박정희, 1974년 10월 1일


개요

유신체제는 1972년 10월 17일에 박정희 대통령이 위헌적 계엄과 국회해산 및 헌법정지 등을 골자로 하는 대통령 특별선언(大統領特別宣言)을 발표한 것을 말한다. 박정희는 이 선언에서 4가지 비상조치를 발표하고 이러한 비상조치 아래 위헌적 절차에 의한 국민투표로 1972년 12월 27일에 제3공화국 헌법을 파괴했는데, 이때의 헌법을 유신 헌법(維新憲法)이라 하며, 유신 헌법이 발효된 기간을 유신 체제(維新體制), 유신 독재(維新獨裁)라고 부른다.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로 이 체제 하에서 대통령은 국회의원의 3분의 1과 모든 법관을 임명하고, 긴급조치권 및 국회해산권을 가지며, 임기 6년에 횟수의 제한 없이 연임할 수 있었다. 또한, 대통령 선출 방식이 국민의 직접 선거에서 관제기구(官制機構)인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선제로 바뀌었다. 유신 체제는 행정·입법·사법의 3권을 모두 쥔 대통령이 종신(終身) 집권할 수 있도록 설계된 1인 절대적 대통령제였다.

자유민주체제의 본질과 근간을 수호하고 강화했으며 해당 체제로 공산주의자들의 일시적인 저지가 가능했고 경제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

유신체재의 배경이 되는 사건이 월남의 공산화, 그리고 여기에 고무된 김일성에 계속되는 전후방에 게릴라를 동원한 도발 행위였다. (이 당시 북한의 도발은 엄청났다. 거진 매일 휴전선에서 사람이 죽어나갔다. 혹자는 이때를 제2의 한국전쟁 시기로 보는 관점도 존재할 정도) 닉슨 독트린 등으로 미국이 개입안한다고 하지 남베트남은 공산화 되지 김일성은 이에 고무되어서 집중적으로 도발하지 이런 위기적 상황이 유신의 배경이 되었다. 적화통일 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국내외적으로 팽배했던 시기였다. 북한 경제 통계를 제대로 신뢰할 수 있을지 여러가지 의문이 들기는 하지만, 남한이 북한을 경제력에서 역전한 기점을 대개 1974년 정도로 본다. 이때는 아직 북한보다 남한이 월등히 잘 살던 시절도 아니었던 것.


독재의 딜레마와 의의

큰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적은 자유는 일시적으로 이를 희생할 줄도 알고, 또는 절제할 줄도 아는 슬기를 가져야만 우리는 보다 큰 자유를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유신체제는 삼권분립을 인정하지 않고 국민의 의사권이 존중되지 않았으므로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독재다. 하지만 시대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당시는 가난이 존재하던 시기라 이성보다는 당장의 먹을것이 먼저이던 시대이므로 당장의 배고픔은 해결해주며 점점 독재로 향하는 공산화가 엄습할 수 있었다. 실제로 국민의 선택만으로는 공산화의 위기가 있었으며 김대중은 40%의 득표율로 무섭게 자유진영을 쫓아오고있었다. 어느 쪽이나 독재로 흐를 수 밖에 없는 상황속에서 유신체제는 필요악이었으며 공산화를 일시적으로 저지하며 후대의 민주화를 위한 과도기였다 할 수 있다.

충분히 발전되지 못한 사회에서는 애초에 민주화 시도 자체가 사회의 호응을 받지 못하며, 국가의 통치권력을 안정시키고 행정과 규칙을 내면화하는 건국 작업이 마무리되기 전에는 통치권력 그 자체가 목표인 통치권력을 확립시키는 것이 사회적 공감대를 받기 마련이다.

유신정우회로 국회의원의 일정수를 임명하는 것등은 일견 좀 너무 해 보이기도 하는게 사실인데, 현재 국회나 정치권이 돌아가는 꼴을 보면 박정희가 왜 그랬는지 어느정도 이해가 되는 측면이 있기도 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국회는 나라보다는 정쟁과 반대를 위한 반대 등을 일삼고 있으니,

일단 산업화 드라이브를 목숨 걸고 혁명을 했는데 중간에 김영삼이나 김대중과 같은 야당(좌파 성향) 지도자 대통령 된다면 죽도 밥도 안돼는 상황이었다.

518 왜곡 처벌법은 막나가는 법이지만, 그 법에 대한 비판은 허용하는데 유신헌법은 유신헌법 자체에 대한 비판도 불허한다.

반대로 보면 518왜곡 처벌법은 유신헌법 바로 전 단계 수준의 법이라는 말이다.

유신헌법은 국민 투표에서 절대다수 찬성에 의해 통과 되었다. 이후 재신임에서도 첫 투표 때만큼은 아니더라도 찬성이 과반을 넘겼다. 법자체는 명백히 민주주의를 파괴한 어떤 면에서 막나가는 측면이 있는 독재법이 맞기는 한데, 그럼에도 어쨋건 재정 과정상의 절차는 지킨 것이다.

박정희는 김대중과 맡붙은 3선 유세 때 다시는 내가 여러분에게 대통령이 되겠다고 표를 구걸하지 않겠다 했는데, 당시나 이후 박정희의 의중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어떤 면에서 유신 체재로 그 말을 지킨 셈이 되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등의 유능한 애국자 지도자는 친일군사독재로 매도하고 몰라보고, 김03이나 이적행위를 한 김대중, 노무현을 추앙하고 문재인을 당선시키고 이재명에게 투표하는 사람이 많은 한국인의 작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렇게 경제개발과 일을 많이하고도 김대중과 표차이가 얼마 안 나는 것을 보고 박정희 본인은 실망을 많이 했던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나 전두환 같은 유능한 지도자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집권이 가능했을 까 의문이 든다. 한국인의 작금의 수준을 생각했을 때. 일단 목숨걸고 혁명을 해서 산업화와 조국 근대화를 하기로 했고 일도 많이 했는데 이런 식으로 가면 죽도 밥도 안됀다 본듯. 한국인의 수준. 한국 정치의 후진성 등을 볼 때 어떤 면에서 당시 유신체재는 좀 어쩔 수 없던 측면이 있기는 했다.

박정희는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했는데, 결과로서 증명했다. 물론 박정희 경제체재의 여러문제점을 차기 지도자인 전두환이 보완 했던 것도 사실이다.(중공업 과잉 중복투자, 외채 등등)

기타

  • 반중친미: 1950년대부터 화교를 억압하기는 했지만 당시의 반공(反共)기조와 결합하여 본격적으로 화교 네트워크의 고착과 성장을 억제했다. 지금 동남아에서 화교가 막강한 힘을 쥐고있음을 보면 뜻하지 않은 효과를 본것이다. 문재인 때 거래 자체를 막는 부동산 정책이 외국인이 중국인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제주도에 토지를 사면 영주권을 주는 제도로 중국인들이 제주도 땅을 몇배로 올리거 차이나 타운등의 베타적 울타리를 치기도 했다. 지금도 금싸라기 땅인 명동이 당시에는 대부분 화교소유였다. 지금의 한국 식 짜장면이 탄생 한것도 화교탄압, 쌀이 부족해서 혼본 장려, 짜장면 가격통제등 박정희 정부 때 추진한 정책이 영향을 많이 미쳤다. 미국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닉슨은 닉슨독트린으로 동아시아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 선언했고 당사국인 한국과 전혀 혐의 없이 한국에 주둔하던 미7사단을 빼갔다. 도저히 미국을 신뢰해서 안보문제가 해결 되지 않을 것이다 판단한 박정희는 자체 핵개발을 추진한다. 카터가 표면적으로는 인권문제를 시비걸었지만, 사실 실상은 한국의 독자 핵개발이 문제였다. 카터는 아예 주한미군을 빼 버리겠다고 결정했고 박정희가 아무리 미국 대통령을 만나서 한국의 안보문제를 호소해도 마이동풍이었다.
  • 유신의 용어가 말해주듯이 메이지 유신에서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유신헌법은 메이지 헌법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메이지 헌법은 독일 영국 등은 당대 서구의 법체계를 많이 참고해서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법체계이다. 박정희도 일본 지배에서 성장했고(태어났을 때 이미 한일볍합 이후였다. ) 교육을 받았기에 그 영향이 없을 수 없다. 박정희가 일본 육군 주도로 만들어진 만주국의 제도를 가져온 것도 많다. 두발단속 등은 실험장이었던 만주국에서 했던 것등이드. 새마을 운동 또한 일제의 아타라시이 무라 츠쿠리 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용어 부터 아타라시이 무라 츠쿠리가 새 마을 만들기 운동이다. 혹자는 교육헌장이 일제시대 때 교육칙어를 베꼈다는 데 그건 사실이 아니다 교육헌장은 교육칙어보다는 독일의 것과 훨씬 많이 비슷하며 실제로도 독일의 것을 참고했다고 이야기 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