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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개요=
[[일본]]의 잃어버린 20년 동안 수많은 총리가 단명한 후에 처음으로 장기집권한 총리이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 동안 수많은 총리가 단명한 후에 처음으로 장기집권한 총리이다.  


==생애==
=생애=
1942년 1월 8일 [[일본]] 가나가와 현에서 일본 방위청장을 역임한 고이즈미 준야(小泉純也)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1962년에 게이오기주쿠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하여 1967년에 학교를 졸업했다. 정치인 집안출신이라 손쉽게 공천을 받아 1969년에 중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고, 훗날 [[일본 총리]]가 된 [[자유민주당(일본)|자유민주당]] [[후쿠다 다케오]]<ref>이 사람의 아들이 훗날 일본 총리를 역임한 [[후쿠다 야스오]]이다.</ref>의원의 비서로 일하다가, 다시 1972년에 중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대장성(현 [[일본 재무성]]) 정무관, 정무차관, 후생성 대신, 우정성 대신을 역임하는 등 탄탄대로를 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2001년 4월 26일에 [[일본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하였다.
1942년 1월 8일 [[일본]] 가나가와 현에서 일본 방위청장을 역임한 고이즈미 준야(小泉純也)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1962년에 게이오기주쿠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하여 1967년에 학교를 졸업했다. 정치인 집안출신이라 손쉽게 공천을 받아 1969년에 중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고, 훗날 [[일본 총리]]가 된 [[자유민주당(일본)|자유민주당]] [[후쿠다 다케오]]<ref>이 사람의 아들이 훗날 일본 총리를 역임한 [[후쿠다 야스오]]이다.</ref>의원의 비서로 일하다가, 다시 1972년에 중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대장성(현 [[일본 재무성]]) 정무관, 정무차관, 후생성 대신, 우정성 대신을 역임하는 등 탄탄대로를 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2001년 4월 26일에 [[일본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하였다.


==정책==
=총리시절=
==경제==
===우정개혁===
[[한국]]의 우정사업본부와 같은 역할을 하던 우정성을 기업화한 다음 [[민영화]]하였다.
 
==외교==
===대북정책===
===대북정책===
고이즈미 내각은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으나 [[북한]]이 다수의 일본인을 납치 감금했다는 사실을 접하고부터는 [[북한]]에 강경하게 대응했다.
고이즈미 내각은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으나 [[북한]]이 다수의 일본인을 납치 감금했다는 사실을 접하고부터는 [[북한]]에 강경하게 대응했다.


당시 북한의 최고 권력자인 [[김정일]]은 2002년 9월 17일 [[평양]]에서 열린 고이즈미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북한의 대남(對南) 공작 기관이 열세 명의 일본인을 납치하였는데, 여덟 명은 죽었고 다섯 명이 살아 있다."<ref>[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0505100021 『월간조선』 2005년 magazine, 납치자 문제 때 對北 강경노선 주도, 차기 총리감으로 浮上]</ref>는 이야기를 꺼냈다. 이 내용이 일본에 알려지자 일본인들은 엄청난 공분에 휩싸였다. 한 달 가량 후인 2002년 10월 15일 납북되었던 일본인들이 열흘 후에 [[북한]]으로 돌아간다는 조건 하에 [[일본]]에 귀국<ref>[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0505100021 『월간조선』 2005년 magazine, 납치자 문제 때 對北 강경노선 주도, 차기 총리감으로 浮上]<</ref>하였는데 이때 고이즈미 총리 및 [[아베 신조]] 관방장관 등으로 이루어진 고이즈미 내각은 이 일본인들을 [[북한]]으로 돌려보내지 않았으며, 이 납북 일본인들의 가족까지 [[일본]]으로 송환하라며 [[북한]]을 압박했고 결국에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그동안 '[[북한]]이라는 불량집단의 놀음에 놀아나 [[재일교포 북송]]등을 자행했던 기존 정권들과 달리 고이즈미 내각은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확실하게 보장한다'는 이미지를 주었으며 여기에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아베 신조]]는 고이즈미의 뒤를 이은 차기 총리가 되었다.
당시 북한의 최고 권력자인 [[김정일]]은 2002년 9월 17일 [[평양]]에서 열린 고이즈미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북한의 대남(對南) 공작 기관이 열세 명의 일본인을 납치하였는데, 여덟 명은 죽었고 다섯 명이 살아 있다."<ref>[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0505100021 『월간조선』 2005년 magazine, 납치자 문제 때 對北 강경노선 주도, 차기 총리감으로 浮上]</ref>는 이야기를 꺼냈다. 이 내용이 일본에 알려지자 일본인들은 엄청난 공분에 휩싸였다. 한 달 가량 후인 2002년 10월 15일 납북되었던 일본인들이 열흘 후에 [[북한]]으로 돌아간다는 조건 하에 [[일본]]에 귀국<ref>[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0505100021 『월간조선』 2005년 magazine, 납치자 문제 때 對北 강경노선 주도, 차기 총리감으로 浮上]<</ref>하였는데 이때 고이즈미 총리 및 [[아베 신조]] 관방장관 등으로 이루어진 고이즈미 내각은 이 일본인들을 [[북한]]으로 돌려보내지 않았으며, 이 납북 일본인들의 가족까지 [[일본]]으로 송환하라며 [[북한]]을 압박했고 결국에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그동안 '[[북한]]이라는 불량집단의 놀음에 놀아나 [[재일교포 북송]]등을 자행했던 기존 정권들과 달리 고이즈미 내각은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확실하게 보장한다'는 이미지를 주었으며 여기에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아베 신조]]는 고이즈미의 뒤를 이은 차기 총리가 되었다.
===공공부문 개혁===
재임 중 주목할 만한 업적으로 우정개혁이 있다.
====우정개혁====
[[한국]]의 우정사업본부와 같은 역할을 하던 우정성을 기업화한 다음 [[민영화]]하였다.
==각주==
==각주==
<references/>
<references/>
[[분류:일본 정치인]]
[[분류:일본 정치인]]

2020년 9월 30일 (수) 19:00 판

고이즈미 준이치로.jpg
고이즈미 준이치로
小泉 純一郎
직책 일본 제87대 내각총리대신
(2001.4.26 ~ 2003.11.19)
←전임후임→

일본 제88대 내각총리대신
(2003.11.19 ~ 2005.9.21)
←전임후임→
일본 제89대 내각총리대신
(2005.9.21 ~ 2006.9.26)
←전임후임→

출생일 1942년 1월 8일
학력 게이오기주쿠대학 경제학부(학사)
자녀 차남 고이즈미 신지로
정당 자유민주당

개요

일본의 잃어버린 20년 동안 수많은 총리가 단명한 후에 처음으로 장기집권한 총리이다.

생애

1942년 1월 8일 일본 가나가와 현에서 일본 방위청장을 역임한 고이즈미 준야(小泉純也)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1962년에 게이오기주쿠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하여 1967년에 학교를 졸업했다. 정치인 집안출신이라 손쉽게 공천을 받아 1969년에 중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고, 훗날 일본 총리가 된 자유민주당 후쿠다 다케오[1]의원의 비서로 일하다가, 다시 1972년에 중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대장성(현 일본 재무성) 정무관, 정무차관, 후생성 대신, 우정성 대신을 역임하는 등 탄탄대로를 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2001년 4월 26일에 일본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하였다.

총리시절

경제

우정개혁

한국의 우정사업본부와 같은 역할을 하던 우정성을 기업화한 다음 민영화하였다.

외교

대북정책

고이즈미 내각은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으나 북한이 다수의 일본인을 납치 감금했다는 사실을 접하고부터는 북한에 강경하게 대응했다.

당시 북한의 최고 권력자인 김정일은 2002년 9월 17일 평양에서 열린 고이즈미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북한의 대남(對南) 공작 기관이 열세 명의 일본인을 납치하였는데, 여덟 명은 죽었고 다섯 명이 살아 있다."[2]는 이야기를 꺼냈다. 이 내용이 일본에 알려지자 일본인들은 엄청난 공분에 휩싸였다. 한 달 가량 후인 2002년 10월 15일 납북되었던 일본인들이 열흘 후에 북한으로 돌아간다는 조건 하에 일본에 귀국[3]하였는데 이때 고이즈미 총리 및 아베 신조 관방장관 등으로 이루어진 고이즈미 내각은 이 일본인들을 북한으로 돌려보내지 않았으며, 이 납북 일본인들의 가족까지 일본으로 송환하라며 북한을 압박했고 결국에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그동안 '북한이라는 불량집단의 놀음에 놀아나 재일교포 북송등을 자행했던 기존 정권들과 달리 고이즈미 내각은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확실하게 보장한다'는 이미지를 주었으며 여기에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아베 신조는 고이즈미의 뒤를 이은 차기 총리가 되었다.

각주