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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ximilien de Robespierre
1758년 5월 6일 ~ 1794년 7월 28일

개요

프랑스 혁명 시기의 정치인이다.

생애

학창시절

변호사

정치인

루이 16세 처형

로베스피에르는 루이 16세의 처형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기존 왕정 체제에서의 권한과 지위를 잃어버린 루이 16세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 시작하여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친정인 오스트리아로 망명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1791년 6월 21일 왕 루이 16세마리 앙투아네트와 자신의 아들 루이 샤를 등 가족들과 함께 마차를 타고 파리를 빠져나갔다. 그런데 오스트리아에 도달하기 전에 프랑스의 국경지방인 바렌에서 시민군에 발각되어 파리로 압송되었다. 이를 바렌 사건이라 한다.

이 사건 직후 당시 프랑스의 국민공회는 이 루이 16세내외의 국외 탈출 미수사건에 대한 처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논의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국민공회 의원의 대다수는 그래도 지금까지 모시던 왕인데다 루이 16세는 특별한 이적행위를 하거나 폭정을 휘두르던 사람이 아니었기에 사형으로 처리할 만한 사건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런데 그때 로베스피에르가 국민공회 의사당에 나타나 루이 16세를 사형시킬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만약 루이 16세가 용서되거나, 만약 무죄라면 혁명은 어찌 되는 겁니까?

만약 루이 16세가 무죄라면 모든 자유의 수호자들은 중상모략꾼들이 되고 맙니다.

국가가 살기 위해선 왕(루이 16세)이 죽어야 합니다.

요약하면 루이 16세가 무죄라면 혁명이 유죄가 되기에 무조건 사형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로베스피에르의 연설로 분위기가 반전되어 사형반대표와 사형찬성표가 엇비슷한 가운데 결국 사형찬성표가 근소하게 많게 나와 루이 16세의 사형이 가결되었다.

루이16세의 처형, 1794년 작

이리하여 루이 16세는 추운 겨울 파리 한복판의 콩도르셰 광장에 설치된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었다. 1793년 1월 21일의 일이었다. 같은 해 10월 16일에는 루이 16세의 아내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었고, 루이 16세의 아들인 루이 샤를은 평민 가정에 강제 입양되었다가 각종 학대를 받아 사망했다.

경제정책

로베스피에르가 속한 당은 자코뱅당이었다. 이 자코뱅당과 로베스피에르는 프랑스 혁명 이후 권력을 장악하고, 각종 정책을 시행했는데, 지나치게 급진적이거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정책이 많았다. 특히 경제정책면에서 아주 문제가 많았다. 대표적 사례가 바로 우유가격제한정책이다. 로베스피에르는 일반 국민이 우유를 싸게 먹게 해주겠다는 명목 아래 우유 가격을 제한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그런데 이 정책이 시행되자 우유 공급이 줄어 국민들이 우유를 구하기 어려워지고 암시장이 형성되어 더 비싼 값을 주고 우유를 사먹는 상황이 되었다. 이런 식의 경제정책이 계속되어 로베스피에르와 자코뱅당에 대한 지지는 계속해서 하락하였다.

공포정치

로베스피에르는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공포정치를 시행하였다. 반대파들을 단두대로 보내 처형하고 '공안위원회'를 조직하여 시민들을 억압했다. 억압으로부터 국민을 해방시키고자 했던 혁명의 결과로 생긴 정부가 이전보다 더 국민을 억압하는 기막힌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런 공포 정치에도 민심 이반을 막을 수는 없었고, 이런 추세가 지속되며 로베스피에르 정권의 핵심 인물중의 하나인 마라가 암살되는 상황까지 벌어진다.

공포정치

단두대로 흥하고 단두대로 망하다

평가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