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
조만식은 평안남도 강서군의 자택에서 8.15 해방을 맞았다. 이후 평양으로 올라와 8월 17일 종로에 있는 오윤선(吳胤善)[1]의 집 사랑방에서 사람들이 모여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를 결성한다.[2][3][4][5] (문헌에 따라 구성원 명단에 차이가 있다. 오윤선의 아들인 극작가 오영진(吳泳鎭, 1916 ~ 1974)은 당시 자신의 집에서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는데 직접 참여도 하였으므로 그의 기억이 정확할 것으로 보인다.)
위원장 : 조만식(曺晩植)
부위원장 : 오윤선(吳胤善)[1]
총무부장 : 이주연(李周淵)
치안부장 : 최능진(崔能鎭)[6]
선전부장 : 한재덕(韓載德)
교육부장 : 홍기주(洪箕疇)[7]
산업부장 : 홍정모(洪貞模)
재정부장 : 박승환(朴承煥)
생활부장 : 이종현(李宗鉉)[8]
지방부장 : 이윤영(李允榮)
외교부장 : 정기수(鄭基秀)
김병연(金炳淵)과 이주연(李周淵)은 조만식의 수제자격으로 김(金)은 민족주의자로, 이(李)는 사회주의운동으로 오래 감옥살이를 했다고 한다. 후에 이(李)는 조만식을 배반하고 북로당원이 되었다고 한다.[2]
건준 선전부장 한재덕(韓載德, 1911~1970)은 나중에 김일성에 협력하다 일본 공작원으로 파견되자 1959년 2월 한국으로 귀순했는데, 당시 건준 위원 20여명 중에서 공산주의자는 이주연과 자신 둘 뿐이었다고 하였다.[10] 당시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릴 정도로 기독교세가 강하여 공산주의자들은 별로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고 하므로 건준에 이들을 많이 넣어줄 필요성도 없었다고 한다.
당시는 남북 분단이 되리라고는 예상할 수 없는 시기이고, 평남건준은 정부를 만든다기 보다는 치안유지가 주목적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11]
(평남 건준은 여운형이 주도한 서울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는 별 관계가 없다. 여운형도 조만식과 아는 사이였지만, 평양을 들락거리며 김일성이나 소련군정 관계자들과 접촉하면서도 연금된 조만식의 석방을 위해 노력한 흔적은 전혀 없다.)
함께 보기
각주
- ↑ 1.0 1.1 기독교 장로이며 일제하에 조만식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다. 월남하여 남한에서 활동한 극작가 오영진(吳泳鎭, 1916 ~ 1974)의 부친이다.
- ↑ 2.0 2.1 2.2 2.3 오영진(吳泳鎭, 1916 ~ 1974), ≪소군정하의 북한-하나의 증언≫, (국민사상지도원, 1952), 35∼36쪽 ; 복간본 (국토통일원, 1983) pp.22 ~ 25
- ↑ 신편 한국사 근대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 1) 해방 후 북한 각 지역의 인민위원회 수립과 소련군 주둔 (2) 각 지역 인민위원회의 성립과 개편 우리역사넷
- ↑ 북한연표 : 평안남도건국준비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국사편찬위원회
- ↑ [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3)] 조만식 : 평양서 민족계열인 조선민주당 창당 주간조선 [1919호] 2006.08.28
- ↑ 최능진(崔能鎭, 1899 ~ 1951) - 위키백과
- ↑ 홍기주(洪箕疇)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 이종현(李宗鉉, 1904~195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김동원(金東元, 1884년 ~ 1951년) - 위키백과
- ↑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 〈金日成(김일성) 直屬記者(직속 기자)의 手記(수기)〉 (2) 韩載德(한재덕)) 1962.05.05 동아일보 2면 : 眞正(진정)한 解放(해방) 단지 10日(일) / 不幸(불행)의 씨! 蘇軍進駐(소군진주) /…愛國心(애국심)·自治力誇示(자치력과시)한貴重(귀중)한몇날…
- ↑ 國史館論叢 第54輯 > 해방직후 북한우익의 노선과 활동(이승현) > Ⅱ. 해방과 우익세력의 조직화 > 2. 해방직후 자치조직의 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