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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명인 두상에 일봉 (假明人 頭上에 一棒)」은 명나라를 숭배하는 조선후기 유신들과 사림을 비판한 권덕규(權悳奎, 1890~1950)의 논설로 1920년 5월 8일과 9일 동아일보 1면에 실렸다.
「가명인 두상에 일봉 (假明人 頭上에 一棒)」은 ‘가짜 명(明)나라 사람 머리에 몽둥이 한 대’라는 의미로 명나라를 숭배하는 조선후기 유신들과 사림을 비판한 권덕규(權悳奎, 1890~1950)<ref name="kwon">[http://nlcollection.nl.go.kr/front/detail/detail.do?rec_key=CO0000003902&category_id=CA0000000056&chkApp= 한글보급에 앞장선 한글학자이자 민족의식을 일깨운 역사학자, 권덕규(權悳奎)] 국립중앙도서관 > 역사 > 한국의위대한인물</ref><ref name="kwon1">[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6870 권덕규(權悳奎, 1890~195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논설인데 1920년 5월 8일과 9일 동아일보 1면에 실렸다.
 
==개요==
권덕규(權悳奎, 1890~1950)<ref name="kwon"/><ref name="kwon1"/>는 1920년 「가명인 두상에 일봉(假明人 頭上에 一棒)」이라는 동아일보에 기고한 논설을 통해,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내고 그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崇禎帝) [https://ko.wikipedia.org/wiki/%EC%88%AD%EC%A0%95%EC%A0%9C 의종(毅宗, 1611~1644, 재위 1628~1644)]의 연호를 고집하던 당시의 유학자들을 가리켜
<blockquote>"심장도 창자도 없는 지나사상의 노예"</blockquote>
라 표현하며
<blockquote>"충효의 가르침을 제 땅과 제 민족을 위해 쓰지 아니하고 자기와 아무 관계없는 다른 놈에게 들이 바치니, 그 더러운 소갈머리야 참으로 개도 아니 먹겠다"</blockquote>
고 일갈하였다.
 
==기사 원문 이미지==
아래는 권덕규(權悳奎, 1890~1950)의 논설 「가명인 두상에 일봉(假明人 頭上에 一棒)」기사 2회분 원문 이미지이다. 클릭하면 확대된 이미지를 볼 수 있다.


[[파일:가명인 두상에 일봉 (1).jpg|800픽셀|섬네일|가운데|한별(桓民),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0050800209201006&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0-05-08&officeId=00020&pageNo=1&printNo=36&publishType=00020 「假明人 頭上(가명인 두상)에 一棒(일봉) (一)」] 동아일보 1920-05-08 1면]]
[[파일:가명인 두상에 일봉 (1).jpg|800픽셀|섬네일|가운데|한별(桓民),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0050800209201006&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0-05-08&officeId=00020&pageNo=1&printNo=36&publishType=00020 「假明人 頭上(가명인 두상)에 一棒(일봉) (一)」] 동아일보 1920-05-08 1면]]


[[파일:가명인 두상에 일봉 (2).jpg|800픽셀|섬네일|가운데|한별(桓民),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0050900209201004&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0-05-09&officeId=00020&pageNo=1&printNo=37&publishType=00020 「假明人 頭上(가명인 두상)에 一棒(일봉) (二)」] 동아일보 1920-05-09 1면]]
[[파일:가명인 두상에 일봉 (2).jpg|800픽셀|섬네일|가운데|한별(桓民),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0050900209201004&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0-05-09&officeId=00020&pageNo=1&printNo=37&publishType=00020 「假明人 頭上(가명인 두상)에 一棒(일봉) (二)」] 동아일보 1920-05-09 1면]]
==논란==
동아일보는 1920년 4월 1일 창간되었는데, 위 권덕규의 기사보다 며칠 앞서 [http://dongne.donga.com/2009/07/14/d-story-16-%EC%82%AC%ED%9A%8C%EC%A3%BC%EC%9D%98-%EC%8B%A0%EB%B4%89%EC%9E%90-%EA%B9%80%EB%AA%85%EC%8B%9D-%EB%B0%95%EC%9D%BC%EB%B3%91-%EC%84%A0%EC%83%9D/ 송산 김명식(松山 金明植 · 1890~1943)] 기자도 ‘조선부로(朝鮮父老)에게 고함’(1920년 5월 4일자부터 9일자까지 6회 연속 게재)이라는 글에서 낡은 인습을 타파하자는 주장을 편 바 있다.<ref>[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005040020920100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0-05-04&officeId=00020&pageNo=1&printNo=32&publishType=00020 朝鮮父老(조선부로)에게 告(고)함 (一)] 동아일보 1920-05-04 1면<br>[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005050020920100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0-05-05&officeId=00020&pageNo=1&printNo=33&publishType=00020 朝鮮父老(조선부로)에게 告(고)함 (二)] 동아일보 1920-05-05 1면<br>[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005060020920100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0-05-06&officeId=00020&pageNo=1&printNo=34&publishType=00020 朝鮮父老(조선부로)에게 告(고)함 (三)] 동아일보 1920-05-06 1면<br>[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005070020920100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0-05-07&officeId=00020&pageNo=1&printNo=35&publishType=00020 朝鮮父老(조선부로)에게 告(고)함 (四)] 동아일보 1920-05-07 1면<br>[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005080020920100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0-05-08&officeId=00020&pageNo=1&printNo=36&publishType=00020 朝鮮父老(조선부로)에게 告(고)함 (五)] 동아일보 1920-05-08 1면<br>[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005090020920100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0-05-09&officeId=00020&pageNo=1&printNo=37&publishType=00020 朝鮮父老(조선부로)에게 告(고)함 (六)] 동아일보 1920-05-09 1면</ref>
권덕규의 위 논설과, 김명식 기자의 기사에 대한 유림의 거센 항의로 동아일보 초대사장 박영효(朴泳孝)는 창간 3개월만인 7월 1일에 사퇴하게 된다.<ref>[http://goha.or.kr/gn5/upload/goha_vol_1.pdf 독립을 향한 집념 : 고하 송진우 전기] pp.104~105</ref><ref>[http://dongne.donga.com/2016/05/23/11-초대-사장-박영효朴泳孝/ 초대 사장 박영효(朴泳孝)] 동네 -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ref> 동아일보는 권덕규 논설에 대해 사과문을 내지 않는 대신에 반론을 실었다.<ref>漢陽過客,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005130020920100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0-05-13&officeId=00020&pageNo=1&printNo=41&publishType=00020 讀東亞日報(독동아일보)] 동아일보 1920-05-13 1면<br>漢陽過客,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0051400209201004&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0-05-14&officeId=00020&pageNo=1&printNo=42&publishType=00020 讀東亞日報(독동아일보) (續)] 동아일보 1920-05-14 1면</ref><ref>[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005170020920100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0-05-17&officeId=00020&pageNo=1&printNo=45&publishType=00020 『假明人頭上(가명인두상)에 一棒(일봉)』과 儒敎(유교)의 眞髓(진수) (一(일))] 동아일보 1920-05-17 1면<br>[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005180020920100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0-05-18&officeId=00020&pageNo=1&printNo=46&publishType=00020 『假明人頭上(가명인두상)에 一棒(일봉)』과 儒敎(유교)의 眞髓(진수) (二(이))] 동아일보 1920-05-18 1면<br>[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005190020920100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0-05-19&officeId=00020&pageNo=1&printNo=47&publishType=00020 『假明人頭上(가명인두상)에 一棒(일봉)』과 儒敎(유교)의 眞髓(진수) (三(삼))] 동아일보 1920-05-19 1면<br>[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005200020920100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0-05-20&officeId=00020&pageNo=1&printNo=48&publishType=00020 『假明人頭上(가명인두상)에 一棒(일봉)』과 儒敎(유교)의 眞髓(진수) (四(사))] 동아일보 1920-05-20 1면</ref>
권덕규는 동아일보 사주 [[김성수|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가 인수, 운영한 중앙학교의 교사였으므로<ref>[http://dongne.donga.com/2018/04/03/%E6%9D%B1%E4%BA%9E-100%EB%85%84-%E6%9D%B1%E5%8F%8B-100%EC%9D%B8/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 - 일제폭압 맞서 언론·교육·기업 인재 키운 거목]  동네 - 동아미디어그룹 공식블로그</ref><ref>[http://choongang.hs.kr/?act=doc&mcode=1011 중앙고등학교 연혁]</ref>, 그가 쓴 논설에는 신학문을 수용하여 교육하려는 [[김성수]]의 의중이 반영되었을 수도 있다.
구한말에는 위정척사파 등 숭명배일(崇明排日)의 성리학 원리주의자들이 많았으나, 일제시대를 거친 후 해방 정국에서는 왕정복고파나 성리학을 표방하는 정당은 없었다. 21세기에 들어와 성리학 원리주의자들과 유사한 세력들이 활개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아래 최영성(崔英成)의 논문에는 위 권덕규의 논설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5588 이인(李仁, 1896~1979)]이 1931년 1월 『신민(新民)』지에 기고한 글 《신법률만평(新法律漫評)》<ref>李仁, [http://db.history.go.kr/id/ma_077_0530_0050 新法律漫評], 신민 제64호 1931-01-01</ref>에 의해 촉발된 논란에 대한 해설이 나온다.
* 최영성, [http://archive.locality.kr/sub_pg/journals_view.html?srchzdc=46&zdoc=2118&subzdoc=2391 《경석 임헌찬(敬石 任憲瓚)의 학문과 사상 -조선 후기 '농암(農巖).노주(老洲) 계열'의 학문 성격과 관련하여-》] 한국민족문화 22호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03.10) p.51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2538 경석집(敬石集)] / [http://www.seowonstay.com/bbs/board.php?bo_table=slist&wr_id=678 덕성서원(德星書院)]
==참고 자료==
* [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200324/100322148/1 <nowiki>[동아플래시100]</nowiki>‘공자 왈 맹자 왈’ 중국 떠받드는 세대에 몽둥이 한대!] 동아일보 2020-03-24
* [http://yulgok.geeo.kr/wordpress/2019/10/24/%EC%9E%84%ED%97%8C%EC%B0%AC%E4%BB%BB%E6%86%B2%E7%93%9A/ 임헌찬(任憲瓚, 1876∼956)] 2019, 율곡학 인물들, 율곡학사업 2019-10-24
==함께 보기==
* [[대보단|대보단(大報壇)]]
* [[만동묘|만동묘(萬東廟)]]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2612 조종암 대통묘(朝宗巖 大統廟)]
* [[대명천지 숭정일월|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
* [[만절필동|만절필동(萬折必東)]]


==각주==
==각주==
9번째 줄: 44번째 줄:


[[분류:사대주의]]
[[분류:사대주의]]
[[분류:성리학]]
[[분류:중국]]

2022년 3월 22일 (화) 19:25 기준 최신판

「가명인 두상에 일봉 (假明人 頭上에 一棒)」은 ‘가짜 명(明)나라 사람 머리에 몽둥이 한 대’라는 의미로 명나라를 숭배하는 조선후기 유신들과 사림을 비판한 권덕규(權悳奎, 1890~1950)[1][2]의 논설인데 1920년 5월 8일과 9일 동아일보 1면에 실렸다.

개요

권덕규(權悳奎, 1890~1950)[1][2]는 1920년 「가명인 두상에 일봉(假明人 頭上에 一棒)」이라는 동아일보에 기고한 논설을 통해,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내고 그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崇禎帝) 의종(毅宗, 1611~1644, 재위 1628~1644)의 연호를 고집하던 당시의 유학자들을 가리켜

"심장도 창자도 없는 지나사상의 노예"

라 표현하며

"충효의 가르침을 제 땅과 제 민족을 위해 쓰지 아니하고 자기와 아무 관계없는 다른 놈에게 들이 바치니, 그 더러운 소갈머리야 참으로 개도 아니 먹겠다"

고 일갈하였다.

기사 원문 이미지

아래는 권덕규(權悳奎, 1890~1950)의 논설 「가명인 두상에 일봉(假明人 頭上에 一棒)」기사 2회분 원문 이미지이다. 클릭하면 확대된 이미지를 볼 수 있다.

한별(桓民), 「假明人 頭上(가명인 두상)에 一棒(일봉) (一)」 동아일보 1920-05-08 1면


한별(桓民), 「假明人 頭上(가명인 두상)에 一棒(일봉) (二)」 동아일보 1920-05-09 1면

논란

동아일보는 1920년 4월 1일 창간되었는데, 위 권덕규의 기사보다 며칠 앞서 송산 김명식(松山 金明植 · 1890~1943) 기자도 ‘조선부로(朝鮮父老)에게 고함’(1920년 5월 4일자부터 9일자까지 6회 연속 게재)이라는 글에서 낡은 인습을 타파하자는 주장을 편 바 있다.[3]

권덕규의 위 논설과, 김명식 기자의 기사에 대한 유림의 거센 항의로 동아일보 초대사장 박영효(朴泳孝)는 창간 3개월만인 7월 1일에 사퇴하게 된다.[4][5] 동아일보는 권덕규 논설에 대해 사과문을 내지 않는 대신에 반론을 실었다.[6][7]

권덕규는 동아일보 사주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가 인수, 운영한 중앙학교의 교사였으므로[8][9], 그가 쓴 논설에는 신학문을 수용하여 교육하려는 김성수의 의중이 반영되었을 수도 있다.

구한말에는 위정척사파 등 숭명배일(崇明排日)의 성리학 원리주의자들이 많았으나, 일제시대를 거친 후 해방 정국에서는 왕정복고파나 성리학을 표방하는 정당은 없었다. 21세기에 들어와 성리학 원리주의자들과 유사한 세력들이 활개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아래 최영성(崔英成)의 논문에는 위 권덕규의 논설과, 이인(李仁, 1896~1979)이 1931년 1월 『신민(新民)』지에 기고한 글 《신법률만평(新法律漫評)》[10]에 의해 촉발된 논란에 대한 해설이 나온다.

경석집(敬石集) / 덕성서원(德星書院)

참고 자료

함께 보기

각주

  1. 1.0 1.1 한글보급에 앞장선 한글학자이자 민족의식을 일깨운 역사학자, 권덕규(權悳奎) 국립중앙도서관 > 역사 > 한국의위대한인물
  2. 2.0 2.1 권덕규(權悳奎, 1890~195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朝鮮父老(조선부로)에게 告(고)함 (一) 동아일보 1920-05-04 1면
    朝鮮父老(조선부로)에게 告(고)함 (二) 동아일보 1920-05-05 1면
    朝鮮父老(조선부로)에게 告(고)함 (三) 동아일보 1920-05-06 1면
    朝鮮父老(조선부로)에게 告(고)함 (四) 동아일보 1920-05-07 1면
    朝鮮父老(조선부로)에게 告(고)함 (五) 동아일보 1920-05-08 1면
    朝鮮父老(조선부로)에게 告(고)함 (六) 동아일보 1920-05-09 1면
  4. 독립을 향한 집념 : 고하 송진우 전기 pp.104~105
  5. 초대 사장 박영효(朴泳孝) 동네 -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6. 漢陽過客, 讀東亞日報(독동아일보) 동아일보 1920-05-13 1면
    漢陽過客, 讀東亞日報(독동아일보) (續) 동아일보 1920-05-14 1면
  7. 『假明人頭上(가명인두상)에 一棒(일봉)』과 儒敎(유교)의 眞髓(진수) (一(일)) 동아일보 1920-05-17 1면
    『假明人頭上(가명인두상)에 一棒(일봉)』과 儒敎(유교)의 眞髓(진수) (二(이)) 동아일보 1920-05-18 1면
    『假明人頭上(가명인두상)에 一棒(일봉)』과 儒敎(유교)의 眞髓(진수) (三(삼)) 동아일보 1920-05-19 1면
    『假明人頭上(가명인두상)에 一棒(일봉)』과 儒敎(유교)의 眞髓(진수) (四(사)) 동아일보 1920-05-20 1면
  8.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 - 일제폭압 맞서 언론·교육·기업 인재 키운 거목 동네 - 동아미디어그룹 공식블로그
  9. 중앙고등학교 연혁
  10. 李仁, 新法律漫評, 신민 제64호 1931-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