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信眉)는 조선 초의 고승이다. 세종, 문종, 세조 등 세 왕의 존숭을 받았으며, 불경 언해와 간행에도 많은 기여를 하였다. 혜각존자(慧覺尊者) 또는 수암화상(秀庵和尙) 등으로도 불린다. 영화 《나랏말싸미》에 한글창제의 주역으로 나오는 바람에 근래 주목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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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신미(信眉)는 영동(영산) 김씨로 속명이 김수성(金守省)이며, 충청도 황간현 출신이다. 아버지는 옥구진(沃溝鎭) 병사였던 김훈(金訓)이며, 어머니는 여흥(驪興) 이씨로 이행(李行, 1352~1432)의 딸이다. 정확한 생졸년은 불명이나 동생 김수온(金守溫, 1410 ~ 1481)보다는 먼저 태어났고, 1480년경까지 생존해 있었다.
행장이나 비문이 남아있지 않아 그의 초기 행적은 불명이다. 그의 정확한 출가 연도도 알 수 없으나, 어렸을 때 출가했을 가능성이 크다. 여러 행적으로 보아 함허 기화(涵虛 己和, 1376~1433)의 제자로 추정되지만, 『함허화상어록(涵虛和尙語錄)』에 나오는 제자 명단에 그의 이름은 없다.
세조가 스승으로 모시던 스님이고, 배불적이던 세종이 소헌왕후(昭憲王后, 1395~1446)가 세상을 떠나면서 불교에 귀의하여 스승으로 받들었다. 이처럼 신미는 왕들의 스승으로, 그에 대한 기록도 무수히 많이 남아 있다.
신미는 속리산 법주사 부속 암자인 복천암(福泉庵)[2]에 주로 거주하였으며, 부도도 거기에 세워져 있고 보물 제1416호로 지정되었다.[3] 곁에는 보물 제1418호인 제자 등곡 학조(燈谷 學祖)의 부도가 있다.[4]
같은 시대에 세조가 존숭한 승려로 묘각 수미(妙覺 守眉)가 있는데, 도갑사에 있는 그의 비문에 법주사에서 신미와 같이 공부했다고 하였다. 나이도 동갑이고 이름도 같은 미(眉)자를 썼기 때문에 두 사람은 각별한 사이였다고 한다. 수미의 비문은 후대에 지은 것이라 명백한 오류도 더러 보인다.[5][6]
한글 창제에 관여했나?
신미가 한글 창제의 주역이라는 주장은 주로 불교계 주변에서 나왔다. 일찍 몇몇 사람들이 한글이 범어(梵語, 산스크리트어)에서 유래한다는 주장을 한 바 있고, 신미가 범어에 능통했기 때문이다. 다른 근거도 제시되고 있으나 모두 정황적인 추정일 뿐이고, 그가 한글 창제에 참여했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다.
- 의문투성이 한글기원…신미 스님이 열쇠 법보신문 2004년 10월 04일
- 한글 창제 일등공신 ‘신미스님’ 스크린에 서다 불교신문 2019.07.16
신미의 출신 가문인 영산 김씨(永山 金氏) 족보에는 신미가 출가하기 전에 집현전 학사로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집현원학사(集賢院學士)’로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得寵於世宗)’], 이것도 그가 한글 창제에 간여했다는 증거라고 제시된다. 하지만, 집현전 학사들의 이름은 대체로 알려져 있는데, 그가 실제로 집현전 학사였을 가능성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또 훈민정음은 1443년 창제, 1446년 반포인데, 세종실록과 문종실록에 의하면 세종이 신미(信眉)를 처음 안 것은 병인년(1446년)이다.[7][8] 따라서 신미는 한글 창제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다만 한글을 가장 빨리 익혔던 모양으로 세조 때 불경 언해 사업에 많이 관여하였고, 당시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불서에 신미의 이름이 수도 없이 나온다.
- 세종은 신미의 존재 몰랐다… ‘나랏말싸미’ 역사 왜곡 논란 : 국민일보 2019-07-25
조선 왕들과의 관계
세종, 문종, 세조 실록에 신미(信眉)의 이름이 자주 나온다. 실록의 편찬은 유신들이 맡았으므로 왕들이 승려를 존중하는 것을 못마땅히 여겼고, 신미 뿐만 아니라 승려들에 대해 좋게 기록한 경우는 거의 없다.
- 『복천보장 [福泉寶藏 n1]』 世宗 31(1449)
왕실에서 복천사(福泉寺)의 신미(信眉)에게 불사용 물품과 함께 보낸 서첩이다. 서두에 나오는 미사(眉師)는 신미(信眉)를 가리킨다. 조선국왕은 세종 본인이며, 세자는 문종이고, 이어서 효령대군, 수양대군(세조), 임영대군 등 왕자들과 수결이 나온다. 만년의 세종이 불교에 귀의하여 신미를 상당히 존숭하고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문종은 세종의 유지를 받들어 신미에게 "선교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禪敎都摠攝 密傳正法 悲智雙運 祐國利世 圓融無碍 慧覺尊者)"라는 긴 칭호를 내렸다.[1]
숭불군주였던 세조는 신미를 지극히 존숭하였고, 불경을 언해하여 간경도감에서 간행하는 일을 신미가 주관하게 했다. 당시 간행된 불서들이 현재도 많이 남아있고, 초기 한글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동생 김수온(金守溫, 1410 ~ 1481)이 지은 『복천사기(福泉寺記)』에도 여러 왕들이 신미를 존중한 사례들이 나온다. 김수온은 괴애(乖崖), 식우(拭疣) 등의 호를 썼다.
- 김수온(金守溫), 식우집(拭疣集) > 記類 > 『복천사기(福泉寺記)』 : 한국문집총간 9권 p.75d 한국고전번역원
- 와유록[臥遊錄 v12] 『福泉寺記』 乖崖 (텍스트)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 와유록[臥遊錄 v12] 『福泉寺記』 乖崖 (이미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함께 보기
- 나랏말싸미
- 신미(信眉) Encyves wiki
- 수미(守眉) Encyves wiki
- 김수온(金守溫)의 식우집(拭疣集) 해제 (한국고전번역원) : 신미의 가계도가 자세히 나옴.
- 이행(李行)의 기우집(騎牛集) 해제 : 신미의 외조부 이행(李行, 1352~1432)의 가계와 행적이 나옴.
각주
- ↑ 1.0 1.1 문종실록 2권, 문종 즉위년 7월 16일 무오 1번째기사 1450년 명 경태(景泰) 1년 : 사헌부에서 신미의 칭호가 부당함을 상소하다
- ↑ 복천암(福泉庵)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보은 법주사 복천암 수암화상탑(報恩法住寺福泉庵秀庵和尙塔)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보은 법주사 복천암 학조화상탑(報恩法住寺福泉庵學祖和尙塔)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도갑사수미왕사비(道岬寺守眉王師碑)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도갑사묘각화상비(道岬寺妙覺和尙碑) 한국금석문 종합영상 정보시스템
- ↑ 세종실록 112권, 세종 28년 5월 27일 갑오 2번째기사 1446년 명 정통(正統) 11년 승도들을 모아 경을 대자암에 이전하다
- ↑ 문종실록 1권, 문종 즉위년 4월 6일 기묘 2번째기사 1450년 명 경태(景泰) 1년 영의정 하연 등과 신미의 관직 제수와 영응 대군의 거처 등을 의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