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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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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에 참여한 양측의 병력과 지휘관은 아래와 같다.<ref>[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1937-06-30_간삼봉_전투.pdf 국경지방에서의 치안 상황 : 제73회 제국의회 설명자료(帝國議會 說明資料)]  1937 (소화12년)</ref><ref>[https://commons.wikimedia.org/wiki/Category:Kansambong_Battle 간삼봉 전투와 관련한 당시 신문 보도]</ref>
1937년 6월 30일의 전투에 참여한 양측의 병력과 지휘관은 아래와 같다.<ref>[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1937-06-30_간삼봉_전투.pdf 국경지방에서의 치안 상황 : 제73회 제국의회 설명자료(帝國議會 說明資料)]  1937 (소화12년)</ref><ref>[https://commons.wikimedia.org/wiki/Category:Kansambong_Battle 간삼봉 전투와 관련한 당시 신문 보도]</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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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27일 (수) 17:26 판

간삼봉 전투(間三峰 戰鬪)는 1937년 6월 4일의 보천보사건 직후인 6월 30일 함경남도 신갈파진(新乫坡鎭)[1]의 대안(對岸) 장백현 13도구(長白縣 十三道溝)에서 동북항일연군 1로군 2사(師), 4사, 6사 연합부대와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를 말한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지휘하여 일본군 1,500여명을 죽이고, 엄청난 대승을 거둔 것처럼 주장하나[2], 당시 신문에는 일본군 전사자 5명, 항일연군 전사자 50~60여명으로 일본군이 크게 승리한 전투로 보도되었다.[3][4]

개요

1937년 6월 30일의 전투에 참여한 양측의 병력과 지휘관은 아래와 같다.[5][6]

구분 동북항일연군 일본군
병력 1로군 2사, 4사, 6사 연합군 500여명 함흥연대(74연대)와 혜산진 수비대 230명; 만주군, 일본 경찰 지원 받음.
지휘관 2사장 조국안, 4사 1단장 최현, 6사장 김일성 함흥연대 김인욱(金仁旭, 1892~ ?) 소좌

전투 결과에 대한 기록과 주장들

당시 신문 보도와 일본측 기록

당시 전투에서 양측 피해자로 일본군 측은 전사자 5명, 중상자 5명, 경상자 7명, 동북항일연군 측은 전사자 50 ~ 60 여명이라 하였다. 이를 따르면 일본군 측의 대승이라 할 수 있다.

매일신보 7월 4일자는 전사자 5명의 명단과 사진까지 싣고 있으므로[7], 전사자 수를 축소 조작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항일연군 측과는 달리 일본군은 정규 군대로 전사자에 대한 장례 문제나 유족에 대한 보상 문제 등이 뒤따르므로 인명 피해를 함부로 조작해서 보고하기는 어렵다.

북한의 주장

김일성 회고록에는 간삼봉 전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는데, 대부분 지어낸 소설이다.[2]

어떤 자료를 보면 그때 함흥 제74련대를 인솔해가지고 《토벌》에 동원된 일본군측 지휘관이 김인욱이라는 조선인이였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그 당시 국내와 장백의 지하조직들에서 우리에게 보내온 통보자료들은 한결같이 《토벌대》를 이끌고 함흥을 떠난 적장의 이름을 김석원이라고 밝히고있었다.

후에 알게 되였지만 김석원은 일제가 소문을 크게 내려고 함흥역에서 조직한 요란한 장행식에서 혈서로 《무운장구》라고 쓴 기발을 들고 일본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였으며 김일성부대를 몰살시키겠다고 매우 격해서 떠들어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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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조직들에서 보내온 자료를 종합해보면 《토벌》에 동원된 적의 무력은 약 2,000명 정도로 추정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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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4사, 2사의 지휘관들과 함께 전투방안을 짜놓은 다음 새벽녘에 권영벽, 김재수,정동철을 비롯하여 우리의 부름을 받고 간삼봉으로 찾아온 국내와 장백지방의 정치공작원들과 함께 혁명조직들의 사업방향과 임무에 대하여 토의하였다.

적들이 간삼봉으로 공격해온것이 바로 이날아침이였다. 새벽부터 가랑비가 내리고 안개가 뿌옇게 끼였는데 최현부대가 차지한 산봉우리에 있는 보초소에서 먼저 신호총소리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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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들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도 저녁때가 되도록 폭우속에서 공격을 중단하지 않았다. 이런 때 우리는 팔반도쪽에 정찰임무를 받고 나갔다가 돌아오는 박성철소부대와 식량공작조에 련락하여 적의 뒤통수를 때리게 하였다. 김석원은 앞뒤에서 얻어맞을 위험이 생기고 날까지 어두워지자 200명가량밖에 안되는 패잔병들을 모아가지고 싸움터에서 도망치고말았다.

...................

간삼봉전투가 있은 얼마후 우리 동무들은 전장근처의 마을들에 갔다가 적들의 패전상을 상세히 알아가지고 왔다.

전투가 있은 다음날부터 적들은 혜산, 신파와 간삼봉부근에 있는 마을들에서 담가와 우마차, 자동차들을 징발하여 시체운반을 하였다. 그고장 농민들의 말에 의하면 전투직후 간삼봉과 그 일대의 부락들에는 일본군의 시체가 한벌 깔려있었다고 한다. 적들은 시체마다에 흰광목천을 덮어놓고 사민들이 얼씬 못하게 단속하였다. 적들이 제일 두려워한것은 저들의 패전상이 만천하에 드러나는것이였다. 그들은 신문에 간삼봉전투실황을 소개할 때에도 사상자수가 얼마 안되는것처럼 허위보도를 하였다.

김석원이 우리를 치겠다고 신파에서 압록강을 건너올 때는 하루종일 걸렸는데 다시 건너갈 때는 반시간 남짓하게 걸렸다고 한다.

사상자수가 어찌나 많았던지 시체에서 머리만 잘라서 마대나 나무상자에 넣어 우마차에 실어 자동차가 있는데까지 날랐다. 그러면 시꺼먼 풍을 친 자동차들이 그 마대와 나무상자들을 싣고 압록강을 건너갔다. 시체들을 화장하는 연기와 냄새때문에 간삼봉지구 농민들은 며칠동안 숨도 제대로 쉴수 없었다고 한다.

시체운반에 동원된 일본병사에게 어떤 농민이 시치미를 떼고 《나리, 달구지에 싣고가는게 무엇입니까.》하고 묻자 일본병사는 능청스럽게 《가보쨔》라고 대답하였다. 호박이라는 뜻이다.

그러자 농민도 싱글벙글하면서 《가보쨔농사가 대풍이군요. 좋은 국거리니 많이들 자시우.》하고 야유하였다. 그때부터 항간에는 《호박대가리》라는 말이 생겨났다. 인민들은 일본군시체만 보면 《호박대가리》라고 풍자하였다.

김석원과 그의 패잔병들은 번화한 혜산을 거치지 않고 조심스레 신파와 풍산으로 빠져 함흥으로 돌아갔다. 출동할 때는 장행식까지 하면서 떠들썩했던 함흥역이 돌아올 때는 초상난 집같은 광경이였다. 역두에 나온것은 병영에 남아있던 병졸들뿐이였다. 그 병사들이 부상자투성인 출정군인들을 복판에 세우고 거리를 가까스로 지나갔다. 시민들의 눈을 속이고 패망상을 감추자니 그런 궁상스러운짓도 하였을것이다.

..............

우리는 이 싸움을 통하여 《무적황군》의 신화를 완전히 깨뜨려버리고 조선인민혁명군의 위력을 만천하에 다시한번 과시하였다. 간삼봉전투는 조선인민혁명군이 백두산지구에 진출한후 항일혁명의 전성기를 마련하는데서 하나의 뚜렷한 몫을 차지하고있는 중요한 싸움이였다.

운명의 조화라고 할가. 우리의 숙적이였던 김석원은 해방후 또다시 38선을 사이에 두고 최현과 대결하였다. 최현은 거기서 경비려단을 지휘하였다. 리승만이 김석원을 38선가까이에 밀어보낸것을 보면 간삼봉에서 당한 참패를 만회할 기회를 마련해주느라고 그랬는지도 모른다.

작가들이 쓴 김일성 회고록과 달리, 한재덕(韓載德, 1911~1970)이 북한에 있을 때인 1947년에 쓴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의 부록[8]에는 혜산사건 판결서를 번역하여 싣고 있는데, 간삼봉 전투와 관련하여 나오는 일본 측 피해 내용은 위의 당시 신문보도나 일본측 기록과 완전히 같다. 북한도 처음에는 간삼봉 전투에 관한 일본측 기록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8] p.240 (부록 p.40) - 혜산사건 판결서 번역문 중 간삼봉 전투 관련 부분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부대원(部隊員)인 피고인(被告人) 김주현(金周顯)은 소화 12년(昭和 十二年, 1937년) 6월 하순경(六月 下旬頃) 장백현 13도구 오지(長白縣 十三道溝 奧地)에서 김일성 사장(金日成 師長) 이하 약 300명(以下 約三百名)의 대원(隊員)과 가치 이동중(移動中) 함흥 제 74연대( 咸興第七十四聯隊) 육군소좌(陸軍少佐) 김인욱 부대(金仁旭 部隊) 110명(百十名)과 조우(遭遇)하자 이를 전멸(全滅)시킬 목적(目的)으로서 일제사격(一齊射擊)을 하여 상등병 중택 등(上等兵 中澤 等) 5명(五名)을 사살(射殺)하고 하사 이하 7명(下士 以下 七名)에게 총창(銃創)을 입히었다.

연변 학계의 주장

중국 연변의 학자들은 차마 북한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지는 못하지만, 항일연군 측이 크게 승리한 전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명확한 문헌적 근거는 없는 것 같고, 항일연군에 참여한 사람들의 후일 증언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항일연군 측은 늘 쫓겨 다니는 입장이라 부대도 자주 이동해야 했고, 1로군은 1941년 초에 완전히 궤멸되었기 때문에 관련 기록이 남아 있기 어렵다. 애초에 기록을 제대로 작성할 여유도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정세도 크게 변하고, 상당한 세월이 흐른 뒤의 후일 증언들이 정확하다고 믿기도 어렵고, 자신들의 전과를 부풀려 말하지 않았다는 보장도 없다.

말 나온 김에 간삼봉 전투의 진실도 말씀드리면, 북한은 이를 일본군 74연대 2천명 중 1천5백명을 죽여 ‘호박대가리’ 전설이 나오게 된 전투라 선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론 일본군이 150명 정도에 동북항일연군 3개사 500명 정도가 붙은 전투로 실제 일본군 전사자는 50~60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유아시아방송(RFA)의 위 방송 내용은 재미 조선족 작가 유순호의 주장을 소개한 것이다.

한국 학계의 입장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51권에는 간삼봉 전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나온다.[9]

...이를 탐지한 동북항일연군 연합부대 500여 명은 간삼봉 일대의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고 주요 진지에 매복하여 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일본군과 만주국 군경은 2개 부대로 나누어 세방면에서 간삼봉 일대에 진입하였다. 6월 30일 8시 경부터 시작된 전투는 저녁에야 끝날 정도로 치열하였다. 이 전투에서 동북항일연군은 만주국 군경 50여 명, 일본군 수십명을 섬멸하였다. 특히 일본군은 부응동(富應洞) 근처에서 동북항일연군의 기습을 받고 대장인 김인욱 소좌가 부상을 입는 등 큰 타격을 받고 패주하고 말았다 [일부 일본 자료에는 일본군 전사 5명, 중상 5명, 경상 7명의 피해로 축소됨]. 이 전투는 동북항일연군이 국경을 넘어 추격해온 일본군과 만주국 군경 연합부대를 치밀한 매복작전으로 섬멸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동북항일연군 제2군 6사는 그후에도 남만주 일대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지속하여 일제에 큰 손실을 입혔다.

한국 학계도 차마 북한 주장을 수용하지는 못하고, 연변 학계 주장을 따르고 있는 것 같다. 당시 신문보도나 일본측 기록이 피해를 축소했다고 판단하는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

기록과 주장에 대한 검토

  • 전투에 참여한 항일연군 6사(師) 사장(師長)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고, 북한 김일성이 아니다.
  • 전투에 참여한 항일연군 2사의 사장은 조국안(曹國安, 1900~1937)인데도, 북한이나 중국 측 모두 조국안이 1936년말 전사했다고 하면서[10], 2사장은 조국안의 후임 조아범(曹亞範, 1911~1940)이라고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2사장 조국안은 1936년 후반부터 1937년 가을까지 지속적으로 6사장 김일성 부대와 연합해서 활동한 것이 국내 신문에 자주 보도되었고, 일본측 기록에도 그렇게 나온다. 그는 1936년이 아니라 1937년 말에 전사했다. 북한 김일성이 6사장이 맞다면 자신과 늘 같이 활동했던 조국안의 전사 시점을 잘못 알 수가 없으므로 이는 북한 김일성이 6사장이 아닌 가짜라고 자백하는 것이다.
  • 북한은 일본군측 지휘관이 김석원(金錫源, 1893~1978) 소좌라고 주장하나, 실제로는 김석원의 일본 육사 동기인 김인욱(金仁旭, 1892~ ?) 소좌이다. 김인욱은 해방 전 예편하고, 고향인 평안남도 용강에 살았으나,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한 후 소련으로 끌려간 뒤 소식이 끊어졌다. 북한은 엉뚱한 김석원에 대해 입에 담지도 못할 비방을 하고 있으나, 김석원은 해방전에는 김일성이나 항일연군과는 아무 관계도 없었고, 6.25 때 남침한 김일성의 군대에 맞서 싸운 일 밖에 없다.
  • 북한은 김일성이 조선인민혁명군이라는 날조된 부대의 총사령관으로 동북항일연군과 공동 작전을 한 것으로 주장하며, 그가 6사장이나 제2방면군장이었다는 주장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6사장이나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행적은 모두 북한 김일성이 한 것으로 만들었다. 항일연군 6사장 김일성은 1937년말 전사했고, 제2방면군장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이 맞으며, 조선인민혁명군은 존재한 적이 없는 날조된 부대이다.
  • 북한측이나 남한측의 한국독립운동사에도 당시 일본군측 지휘관 김인욱이 부상 당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김인욱은 전투 직후인 7월 6일에 기자회견도 가지고 있으므로 부상당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11]

각주

  1. 현재 북한 행정구역으로 양강도 김정숙군 김정숙읍이다. 신갈파진(新乫坡鎭)[신파] - 북한지역정보넷
  2. 2.0 2.1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6권 제17장 "5. 간삼봉전투"
  3. 전투 쌍방 피해 보도 1937-07-02 동아일보
  4. 전투 쌍방 피해 보도 1937-07-02 매일신보
  5. 국경지방에서의 치안 상황 : 제73회 제국의회 설명자료(帝國議會 說明資料) 1937 (소화12년)
  6. 간삼봉 전투와 관련한 당시 신문 보도
  7. 일본 측 전사자 명단과 사진 매일신보(每日申報) 1937년 07월 04일 04면 06단
  8. 8.0 8.1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 (平壤 : 民主朝鮮出版社, 1947. 11. 20) p.240
  9. 3. 동북항일연군 제1군 6사의 활약-보천보전투와 간삼봉전투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51권 1930년대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 / 제5장 중국공산당 만주조직과 한인들의 민족운동 /
  10.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5권 제14장 장백 사람들 (1936년 9월 ~ 1936년 12월) "4. 남만의 전우들과 함께"
  11. 1937-07-09 동아일보 김인욱의 전투 후 기자회견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